들어가며
전혜린은 ‘흑역사’인가
소위 ‘흑역사’란 무엇인가. 지난 시절에 무엇이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가를 결정할 때 나는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 근거를 찾는가. 지금 이곳에서 ‘세련됨’으로 인정받는 기준에 근거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과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뭘 몰랐던 나, 관조적인 태도와 세상을 향한 거리감이라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덜 성장한 나, 벅찬 단어로 내 감정을 과장하는 데 급급했던 나, 순진하거나 무지하거나 좁은 반경의 세계 안에서 자족하던 나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간단히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그때의 내가 그랬을 리 없어, 잠깐 취해 있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성숙하다. 아니, 어쨌든 성장해야만 한다. 아무려나.
이를테면 흑역사의 추억은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이 유명한 구절 같은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가 비판받았던 지점. ‘화제성’은 있지만 ‘좋은’ 시가 아니라는 평가, 뛰어난 미모에 덧붙여 서울대 출신/노동운동/이혼이라는 ‘화려한’ 이력, 그리고 ‘진지한’ 출판사 창비에서 그녀를 대대적으로 뒷받침해줬기 때문에 유명해졌을 뿐이라는 수많은 지적들. 그런 비판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의 생명력과 그 시가 불러일으킨 커다란 공감대에 가닿지 못하고, 또 그 이면을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최영미의 시 자체가 ‘투쟁가’보다 더 자주 즐겼던 ‘사랑 노래’ 같은 것이었다. 나는 20대 초반에 최영미의 그 시집을 샀고, 아직도 갖고 있다. 첫 장을 펼치면 ‘98년 4월 20일’이라고 시집 구입 시기에 적은 메모가 보인다.
이제 와선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전혜린에 대해,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김양선이 언급한, “개인과 집단이 동일한 규범, 관습, 풍습이라는 토대 위에서 공유된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현재 정체성을 구성하는 행위”로서의 ‘문화적 기억’을 나의 개인적 체험 위주로 재구성한다면,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 50권 전집, 에이브 문고, 에이스 문고, 파름문고, 할리퀸 로맨스, 그리고 전혜린으로 이어질 것이다. 1970년대생의 ‘문학소녀’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올 단어들이다. 이 중에는 내 또래 대부분의 남성들이라면 아예 책장을 들춰본 적이 없을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들이 풍미했을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재구성하는 많은 작업들에서, 이 책들과 이것이 10대 소녀들에게 불러일으켰던 열광적인 호응은 기록될 가치가 없는 디테일로 여겨질 것이다. 86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 하계올림픽, 박종철과 이한열, 6월 항쟁, 임수경, 베를린장벽, 천안문사건, 미하일 고르바초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문민정부로의 이행 등이 그 시기를 결정짓는 거대한 기표들이다. 출판계를 돌아보더라도 나의 ‘문화적 기억’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소설 손자병법』(정비석 지음, 은행나무 펴냄), 『영웅문』(김용 지음, 고려원 펴냄), 『접시꽃 당신』(도종환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홀로서기』(서정윤 지음, 문학수첩 펴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남부군』(이태 지음, 두레 펴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지음, 김영사 펴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지음, 자유문학사 펴냄),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지음, 창비 펴냄), 『서편제』(이청준 지음, 열림원 펴냄), 『반갑다 논리야』(위기철 지음, 사계절 펴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등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당시의 베스트셀러는 민족적 열정을 자극하거나 부와 야망을 찬양하는 남성 작가들의 책, 연애와 사랑을 노래하는 남성 시인들의 작품이 대다수다. 여기에 할리퀸이라니, 전혜린이라니.
만약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할리퀸 로맨스, 혹은 전혜린에 대해 누군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면 그 기억에는 어떤 의미가 담길까. 학교나 가정에서 여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주지 않았고, 심지어 ‘생리’라는 단어조차 아예 금기시되다시피 하던 시절, 많은 이들에게 10대의 첫사랑은 차단됐던 시절, 그래서 또래 학생들의 용돈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책들을 서로 돌려보며 로맨스와 섹스와 사랑과 온갖 아름다운 것을 꿈꿔보던 시절의 공통된 기억이 나오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전혜린의 글은 10대 초반 ‘문학소녀’의 정통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갈 때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처음 접했다. 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같은 반 친구 하나가 느닷없이 “우리 언니가 무척 좋아하는 책인데 너한테도 어울릴 것 같아.”라며 그 책을 건넸다. 아마 하루 만에 다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친구에게 돌려주고, 서점에 가서 삼중당의 문고본을 구입해서 재독했다.
아스팔트 킨트, 소식小食과 불면, 인식욕, 절대로 평범해져선 안 된다는 전혜린의 맹세가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다. 그전까지 읽었던 한국 동화들은 왜 그렇게 과수원과 따뜻한 고향집이 많이 등장했는지, 서울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사를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도저히 그 동화들을 현실감 있게 읽지 못했다. 그런데 전혜린의 에세이 「홀로 걸어온 길」의 강력한 첫 문장,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를 접한 순간 나는 비로소 아스팔트 위 나의 고향을 찾은 것 같았다.
“학생 시절에는 건강한 육체와 비대한 육체를 같이 생각하고, 그런 육체와 우둔한 정신을 동일어로 보고 경멸할 때가 있다.”, “나는 자연히 음식을 소홀 경멸하게 되었고 소식과 불면을 중학생 때부터 지켜왔었다.”,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 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등의 구절을 읽고 난 다음에는, 소식까지 실천하긴 힘들었지만 불면은 마음먹고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일부러 밤을 새운 다음 불그스레한 여명을 맞으며, 동네 테니스장에 심겨 있던 은사시나무의 잎사귀들이 팔랑거리는 걸 보며, 그 가지마다 앉아서 시끄럽게 재잘대는 참새들에게 귀 기울이며, 아직까지 깊게 잠들어 있던 동네의 고요를 맛보면서, 나만 아는 무언가를 간직한 것 같은 뿌듯함에 사로잡히며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전혜린을 제멋대로 가깝게 여겼다.
그리고 전혜린의 글 속에 언급된 다른 책들, 이를테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와 몇 년 뒤에는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까지. 전혜린이 에세이 「새로운 사랑의 뜻」에서 언급한 바흐만의 『맨해탄의 선신Der gute Gott von Manhattan』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를 읽는 수순을 밟았다. 전혜린에게 공감한다면 그녀가 사랑했던 책에도 당연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춘기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어릴 때는 아무 불만 없었던 일상의 많은 부분이 시시해졌고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라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일기장에 베껴 쓰며 다른 시공간을 공상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들 중 일부가 아니야.’라는 의식은 주변에 대한 은밀한 우월감이기도, 나는 왜 그들 같지 못한가라는 초조한 자괴감이기도 했다.
전혜린은 나의 방황하는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전혜린이 언급한 키르케고르의 ‘오식활자의식誤植活字意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른 살이라는 엄청난 어른이 쓴 글을 열다섯 살의 내가 이해한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도 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내 말은, 전혜린이 그렇게 비웃음과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나는 20대 초반 이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삼중당 문고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었다. 그리고 이후에 출간된 그녀의 미공개 일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도 내처 읽었다. 열다섯 살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선 더 넓은 시공간까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전혜린을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전형으로 단정 짓던 이들은 전혜린의 몇몇 유명한 구절들 외에 무엇을 더 알고 있는가? 문학소녀 카테고리를 전혜린이라는 단 한 명으로 싸잡아 일컫기는 쉽다. 그러나 정작 문학소녀에 대해, 그 문학소녀 카테고리를 창조하다시피 했던 전혜린에 대해 알고 있긴 한가? 전혜린이라는 드문 개인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는, 과거의 인물 전혜린의 지적 허영이 지금에 와서는 유치해 보인다는 게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남들과 달라지겠다는 그 허영심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성장해온 출발점이 아닌가?
이후의 행로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졌지만, 내 또래의 수많은 소녀들은 전혜린의 글을 읽으며 지금-내가 속한-현실에 대한 불만을 비로소 인지했고 문학에 심취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고 낯선 장소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에서 출발하는 독서의 행로, 즉 “개인의 일상적인 독서 체험과 관련된 기억”은 김양선의 말처럼 “여성의 역사에 대한 공식적인 ‘망각’에 대항하는 ‘대항기억countermemory’”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젠더화된 문화적 기억을 상연하는 향수 서사nostalgia narrative는 자칫 이상화된 과거를 향한 동경에 그칠 수도 있지만 젠더화된 역사적 경험을 펼쳐 보이는 내러티브와 의례들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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