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브뤼노 라투르의 하이브리드 세계
프롤로그: “당신은 실재의 존재를 믿습니까?”
1996년 6월 어느 더운 오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근교 테레조폴리스라는 열대 산악지대의 호숫가에서 중년의 서양 남성 두 명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학술 토론회 참석 차 이곳에 온 이들은 국적과 분야는 다르지만 각자의 연구 업적으로 존경받는 학자들이다. 한 사람은 미국의 심리학자로 기성 자연과학 학계의 인정받는 일원이다. 또 한 사람은 전혀 다른 과학 문화에 속해 있다.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인류학자이며 성장하고 있는 학제적 과학기술학STS 분야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심리학자는 익명이다. 인류학자가 바로 우리 관심의 초점이자 이 대화의 전달자인 브뤼노 라투르다(Latour 1999b:1장).
두 사람의 대화 자체는 우호적이지만 전후 맥락은 극적이다. 심리학자의 모국인 미국에서는 “경성” 과학과 “연성” 과학, 즉 자연과학과 인문학 간의 관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양측의 갈등은 나중에 “과학전쟁”이라 불리게 될 만큼 심각하다. 이 논전에는 이른바 “지식사회”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과학, 정치, 사회 간의 관계라는 문제가 걸려 있다. 과학인류학자로서 라투르는 이 광범위한 변화를 분석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과학을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문제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법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주류 과학철학자들과 목소리 큰 자연과학자들은 그러한 “사회구성주의적”, “탈근대적” 관점을 회의적이고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테레조폴리스의 호숫가에서 라투르와 마주한 미국 심리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만남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기이한 대화는 이런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궁극적으로 근대 세계의 토대 가운데 하나인 과학 지식의 지위에 관한 논쟁이다. 과학 지식이라는 것이, 계몽주의 이상의 세례를 받은 현대 하이테크 사회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의 세계관, 자기인식,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이런 생각에서 미국 심리학자는 라투르를 찾아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실재의 존재를 믿습니까?” 순진한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라투르가 답한다. “물론이죠. 무슨 말씀입니까? 실재라는 것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라투르의 대답에 고무된 심리학자는 두 가지를 더 묻는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지금 과거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라투르는 그렇다고 답한다. “물론이죠. 천 배는 더 많이 알고 있죠!” 두 번째는 과학철학의 고전적 문제로 과학 지식은 누적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라투르는 그렇다고 답하고는 다만 과학 분야에서는 불행히도 과거를 잊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인다. 이제 심리학자는 기쁘고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라투르는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자신이 어찌했기에 그런 괴상하고 그릇된 질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 것인가? 과학을 역동적인 사회 활동으로서 연구하여 더 실재적인 과학의 상을 구현하려는 자신과 동료들의 노력이 어쩌다가 그런 근본적인 오해를 받게 된 것인가? 과학적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근본적으로 존중해온 자신을 어떻게 그리도 쉽게 싸구려 반과학주의와 혼동할 수 있단 말인가?
1980년대 초 이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이론적 지평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이 대화가 “실재론자”와 “사회구성주의자”, “근대주의자”와 “탈근대주의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정형화된 유형 간에 벌어지던 논쟁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캐리커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판도라의 희망』Pandora’s Hope, 1999b에서 라투르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한 기초로서 이 일화를 소개하고, 당시 진행 중이던 과학 논쟁에 대한 논평으로 이런 표어를 내건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접근법을 명확히 하기 위해 라투르는 근대주의적 사고방식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인식론과 존재론, 정치학과 심리학, 신학에 모두 관여하고 자연과 사회, 신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근대 과학철학이 만들어낸 이른바 “실재론”보다 이러한 입장이 훨씬 더 실재적이라고 본다. 바로 이 점에서 라투르는 근대 서구인들이 세계에 대한 일상적 해석에서 사용하는 일련의 범주화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 수 있는지 명백히 보여주기 위해 위 일화를 이용한다. “실재의 존재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이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도대체 그런 질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제기도리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근대 세계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범주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애초에 우리가 진정 근대적이었던 적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런 범주들을 넘어서야 한다(Latour 1993).
브뤼노 라투르의 폭넓은 지적 기획을 다루는 이 책은 이 모든 이슈를 (그리고 그 이상을) 검토할 것이다. 이 일화를 먼저 꺼낸 것은 “사회구성주의”, “탈근대주의”, 나아가 “과학철학‘ 같은 몇 가지 간단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적 범주로 라투르를 이해하려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다. 라투르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익숙한 범주와 지적 습관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근본적인 의지가 필요하며 독자들의 그러한 재구성 과정을 돕는 것이 입문서로서 이 책의 목적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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