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좀 들어라
바깥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1층에 누가 와 있는 듯하다. 눈이 건조해서 잘 떠지지도 않는다. 민수는 침대맡에 둔 인공 눈물을 양쪽 눈에 두 방울씩 넣은 다음에야 제대로 눈을 떴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누나 자령이 거실 탁자 위를 정리하고 있다.
“그냥 놔둬요.”
“아주 자알한다. 이게 뭐냐? 또 게임하다가 늦게 잤지? 건강에 안 좋다고 컵라면도 좀 작작 먹으라 했잖아. 과자에 컵라면에, 하여간.”
“내가 치운다고.”
민수가 자령이 서 있는 탁자 쪽으로 갔다. 손이 빠른 자령은 벌써 어질러졌던 거실을 다 치워가고 있다. 게임기 선과 스틱은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과자 봉지는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자령은 청소기를 가져와 바닥을 밀었다.
“게임 좀 작작 해.”
윙윙대는 청소기 소리에도 불구하고 자령의 잔소리가 똑똑히 다 들렸다.
“친구가 재밌다고 해서.”
“그래서 몇 시까지 했어?”
“그냥 뭐.”
“2시?”
민수는 게임기에서 시디를 꺼내 케이스에 넣으며 딴청을 피웠다.
“3시?”
민수는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설마 4시? 그럼 그렇지. 그때 잤으니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못 일어나고 있지.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11시네.”
민수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며 대답했다.
“아주 말은 잘하지.”
자령이 청소기 헤드를 들고 위협하는 바람에 민수는 뒤로 물러났다.
“하여튼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일찍 좀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밥도 좀 제때 먹고. 그동안 너 계속 이렇게 지냈던 거지?”
“그만 좀 해요.”
“뭘 그만해? 너나 그만해, 이 녀석아.”
“내가 잔소리 들으러 여기 왔는지 알아요? 자꾸 이러면 나 여기 못 있어.”
“그럼 어쩔 건데? 갈 거야? 갈 거냐고?”
민수는 끙 하고 신음 소리만 낼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대거리를 했다가는 싸우고 말 거다.
“이건 또 뭐야?”
자령은 책꽂이 틈에서 발견한 걸 꺼내 민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민수는 아차 싶었다.
“너, 내가 담배 피우지 말랬지? 나한테 안 피운다고 했어, 안 했어?”
“줘요.”
민수는 자령의 손에서 담뱃갑을 낚아채 다시 책꽂이에 끼웠다. 그러자 자령은 곧바로 담뱃갑을 꺼내더니 안에 든 담배를 모두 반으로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깝게, 그걸 왜……”
“아깝긴 뭐가 아까워, 이 녀석아! 다신 피우지 마. 피우지 말라고!”
분이 안 풀린 자령은 급기야 주먹으로 민수의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민수는 아프다고 화를 내며 자령을 노려보았다.
“가자미눈을 하고 보면 어쩔 건데?”
“아, 진짜! 제발 좀 그만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죽을 때까지 이럴 거다. 어쩔래?”
“누나! 내가 언제까지 누나한테 애 취급 받아야 하는데? 내 나이가 몇인 줄 몰라요?”
“안다, 이 녀석아. 쪼그만 게 어디서 나이 타령이야.”
“쪼그맣다니? 나도 예순이 넘었다고!”
민수가 소리를 빽 질렀고,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최 피디가 들어 왔다.
“여사님 와 계셨네요. 오늘 감독님 인터뷰가 있어서요.”
최 피디가 고개를 숙여 자령에게 인사했고, 자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최 피디를 보며 활짝 웃었다.
“최 피디, 나한테 이러기야? 김 감독 담배 피우면 나한테 알리라고 했잖아.”
“아, 그게……”
“나 담배 피울 거야. 내가 왜 누나 눈치 보느라 담배 하나 못 피워?”
“너 작년에 폐 시티 결과 뭐라고 나왔어? 의사가 계속 담배 피우면 폐암 걸리는 거 시간문제라고 했잖아. 그래도 계속 피울 거야? 어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 이런 꼴 안 보지.”
“아, 누나 왜 또 그래요.”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다 내 탓이지, 뭐.”
김 감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령을 그대로 놔두었다간 더한 이야기가 나올 거다.
“알았어요. 다신 안 피워요. 그럼 됐죠?”
자령은 김 감독 대신 최 피디를 바라보았다.
“최 피디, 분명 김 감독이 말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김 감독 담배 피우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말을 마친 자령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김 감독은 담배를 좀 줄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령의 감시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폐암이란 말에 조금 움찔했다. 젊은 날에는 술, 담배 하면 암에 걸린다느니 일찍 죽는다느니 아무리 말을 들어도 귀에 전혀 박히지 않았다. 그건 정말 먼 미래의 이야기니까. 그런데 어느새 김 감독은 그 시간 위에 서 있었다.
“점심 먹고 갈 거지? 최 피디, 그럴 시간 되지?”
자령이 거실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물었다.
“네, 됩니다.”
최 피디가 주방을 향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감독님, 오늘 2시 인터뷰니까 1시에는 출발해야 해요.”
“알았다고.”
김 감독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소파 위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 피디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러다가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김 감독은 인터뷰를 무척 싫어한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터뷰를 거절한다. 다른 감독들이 영화 홍보를 위해 들어오는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것과 달리, 김 감독은 첫 시사회와 개봉 당일 딱 두 번 공식 행사의 인터뷰만 한다.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질색이라 거의 나간 적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 감독을 ‘불친절한 피터 씨’(김 감독은 ‘피터 김’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부른다.
오늘 인터뷰는 영화 홍보와는 관계없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김 감독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많은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5년 전, 김 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고, 그 이후로 작품뿐 아니라 생활도 주목을 받았다. 김 감독은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을 대부분 다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은 한 학기 동안 특강을 나가기로 한 대학교에서 특별히 부탁을 해와 어쩔 수 없었다.
“감독님,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최 피디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여전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 최 피디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는 자령이 냄비에 북어를 넣고 달달 볶고 있었다.
“여사님, 어쩌죠? 감독님이 아직 준비를 안 하고 계시네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말이죠.”
“하여튼 이 녀석을 그냥……”
자령은 도마 위에 놓인 대파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너 점심 안 먹고 갈 거냐?”
“먹을 거예요.”
“이렇게 늑장 피우다간 점심 못 먹고 갈 텐데? 늙은 누나가 괜히 상 차리는 게 아닐까 싶다.”
“걱정 마요. 먹고 갈 거예요.”
김 감독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얼른 준비해야지.”
자령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아, 진짜 가기 싫은데.”
결국 김 감독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니, 강의만 하면 됐지 무슨 홍보까지 하라는 거야?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봉식이가 분명 그랬어, 안 그랬어? 조용히 학생들만 가르치면 된다며, 내가 그래서 하겠다고 한 거잖아. 그때 최 피디도 분명히 들었지.”
봉식은 김 감독의 오랜 친구로, 이번에 김 감독이 강의를 나가기로 한 대학의 직원이다. 이번 특강도 봉식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하게 되었다.
“네. 박 실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감독님이 워낙 유명하시니까 학교 입장에서는 이런 홍보 기회를 놓칠 수 없을 거예요. 이번 딱 한 번만 인터뷰해주세요. 그러면 기자들도 더 이상 귀찮게 안 할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도 인터뷰 절대 안 잡을게요.”
사실 최 피디 입장에서도 인터뷰는 별로 반갑지 않다. 쏟아지는 요청을 거절하는 것보다 김 감독을 설득하는 일이 훨씬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거절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욕을 좀 먹더라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옆집 사람이라는 ‘지인 찬스’를 사용해 계속 연락이 온다. 거절하면 “아, 그거 하나 연결 못 해줘? 우리가 남이야?”라며, 사실은 남이 맞는데도 도리어 화를 낸다.
“너 계속 이럴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봉식이 부탁인데? 봉식이네 아니었으면 나 가게에서 쫓겨났어. 그러면 우리 식구 다 길바닥에 나앉았다고.”
자령이 옛이야기를 꺼냈다. 김 감독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령은 봉식이네 건물에 세를 살며 장사를 했다. 책만 볼 줄 아는 무능력한 아버지와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자령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자령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방직 공장에 다니며 돈을 모았고, 20대 초반 그간 모은 돈으로 시장에 건어물 가게를 열었다. 장사가 안 돼 몇 차례 임대료가 밀리는 일이 있었지만, 김 감독과 봉식이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봉식의 부모님은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자령은 건어물 가게를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나도 할 만큼 했잖아. 걔네 집 망해서 봉식이 대학등록금 없어 쩔쩔맬 때 도운 게 누군데?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얘기해. 옛날얘기 지겹다고.”
“너 말 아주 이쁘게 한다.”
자령은 이를 악문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 감독은 누나가 화를 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바로 화를 낼 때보다 이렇게 참다 참다 폭발하면 더 무섭다는 걸 알기에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준비해요, 준비해. 누가 안 한대?”
김 감독이 욕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최 피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 자령을 부른 건 최 피디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미리 자령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고집불통 안하무인 김 감독이 유일하게 말을 듣는 상대는 바로 누나 자령이다.
김 감독이 올해 하반기를 한국에서 머물기로 한 건 사실 자령 때문이다.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기 위해 모국인 한국에서 지내며 다음 시나리오를 집필할 계획이라고 했지만, 자령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다. 매년 김 감독은 열흘에서 한 달 정도 한국에 자령을 보러 온다. 올해 만난 자령은 작년과 달랐다. 김 감독보다 여덟 살이 많은 자령은 올해 일흔 살이 되었고, 노화는 서서히 오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계단식으로 훅훅 진행되었다. 올해 자령은 계단 하나를 더 밟고 내려갔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김 감독은 내후년 개봉을 목표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의 수정 작업을 할 계획이다. 새로운 곳에 머물다 보면 막혔던 부분이 뚫릴지도 모른다.
한 시간여의 인터뷰가 끝났다. 오는 길 내내 툴툴거리던 것과 달리 김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친절히(물론 다른 감독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제법 친절했다) 답을 했다. 사전 약속을 어기고 차기 작품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가 있어 최 피디가 순간 긴장했지만, 다행히 김 감독은 “선물이 뭔 줄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라고 말하며 화를 내지 않고 잘 넘겼다. 김 감독은 준비 중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한번은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 줄거리가 외부로 유출된 적이 있었는데, 아예 그 영화 작업을 중단했다. 영화 작업을 비공개로 진행하는 건 김 감독의 오랜 불문율이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감독님.”
최 피디가 말했다. 김 감독과 최 피디는 홍보실 직원이 건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꼭 누나한테 보고하게. 자네 우리 누나한테 보고하는 거 좋아하니까.”
물을 마시던 최 피디는 목에 사례가 들렸다. 최 피디가 손사래를 치며 그게 아니라고 했지만 캑캑거리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당을 나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두 명의 소년이 김 감독 앞을 막아섰다. 한 소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수깡처럼 키가 크고 말랐다. 또 다른 소년은 큰 머리와 그보다 더 큰 몸에 붙은 목, 팔, 다리가 무척 짧아 마치 눈사람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듯했다.
“피터 김 감독님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주민수라고 해요. 감독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키가 큰 아이가 다가서며 말하자, 최 피디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학생들, 이러면 안 돼요. 감독님이 바쁘셔서요.”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10분만, 아니 5분만이요.”
최 피디에게 붙잡힌 소년이 김 감독을 바라보며 사정을 했다. 김 감독은 최 피디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낸 후 앞을 향해 걸었다.
“아저씨! 제발 부탁드릴게요. 저 감독님이랑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요!”
최 피디 팔에 매달린 소년은 자신이 찾아온 사정을 이야기했다. 최 피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학생, 몇 살이죠?”
“열다섯이요.”
“잠깐만 여기 있어요. 내가 감독님이랑 이야기하고 올게요.”
최 피디는 김 감독에게 갔다. 인상을 쓰며 최 피디의 말을 전해 듣던 김 감독의 표정은 최 피디가 말을 할수록 점점 더 찌푸려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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