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집은 인류의 문명사다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
집의 출발은 부엌이었다.
주택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은 부엌이다. 부엌은 주택의 심장으로, 취사와 난방, 가정적 활기라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집의 모양은 근본적으로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지금 짓는 집에서 100년 뒤에 산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며, 100년 전에 지어진 집에서 지금 산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100년 전의 예스러운 집이 운치는 더 나을 때도 있고, 사람 사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와 닿는 점도 많다. 그런데 그 모습이 현저하게 바뀌며, 5년 전이 다르고 20년 전에는 아주 딴판이었던 유일한 공간이 있으니, 그것이 곧 부엌이다. 부엌은 문명의 수준을 드러내며 GNP를 반영한다.
어린 왕자의 집에는 부엌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 먹는 걸 너무 밝힌 탓도 있지만, 먹는 일 이외에 중요한 일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집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유일한 시설인 화덕은 그것이 비록 호박돌 몇 개를 빙 둘러 놓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해도, 그 공간의 주 기능이 부엌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그 밖의 시설물로는 깔개가 고작이었다.
인류의 어린 시절 우리는 부엌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화덕을 중심으로 먹고 자고 했다. 집의 평면은 부엌의 기능이 분화되고 발전된 것이다. 동그란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은 식구가 늘어나고 대가족이 되면서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포도송이처럼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올망졸망 엮어진 집을 만들기도 했지만, 동그라미 자체를 밀가루 반죽처럼 길쭉하게 늘리기도 하였다. 타원형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가 타원형에도 한계가 오자 사각형 평면이 탄생하였다. 가장 쉬운 기하학에 도달하는 데 꽤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사각형과 더불어 문명은 시작되고 어린 왕자는 사라졌다. 기능의 분화와 효율성이 조금씩 평면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심정이 지배하던 역사에 논리의 지배가 자라났다. 네모꼴로 늘어난 집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구덩이가 파였다. 식품 저장소와 외양간이 가장 먼저 칸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집을 ‘가家’라 하는데 이 글자를 잘 들여다보면 지붕 밑에 사람 대신 돼지가 살고 있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사이족Maasai의 집단 주택은 여러 개의 원추형 집들이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그 한가운데에 저장소와 외양간으로 된 또 다른 동그라미를 품고 있다. 생존과 관계된 이러한 시설은 중요시되다 못해 신성시되었다. 마사이족들에게 가축은 부富일 뿐만 아니라 신비적이고 종교적이며 문화의 기초를 형성하고 경제적 가치를 초월하는 의식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주택과 다른 건축을 구별하는 결정적 공간은 부엌과 침실이다. 초기 인류의 집에는 이 두 가지 기능이 모두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상당히 진보된 로마 시대조차 시골 서민들의 집은 기능 분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민초들은 부엌에서 먹고 잤으며 심지어 가축까지 길렀다. 예수가 외양간에서 태어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대부분의 민초들은 부엌과 외양간이 구별이 되지 않는 공간에서 살았다. 내가 성서를 다시 쓴다면 ‘예수님은 부엌에서 태어나셨다’고 쓸 것이다. 그것이 더 사실적이며 보편성이 있다. 민초들은 주로 부엌에서 살았다. 그러니 부엌에서 태어났어야 옳다.
현대인은 거실을 집의 중심 공간으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 거실의 개념이 확립된 것은 근세기에 들어서이며 전세기前世紀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에는 거실이란 게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거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합적 생활 형태가 수용되던 곳은 오히려 부엌이었다. 부엌은 취사뿐만 아니라 작업과 가내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서양 소설을 읽다 보면 손님이 곧장 부엌으로 드나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부엌의 큰 난로 위에는 김을 내며 끓고 있는 주전자가 있고, 부엌의 큰 식탁 옆에는 뜨개질을 하는 주부가 있으며, 그 곁에는 장부를 정리하고 편지를 쓰는 가장이 있다. 그것이 가정의 이미지였다. 부엌을 떠나 가정의 이미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산타클로스를 보라! 그가 애용하던 주 접근로main access인 굴뚝은 부엌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한국의 부엌은 창조적 공간이었다.
세계 주거 문화사에 유래가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인 온돌을 탄생시킨 한국의 부엌은 원래가 넉넉하고 활기 있는 창조적 공간이었다.
중학교 때, 한국의 부엌은 동선이 길고 오르내림이 많아 불합리하고 비위생적이라는 얘기를 식민지 교육의 성공적인 희생물이었던 우리들의 선배님들 혹은 선생님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런데 괴테의 집과 모차르트의 생가를 방문해 그들이 쓰던 부엌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우리의 부엌을 매도했던 그 선배님들과 선생님들이 실은 맹목적인 식민지적 지성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합리주의의 화신인 양 뽐내는 서양인들의 부엌은 아예 주생활 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많았다. 한국의 부엌은 다른 거실과 최소한 동일한 평면 위에 있었으며, 취사의 여열로 주생활 공간의 난방을 행하는 에너지 절약의 지혜를 발휘하였고, 부뚜막과 선반으로 기물을 정리하는 연속적이고 수평적인 작업 동선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서양 주택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비싼 돈을 주고 밥을 사 먹는 일이 더 편했다. 벽난로에 코를 꿰어 매단 냄비로 밥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에 비하면 한국의 부엌은 훌륭했다. 가마솥에서는 언제나 물이 끓고 있어 위생적인 식기 세척이 가능했으며, 아무리 자질구레한 소재일지라도 가마솥에 풍덩 넣고 휘휘 저은 후 적당히 양념하여 주물럭거리면 먹거리가 되었다. 우수한 부엌 시설 때문에 한국인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었고, 돼지 족발이나 쇠꼬리를 고급 음식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한편 한국인의 부엌은 흙바닥이어서 소금에 절인 온갖 채소를 파묻어 저장해 둘 수 있었다. 그것이 발효 음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가마솥과 더불어 한국인을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구제하여 살아남도록 한 생존 기술이 되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소금을 너무 많이 먹는 것만 빼면 한국인의 식품은 대체로 선진형 건강식품이다.
한국의 부엌은 공간이 넉넉하였다. 그것은 아궁이와 가마솥, 부뚜막 그리고 온돌 같이 24시간 연속적으로 기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과 한국의 음식 문화 유형이 비록 겨울 음식이라 할지라도 장시간의 복잡한 손질을 요구하는 쪽을 발달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유추할 수 있다. 손재간이 많은 한국인의 가내 생산도 아궁이를 확보하고 있어서 난방 상태가 좋았던 부엌에서 영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한국인의 부엌은 일을 할 수 있는 다용도의 평상 같은 것을 비치할 정도로 넓었다.
그러던 부엌이 움츠러든 것은 ‘남녀7세부동석’이란 말이 나오면서였다. 이 말은 우리들의 훌륭한 공간의 활기를 군자로부터 빼앗아 그 시대의 소외 계층이었던 아녀자의 전유물로 분배하고 말았다. 그 공간의 훌륭함과 풍요로움, 철학적 의미와 기능적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부엌이 그 시대의 가장 불행했던 계층에게 전속되었다는 사실은 가치의 평준화나 분배의 평등 차원에서 어쩌면 공평했던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군자들은 삶의 활기가 넘치며 항상 먹을 것이 있고, 인간적이고 구수한 이야기와 군감자가 함께 익어 가는 부엌을 빼앗긴 채, 재미없는 서책이나 읽으며 차가운 마루방에서 도포 자락에 감춘 몸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엌은 차츰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그 많은 노동집약적 음식 문화는 축소된 부엌에서 실행될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뒤뜰에 임시로 부뚜막을 설치하여 장을 끓이고 김치를 담갔으며 부침개를 지지고 잔칫상을 준비하게 되었다. 남자들을 쫓아낸 부엌은 건축적으로보다 심리적으로 천대를 받았으며, 남편 대신 강아지가 지키고 있다가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은 며느리의 축구공 노릇을 해 주기도 하였다. 부엌을 잃은 한국 남자들이 찾아갈 곳은 외상으로도 허풍을 떨 수 있는 주막집밖에 없었다.
부뚜막과 가마솥, 우리 문화의 기초가 되다.
한민족의 부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부뚜막과 가마솥이다. 가마는 한국 특유의 주방 시설이다. 한국인은 이것으로 밥을 짓고 갖은 찜을 만들었으며 떡을 해 먹었다. 가마솥의 뚜껑을 뒤집으면 커다란 프라이팬이 된다. 제삿날이나 잔칫날이면 솥뚜껑을 엎어 놓고 기름칠을 하여 부침개를 만드는 아낙네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 이것은 한국적 문화의 모형을 말해 준다. 한국인은 끓이고 볶고 삶고 찌고 썩혀서 음식을 만드는데, 가마솥은 고도로 발달한 탕반류 음식 문화의 기반 시설이 되었다. 유난히 뜨겁고hot 매운hot 음식을 선호하며, 전쟁터의 참호에까지 뜨거운 국을 날라야 싸움이 되는 한반도의 문화는 가마솥이 만든 것이다.
외국 사람들은 주로 쇠막대기로 만든 삼각대에 코를 꿰듯 냄비를 매달아 놓고 음식을 끓였다. 이러한 원시적인 방식은 요즈음 야영하는 사람들의 취사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요리 방법은 대단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미국 개척 시대의 오두막에서나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의 부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부뚜막이 없었다.
어린 시절 보이스카우트의 일원으로 야영 생활을 많이 하였는데, 우리는 어김없이 어디에서든 호박돌을 구하여 부뚜막을 만들어 반합을 올려놓았다. 이는 베르사유 궁전 부엌의 취사 형식이 수렵인의 그것처럼 사슬에 걸린 냄비와 쇠꼬챙이에 꿰여 돌아가는 바비큐 형태의 범주를 넘지 못하였다는 점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부뚜막은 무엇인가? 얌전한 개 먼저 올라간다는 그 부뚜막은 무엇인가? 얌전한 개는 머리가 좋았고, 머리가 좋은 개는 부뚜막의 효용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다. 가마솥 문화의 산물인 부뚜막은 곧 온돌이었다. 부뚜막은 따스했다. 얌전한 개가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인은 얌전한 개로부터 배운 경험을 확장시킬 줄 아는 현명한 문화 민족이었다. 그래서 따스한 부뚜막을 길게 늘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골 온돌에 대한 고증은 고구려 시대의 민가 유적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인 부뚜막은 걸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얌전한 개처럼 아예 이 좋은 것을 침대 삼아 잘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부뚜막은 편평하게 늘어났다. 여러 개의 골을 구들장으로 덮은 온돌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초기의 온돌은 부엌의 일부였다. 처음에는 온돌과 부뚜막 사이에 아무 구분이 없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에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런 민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온돌과 부엌 사이에 칸막이가 생겨나고, 온돌방은 곧 안방이 되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따스한 곳을 아랫목이라 불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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