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미국 정치와 동아시아
미국의 대외 정책American Grand Strategy은 동아시아 지역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거꾸로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특수성이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적 틀에 미치는 상관관계 혹은 영향력은 무엇인가? 로버트 서터Robert Sutter에 따르면,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은 그동안 미국이 추진해 온 세 가지 정책 목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Sutter 2009) 세 가지 정책 목표는, 첫째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 이익에 유리한 힘의 균형 유지와 미국에 적대적인 세력에 의한 지역 균형 파괴 방지, 둘째는 무역과 투자의 증대를 통한 미국의 경제 이익 증대와 보호, 셋째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미국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와 규범을 동아시아 지역에서 증진시키는 일이다. 다만 세 가지 정책 목표의 우선순위는 시대에 따라 변해 왔는데, 이는 외교정책 결정자들이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을 설정하고 조직화하는 데 있어 시대별로 상이한 국내외 환경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위시한 미국의 유럽 정책 기조인 다자주의multilateralism 원칙이 동아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동아시아에는 양자주의bilateralism가 중층적으로 존재한다.(Hemmer and Katzenstein 2002 ; Stein 201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와 냉전 종식 이후 G-2미·중 경쟁 시대에 있어서 미국이 중국 일본 및 한반도에 대해 표방하는 외교정책은 내용과 형식이 모두 같지는 않다. 또한 이렇게 서로 다른 정책의 제도적 기반 역시 개별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전후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적 맥락이 유럽과의 군사 동맹 및 경제 교류, 이스라엘과의 국내외적 유대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된 점을 고려할 때 공산당 지배의 중국 아시아 동맹의 핵심축linchpin 일본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에 적용되어 온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적 틀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기존 대외 정책의 제도적 맥락이 동아시아 정책에 반영된 측면도 있고, 반대로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국제 정치에 의해 미국 국내의 외교정책과 제도들이 영향을 받고 변화된 양상도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분석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곧 미국 정치와 동아시아 상호작용의 ‘안’과 ‘밖’을 동시에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외교정책의 틀이 동아시아 지역과 연관될 때 달라지는 점은 무엇일까? 첫째, 상대적으로 의회의 영향보다는 행정부의 역할이 커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의회의 개입적 역할이 주목 받고 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할 사례들이 종종 있어 왔다. 예를 들어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2000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최혜국대우 영구 적용 법안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이 통과되는 시기까지 의회가 매년 중국 문제를 놓고 토론과 표결을 거치며 입김을 발휘한 일이 있다.(Seo 2010) 1980년대 엄청난 규모의 무역 적자로 인해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 역할에 앞장선 것도 의회였고, 2007년 정부 간에 합의된 한국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KORUS이 2011년에 가서야 통과된 것도 의회 내에 발생한 이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관련하여 의회의 역할과 영향은 주로 무역 관련 정책에 집중된 경향을 보이는데, 그마저도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으로 인한 미국 국내의 승자와 패자winners-and-losers 관련 사항이 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외교정책의 제도적 틀 관점에서 보자면 주로 반응적reactive 정책 논의가 의회에서 비정기적으로 선거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도이다. 게다가 안보 관련, 이른바 상위 정치high politics 분야까지 외교정책 영역을 확대하면 행정부 주도 현상이 더욱 눈에 띈다. 백악관 내부의 대통령 보좌진 중 동아시아 담당자들과 국무부 및 국방부의 동아시아 데스크 정도로 주요정책 형성 및 결정자들이 국한되는 양상을 보인다.(Bader 2012) 하지만 이들도 주목할 만한 핵심 역할자라기보다는 백악관 내부와 외부를 잇는 연결 고리 기능을 담당하고 동아시아 국가 정부와 협의를 주로 맡는 모양새다.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의 제도적 특징은 의회에 비해 행정부가 주도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행정부 내에서도 광범하지 않은 소규모 집단의 정책 담당자들이 중심이 되고 정치적 고려보다 관료적 협의가 우선인 모양새이다.
둘째, 미국의 동아시아 관계가 주로 국가별로 상이한 양자 관계bilateral relations에 기반하고 있고 그 내용상 안보와 경제 이슈가 상호 연결된 양상을 보임에 따라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적 양상도 혼재적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냉전 이후 구소련과의 이념 대결이 막을 내리고 지구촌 경제economic globalization에서의 국가 간 경쟁과 협력이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실제로 미국의 중국 정책은 세력 균형 또는 경제 협력 중 어느 한쪽 방향으로 규정되지 않고 안보와 경제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외교정책적 균형점을 찾아 나가는 추세이다. 특히 중국 공안당의 사회/문화 정책에 반감을 가지는 새로운 보수 그룹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공화당 내로 진입하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에 찬성하지 않는 무역 규제 선호 그룹이 민주당 내 일정 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미국의 중국 정책에 대해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내부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Seo and Trubowitz 2012 ; Gries 2014) 또한 일본과 한국의 경우 동아시아 지역 핵심 군사 동맹국이자 주요교역국이라는 특성이 “안보-무역 교차security-trade nexus”라는 정책 흐름을 만든다.Seo 2015 다시 말해 무역 및 경제 협력으로 인한 국내 정치적 파급력을 고려할 때도 정책 담당자와 의회 지도자들의 셈법에 군사 동맹 관계가 늘 주요 변수로 들어가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셋째, 동아시아 지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미국 국내의 이익 단체 정치가 활발하지 못한 반면에 이를 대체하는 해외 정부 로비가 활성화되어 있다.Smith 2005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 의회 정치에 영향을 미쳤던 “차이나 로비China Lobby”의 경우 장제스葬介石를 지지하는 미국 내 엘리트들과 공화당 내 의원들이 주를 이루었다.(Koen 1974) 이후 “차이나 로비”가 점차 사라지고 미국 국내 아시아계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관련 이익 단체들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물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본 그리고 이후에는 중국과의 무역 역조와 일자리 이동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이익 집단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당파에 관계없이 자유 무역을 선호하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리더십으로 인해 무역 관련 이익 집단 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할 점은 일본과 한국 정부가 미국 워싱턴에서 경쟁적으로 벌이는 정부 로비라고 할 수 있다.(Calder 2014) 워싱턴 내의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미국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을 접촉하고 자국의 정치 및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인데, 이는 이익 단체의 입김이 일정 정도 작용하는 기존의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적 형태와는 구별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면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누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미국 외교정책을 만드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미국 외교정책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미국 정치의 근간이 되는 이념 및 가치 체계와 정책 결정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사실 미국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저술들이 미국과 해외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이 단편적인 이슈를 설명하거나 인물 중심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데 그치고 있다. 미국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면서 핵심을 아우르는 연구는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한반도와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3개 지역을 대상으로 한 미국 외교정책의 경우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과 주요 행위자는 더더욱 베일에 가려져 있다. 또한 최근 미국이 아시아에 새로운 관심을 갖고 있고 중국의 부상에 따른 대책을 체계적으로 강구함에 따라 다각도의 연구와 분석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 책은 기존의 국제 정치 논의 및 외교정책 분석과는 다른 몇가지 방법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통상적으로 미국 외교정책 분석은 국가 대 국가, 즉 현실주의적 전통에 기반을 둔 국제 정치 관점에서 기술되어 온 데 반해 이 책은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 행위자 수급elites recruitment을 분석한다. 이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상호 영향을 함께 다루는 국제 정치학의 최근 연구 경향에 맞추어 국내 정치가 국제 정치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을 검증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Fearon 1998 ; Kupchan and Trubowitz 2007 ; Milner and Tingley 2016) 둘째, 미국의 아시아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그 행위자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가치 체계를 근간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지에 대해 일관된 연구 틀을 적용한다. 가설 검증을 통한 이론 정립이라는 기존의 순수 학문적 접근법과는 달리 미국의 외교정책 엘리트들에 대한 개별 정보들을 공유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셋째, 실제 사례 분석을 통해 미시적 기초micro foundation 관점에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도모한다. 중국과 일본, 한반도와 관련된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 사례를 선별하여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조사와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추상적 서술이 아닌 실체적 이해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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