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네우스
어느 누구도 발레리오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지닌 부족함과 결핍은 사람들 간의 평범한 관계를 벗어난 수용소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를 멀리하게 될 정도로 두드러졌다. 그는 키가 작고 뚱뚱했다. 작은 키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한때 비대했던 몸집은 서글프게도 그의 얼굴과 몸에 흐물흐물한 주름을 남기며 옛 시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질척거리는 폴란드 수용소의 진흙탕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당시에는 너나없이, 미끄럽고 발이 쑥 빠지는 작업장의 진흙탕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고립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탁월한 인간의 동물적 본성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든 넘어지는 걸 피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불상사를 최소한 줄여보려고 애썼다. 실제로 누군가 땅에 넘어지거나 몸이 기우뚱해지면 그 사람은 즉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 모습은 지배자의 난폭한 본성을 자극하고, 자비보다는 조롱을 먼저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발레리오는 누구보다 더 자주 계속해서 넘어졌다. 아주 가벼운 충돌만 일어나도 쉽게 넘어져서 아예 그런 핑계조차 필요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간혹, 누군가가 그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한다면 아마 그는 일부러 진흙탕에 넘어지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키가 작아, 마치 자기 엄마의 가슴이라도 되는 듯이 진흙탕에 잠겨 있었다. 그의 자세는 죽마를 타는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허리를 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진흙탕은 그의 피난처이자 방어수단이라 추측되었다. 그는 진흙탕의 작은 인간이었고, 진흙탕 색깔이 곧 그의 색깔이었다. 그는 그 점을 알고 있었고, 고통이 그에게 남긴 희미한 빛으로 타인에게 웃음을 줄 줄 알았다.
발레리오는 수다스러웠기 때문에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 그는 자신이 겪어온 역경과 넘어짐, 매질과 조롱에 대해 가엾은 병아리의 울음소리처럼 끝없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자기 자신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키려 한다든가, 가장 부끄러운 치부를 감추려 든다든가 하는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겪은 고초 가운데 가장 듣기 거북한 면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그가 아량 있게 베푼 희극적 만찬의 흔적을 청중이 짐작하게끔 극적인 묘미를 드리우면서 말이다. 그와 같은 유형의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은 그들이 대책 없는 아첨쟁이들임을 안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한 삶에서 만났다면, 내게 어떤 아첨을 떨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아침마다 내 얼굴의 건강한 혈색을 칭찬했다.
내 처지가 그의 처지보다 훨씬 나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거리낌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연민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고, 바람에 휘날리는 연기처럼 생겨나자마자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러고는, 어딘가 배고픔 같은 헛헛함을 입안에 남겼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어느 정도 그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그는 너무나 도움이 절실한 상태였고,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채의식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둡고 안개 낀 9월의 어느 날, 수용소의 진흙투성이 땅 위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야수의 긴 울음소리처럼 사이렌 소리는 오르락내리락했다. 그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 때를 위해 나에게는 비밀 은신처가 있었는데, 빈 자루 더미를 쌓아놓은 곳 밑에 난 비좁은 통로였다. 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발레리오를 맞닥뜨렸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장황한 인사말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에 빠져드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서글픈 고난을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바깥은 사이렌의 끔찍한 굉음이 한바탕 몰아친 후에 위협적인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우리 머리 위에서 어떤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곧바로 계단 꼭대기에서 어른거리는 라포포트의 어둡고 거대한 형체를 보았다. 그는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이탈리아인들!” 그러고는 양동이를 두고 갔는데, 그 양동이는 곧장 계단 아래로 소란스럽게 굴러 떨어졌다.
양동이에는 원래 죽이 들어 있었지만, 내용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거의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와 발레리오는 양동이 안쪽 벽과 바닥에 붙어 있는 죽을 수저로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 당시에 우리는 발생하지도 않을 모든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템플기사단이 검을 들고 다니듯이 밤낮으로 수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사이 라포포트는 위엄을 부리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는 선뜻 죽을 내줄 사람도 아니었고, 반대로 죽을 우리에게 요구하며 선심을 베풀라고 청할 사람도 아니었다.
당시 라포포트는 서른다섯 살쯤이었다. 그는 원래 폴란드 출신이었지만 피사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인들에게 호감이 있었고, 피사에서 태어난 발레리오와는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는 놀랍도록 강하게 단련된 사람이었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난폭했으며 옛날 해적들처럼 유쾌했다. 그는 수용소 생활의 방해물에 불과한 정규교육의 지식을 쉽사리 뒤로할 줄 알았다. 그는 밀림의 호랑이처럼 라거에서 살았다. 가장 약한 자들을 넘어뜨리고 약탈하는 반면, 가장 강한 자들을 피해 가면서, 언제든지 주변 상황에 따라 상대를 매수하고, 훔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거짓말을 하거나 아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강력한 적수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겁하지도 비위를 거스르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가까이 오자 양동이의 내용물이 어디에서 났는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의 특기 가운데 하나였다. 첫 번째 공습 사이렌이 울리자, 그는 평상시와 같은 혼란을 틈타 작업장의 주방으로 재빨리 향했고, 감시병이 도착하기 전에 전리품을 가지고 도망쳐 나온 것이다. 라포포트는 이 일을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후에 이 신중한 도둑은 사이렌소리에 온통 신경이 쏠린 자신의 작업팀과 함께 얌전히 머물렀다. 안타깝게도, 그를 흉내 내려 했던 릴리엔탈은 절도를 저지르다 붙잡혀 다음 날 공개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어이, 이탈리아인들”
그가 말했다.
“안녕, 피사 토박이.”
이후 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자루 더미 위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오와 나는 여러 영상이 출몰하는 나른한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드시 누운 자세일 때만 이런 상태에 이르는 건 아니었다. 잠깐 휴식을 취할 때에도 선 채로 잠이 드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라포포트는 예외였다. 비록 노동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가만히 있는 걸 도저히 못 견디는 다혈질 기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냈고, 간간이 칼에다 침을 뱉어가며 돌멩이에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벌써 코를 골고 있던 발레리오를 그가 흔들어 깨웠다.
“이봐, 일어나. 무슨 꿈을 꿨어? 라비올리 꿈이지? 그리고 키안티 포도주겠지. 비아 데이 밀레 거리에 있는 학생식당에서는 키안티 한 잔과 라비올리 한 접시에 6.5리라였지. 그리고 접시 가득 담긴 큼직한 비프스테이크 하며, 아무튼 이탈리아는 대단한 나라야. 마르게리타는 또 어떻고…….” 이 지점에서 그는 상상만 해도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먹으로 자기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잠에서 깨어난 발레리오가 작고 창백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옆에 웅크렸다. 아무도 선뜻 그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상상 때문에 몹시 괴로운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라포포트는 그런 괴로움과 별개로 피사에서의 기억을 마음껏 입 밖으로 꺼내 발레리오에게 그 얘기를 빈번히 건넸다. 내가 볼 때, 라포포트에게 발레리오는 정신적 일탈의 순간을 즐기기 위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발레리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힘 있는 자가 보여주는 소중한 우정의 증거였다. 반드시 대등하진 않더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라포포트가 발레리오 그 자신에게 너그러운 손길을 내밀어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라 믿었다.
“어떻게 마르게리타를 몰라? 한 번도 알아본 적이 없어? 무슨 피사 사람이 그 모양이야?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여자였다고. 그리고 밤에는 진정한 예술가였지…….”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또 다른 사이렌이 뒤를 이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지만, 미친 듯이 내달리는 기관차처럼 우리 위를 덮쳤다. 땅이 진동했고, 천장의 시멘트 대들보가 잠깐 사이에 고무처럼 흔들렸다. 결국 파괴적인 굉음과 함께 두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우리들 사이로 고통이 탐욕스럽게 퍼져나갔다. 발레리오는 한쪽 구석으로 숨어들어가, 따귀를 피하려는 것처럼 팔꿈치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는 낮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또다시 무시무시한 경고음이 울렸다. 유럽의 전후 세대는 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폭탄을 투하하며 전쟁을 갈망했고 상대를 위협하는 소리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나는 벽에 쌓인 자루 더미에서 굴러떨어졌다. 폭발이었다. 아주 가까이서 일어난 묵직한 폭발은 광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라포포트는 그 광경이 우스웠던지 폭소를 터트렸다. “맨 밑바닥으로 숨어들었군. 안 그래, 피사 토박이? 아직 아니라고? 기다려. 기다려보라고. 멋진 폭탄이 더 떨어질 테니까.” “자네 참 느긋하군.” 그 말을 하면서 나는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에 육화된 듯 빛바랜 기억이었는데, 지옥 밑바닥에서 제우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그의 번갯불을 비웃은 카파네우스의 대담한 이미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기분 문제가 아니라 이론상의 문제야. 셈을 하는 거지. 그게 나의 비밀 무기야.”
그 무렵 나는 피곤에 지쳐 있었다. 어느새 케케묵어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육화된 피로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모두에게 나타나는 피로, 즉 건강을 압박하긴 하지만 일시적 마비처럼 건강한 상태를 정지시키는 그런 피로와는 달랐다. 그것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어떤 공허나 단절이 아니었다. 나는 발사된 총처럼 텅 비워진 기분이었다. 아마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발레리오 역시 나와 같았다. 다른 모든 이가 우리와 같았다. 라포포트의 생명력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을 성질이었다(그리고 실제로 오늘에 와서는 그것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때 내게는 그가 건방지고 무례해 보였다. 만약 유대인인 우리가 형편없는 값어치라면, 그가 폴란드인에 지식인이라 해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가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나를 화나게 했다. 이론이나 셈에 관한 얘기나 들으며 있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다른 할 일이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다. 만약 하늘의 주인들이 허락한다면 말이다. 그럴 수 없다면,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답게 조용히 나의 두려움을 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라포포트를 참아내거나 피하거나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너희는 잠이 와? 나는 유언을 남길 테니까 너희들은 자라고. 어쩌면 내 폭탄은 이미 날아오고 있을 테니, 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내가 자유의 몸이라면 나의 철학이 담긴 책을 쓸 텐데. 지금으로선 불쌍한 너희 두 녀석에게 내 철학을 들려주는 수밖에 없어. 만약 너희에게 쓸모가 있다면 천만다행이지. 나중에 만일 너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내가 그렇지 못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너희가 다니면서 내 얘기를 계속 들려줄 수 있을 테고, 그러다 누군가에게서 끊기겠지. 그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아. 자선을 베푸는 데 소질이 없으니까.
내 얘기는 이거야. 난 할 수 있는 한 마셨고 먹었고, 사랑을 나눴고, 너희 이탈리아 때문에 단조롭고 침울한 폴란드를 떠났어. 이탈리아에서 나는 공부했고, 배웠고, 여행했고, 많은 걸 보았어. 나는 두 눈을 부릅떴고, 티끌 하나 낭비하지 않았어. 나는 부지런했고, 지금 생각해도 그보다 더 부지런하게 지낼 순 없었을 거야. 일이 아주 잘 풀려서 나는 꽤 많은 재산을 모았지. 그런데 이 모든 재산이 사라져버린 건 아니야.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그것을 쓸모없이 놔두지 않겠어. 난 재산을 잘 간수해뒀어. 아무도 내게서 그것을 빼앗아가지 못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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