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이 보낸 여자
잔 다르크는 누구인가? 그녀는 역사상 가장 신비한 인물 중 하나다. 역사가들은 잔 다르크와 관련된 일들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난감해한다. 17세 소녀가 어느 날 청와대에 나타나서 자신이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저에게 군사를 맡겨주시면 곧 휴전선을 허물고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이와 거의 비슷한 상황인데, 프랑스 왕이 실제 그런 말을 믿고 군사를 맡겼더니 아닌 게 아니라 잔 다르크라는 소녀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미루어오던 왕의 대관식을 주선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 중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정작 그녀는 포로로 잡혀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1431년 19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에야 이전 판결을 뒤집는 재판이 열려 그녀는 복권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교황청이 그녀를 성녀로 서품했다. 그러니까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녀로 변신한 인물인 셈인데,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 신비로운 15세기의 인물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녀가 들었다는 ‘목소리’, 몇 가지 기적들, 옥중에서 보인 모순적인 태도 등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른 한편 이처럼 많은 기록을 남긴 사례도 흔치 않다. 특히 마지막 2년 반의 행적은 방대한 재판 기록 덕분에 꽤 소상히 알려져 있다. 잔 다르크는 너무나 많은 조명을 받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까마득한 신비의 어둠 속에 잠긴 숨은 매력의 소유자이다.
특이한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시골 소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부의 동레미Domrémy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Jacques d'Arc는 중농 수준의 지주였고, 이 지역 세금 관련 공무를 대행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마을 유지였을 것이다. 다르크d'Arc라는 성으로 보건대 이 마을 남쪽의 아르캉바루아Arc-en-Barrois에서 태어나서 출신지를 성처럼 사용한 게 아닐까 추론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머니는 이자벨 로메Isabelle Romée다. ‘로메’라는 이름으로 보건대 그녀는 로마 순례를 다녀왔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로마 순례는 여성인 경우에 매우 힘든 일이었으니, 그녀는 아주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부부 사이에 3남 2녀가 태어났다. 이들 중 남자 형제 장Jean과 피에르Pierre는 잔 다르크의 전쟁과 재판, 처형 과정에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사실 이 시대에 인적사항을 파악한다는 것은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다. 잔 다르크는 이름부터가 잔Jeanne과 자네트Jeannette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공문서에 그녀 이름이 조안나 다르크Johanna Darc로 기재된 것은 죽고 나서 25년 뒤에 있었던 재심 재판 때의 일이었고, 이후 잔 다르크로 굳어졌다. 태어난 해도 정확하지 않다. 1431년 재판 때 나이가 ‘약 19세’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411년생 혹은 1412년생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당시 일반인들은 나이와 생일 같은 것은 사소하게 여겨 본인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공문서에 나이를 기록할 때도 라틴어로 ‘대략’vel circiter 혹은 vel circa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잔 다르크의 생년월일을 1412년 1월 6일로 기술한다. 프랑스에서는 2012년에 탄생 600주년 기념행사를 대규모로 벌인 바 있다. 그렇지만 생일이 1월 6일이라는 것도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날은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로 공증받았음을 기념하는 공현절epiphany인데, 잔 다르크가 샤를 7세를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 그와 비슷한 일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정했을 뿐이다.
그녀의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온갖 상상화가 수천, 수만 점 있겠지만 진짜 모습이야 알 수가 없다. 당대 초상화들도 그녀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교육은 어느 정도 받았을까? 잔 다르크는 어릴 때 학교에 다닌 적은 없고 단지 어머니에게서 가사와 가축 치는 일을 배우고 마을 사제에게 종교 내용을 들어 아는 정도였다. 자연히 읽기와 쓰기는 배우지 못했다. 생의 대부분을 문맹으로 보냈던 것이다. 나중에 서명하는 법만 겨우 배운 것으로 보인다. 친필 서명이 세 점 남아 있는데, 처음 배워 쓴 투가 역력하다. 재판 당시 동네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내용을 보면 어릴 때 잔은 ‘신심 깊고 선량한 처녀’였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특이한 게 하나도 없는 소녀라는 의미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일을 돕고 가사에 전념하는 신앙심 깊은 여자로 늙어갔을 법한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전쟁이었다.
백년전쟁의 서막: 긴 전쟁이 시작되다
백년전쟁을 이해하려면 우선 중세 잉글랜드가 프랑스 내에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아키텐옛 지명은 기옌 지방은 오랫동안 잉글랜드 소유였다. 말하자면 잉글랜드는 아직 완전한 섬나라가 아니어서 대륙의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여 카페 왕조가 단절된 것이다. 당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후보는 둘이었다. 한 명은 발루아Valois 가의 필리프로, 죽은 왕의 사촌이었다. 다른 한 명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인데, 어머니가 카페 왕조 출신이었다. 이 시대는 오늘날의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때였지만, 그래도 초보적인 민족 감정 같은 것이 형성되고 있어서, 프랑스인들로서는 바다 건너 섬나라 녀석들에게 왕위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측이 내민 근거가 유명한 살리카 법이었다. 살리카 법은 먼 옛날의 고색창연한 왕실 법규인데, 선친의 유산을 여자에게 물려주지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왕위 계승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고릿적 법규를 찾아내서 확대 해석하여 잉글랜드 측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막아버린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프랑스 법원도 여기에 동조했고, 결국 필리프 6세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발루아 왕조를 개창했다. 살리카 법이 왕위 계승의 준칙이 됨에 따라 이후 프랑스는 여왕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다 있어’하고 분기탱천한 것이야 당연한 일. 힘으로 왕위를 빼앗아 오겠다고 결심하고는 1337년 프랑스로 군대를 파견했다. 백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백년전쟁은 이름처럼 실제로 백년 내내 이어진 것이 아니고 중간 중간 소강상태였다가 다시 불붙었다가 하는 식으로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정신병에 걸린 국왕, 풍전등화의 프랑스
초기 전황은 프랑스의 연전연패에 가까웠다. 잔 다르크가 태어난 무렵 프랑스 왕실은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당시 국왕은 샤를 6세였는데, 정신병이 상당히 심한 상태였다. 국왕은 광기가 심해지면 자신이 조지 성인이라는 둥,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어서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했다(남이 자신의 몸에 절대 손을 못 대게 했고, 다섯 달 동안 목욕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게다가 때로는 부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아이들을 둔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지 성인이나 유리 인간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아들을 낳은 적이 없다는 주장은 곤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왕세자 계승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일 샤를 7세가 되는 왕세자는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대륙으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했다. 1415년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헨리 5세는 이 전투에서 잔혹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로들을 모두 참수하고 부하들에게 주변 지역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프랑스인들이 항의하자 이렇게 답했다. “이는 전쟁의 관례 아니겠소. 불 없는 전투는 겨자 없는 소시지만도 못하오.” 그의 군대는 곧 루아르 강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 내 가장 강력한 세력인 부르고뉴 측이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 오늘날 부르고뉴는 고급 포도주와 고급 요리로 유명한 프랑스 동쪽의 한 지방을 가리키지만, 15세기에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에다가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공작령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집안은 원래 프랑스 왕실의 방계 가문인데, 세력이 커지면서 공작령에서 왕국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왕실의 부하이니 노골적으로 잉글랜드 왕과 손잡는 것은 피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1419년 프랑스 왕실이 부르고뉴 공작 장용맹공을 암살하는 사건이 터지자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처럼 한편으로 외세가 침략해오고, 다른 한편으로 국내의 막강한 세력이 왕실에 도전하는 내전이 맞물리면서 프랑스 왕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다.
과연 샤를 7세는 프랑스 국왕이 될 수 있을까
암살된 장의 뒤를 이어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선량공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작품 중 하나가 1420년의 트루아 조약이었다. 조약 내용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이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잉글랜드 프랑스 통합 왕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 해에 이 부부는 보란 듯이 아들을 낳았다.
이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 왕실의 왕세자 샤를은 왕위계승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 조약은 정신 줄을 놓은 샤를 6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왕비 이자보가 대신 서명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자보는 프랑스사에서 최악의 왕비 콘테스트를 하면 그랑프리 후보감이다. 정신병에 걸린 왕을 놔두고 뭇 남성들과 애틋하거나 혹은 뜨거운 관계를 이어갔다. 심지어 왕세자 샤를의 아버지가 현 국왕이 아니라는 선언까지 했다. 왕위 계승권을 뺏긴 데다 지금의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왕세자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때 역사의 우연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1422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사망하더니 바로 얼마 후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사망했다. 양국의 왕이 거의 동시에 죽자 당장 트루아 조약이 문제가 되었다. 정말로 이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양국 통합 왕이 되느냐, 아니면 프랑스 왕세자가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이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일 당신이 왕세자 샤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왕세자가 할 일은 ‘내가 왕이고,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조약 같은 건 개나 줘라. 이 결정에 이의가 있으시면 칼 빼들고 와서 따져보시든지’라고 큰소리치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내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고, 왕세자 샤를은 쉬농 성에 무기력하게 있는 상태였다. 당시 적군은 오를레앙을 공격 중이었는데, 이곳이 함락되면 쉬농 성 함락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군사적 상황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프랑스 국왕이 되려면 전통적으로 랭스의 대성당에서 대관식과 축성식을 치러야 하는데 이 도시가 적군의 지배하에 있으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 저 녀석은 우리 애가 아니야’ 하고 부모가 대놓고 출생의 비밀을 떠들고 다니니 왕세자가 용기백배 나설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