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떤 사람들에게 1954년은 메릴린 먼로가 서울을 방문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해 1월, 그녀는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했고, 한 달 후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의 도쿄행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신혼여행에 그다지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메릴린 먼로는 자서전인 『마이 스토리』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스타가 되는 것은 회전목마 위에 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여행을 할 때도 회전목마를 가지고 간다. (……) 주로 보는 것은 똑같은 신문기자들, 인터뷰하러 온 똑같은 종류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찍힌 똑같은 구도의 사진들이다.” 도쿄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크리스턴베리 장군의 즉흥적인 권유를 그녀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데는 이러한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곳의 회전목마에서 저곳의 회전목마로 옮겨 타는 것. 장군은 그녀에게, 일본에 가는 김에 한국에 들러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아주 나중에(그러니까 메릴린 먼로가 죽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디마지오는 이 일을 회상하며 굉장히 불쾌했다고 말한다. 그는 장군의 그 말 속에서, 자신들의 행복한(물론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결혼과 시시덕거림, 거리낌없는 웃음 등을 비난하고 싶어하는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군이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당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당신들이 키스할 수 있는 거라오. 물론 억측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먼로는 그런 식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좀더 흥미로운 회전목마로 이동하는 것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과 함께 올라탄 회전목마에서 오로지 혼자 차지할 수 있는 회전목마로. 그녀는 둘이 함께 올라탄 회전목마의 삐걱거림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이 스토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디마지오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씩 웃으며” “(나에게) 가요”라고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먼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국으로 날아가버렸고 디마지오는 도쿄에 홀로 남아 계획된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 구 개월 후에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어쩌면 그들의 결혼생활은 디마지오가 그녀를 따라 한국으로 가지 않았을 때, 혹은 먼로가 디마지오와 함께 도쿄에 남지 않았을 때, 이미 그때 종지부가 찍힌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함께한 나머지 결혼생활은, 더이상 아무도 놀러오지 않는 놀이공원에 덩그러니 남겨진 회전목마 같은 것이었으리라. 한국 방문 당시 먼로의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 겨울날 실외에서 이루어진 공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깨까지 완전히 드러난, 몸에 딱 달라붙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단상에 서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펴고 있는데,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몹시 (다른 단어를 고민할 것도 없이 그저) 행복해 보인다. 단상 아래에서는 수많은 군인들이 그녀를 향해 환호하고 있다. 또다른 사진도 있다. 아마 이때 그녀는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푸른색 데님 셔츠를 입고 군용트럭에 올라탄 그녀의 두 눈은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이 초점을 잃은 채, 카메라 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떤 사람들에게 1954년은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세워진 해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들은 원자력을 일종의 기적으로 여겼다. 이 세상을 다음 단계로 건너가게 해줄, 근사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그런 다리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아주 오래도록 그 믿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랬다. 미국은 1930년대 후반부터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핵무기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거기에 속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훌륭한 연구 결과를 내는 것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본격적인 원자력 시대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트리니티 테스트(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근처에서 진행된 최초의 원자폭탄실험)를 치른 직후에도 그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몇 명의 과학자들은 트리니티 테스트 직후 이미 원자력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트리니티 테스트에 대한 사진도 있다. 여러분 중 이 사진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터넷 검색창에 ‘트리니티 테스트’라고 치기만 하면 된다. '폭발 후 0.016초'라고 설명되어 있는 사진 속 배경은 온통 까맣고, 그 가운데로 반원 형태의 거대한 회색빛 점액질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스포이트로 우유를 한 방울 떨어뜨린 뒤 그 모습을 고속도촬영으로 찍은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사진 특유의 경쾌함이나 생명력을 발견할 수는 없다. 외려 이쪽은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그러니까 피부와 비슷한 재질의 매끈한 가면─표면에서 조그만 틈 하나 찾을 수 없는─을 쓴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눈동자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실제로 본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 ‘죽음’의 얼굴-눈동자를 오랫동안 떨쳐내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들이 만든 무기가 실제 전쟁에 투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 걸’이라는 (앙증맞은) 이름의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오펜하이머는 폭탄 투하 후 이렇게 말한다. “내 손은 피로 물들었다.” 그는 그 이후 완전히 자신의 노선을 바꾼다. 원자력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핵무기 연구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1950년대 초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급기야 1954년 국가안보청문회에 회부된다(오펜하이머는 죽을 때까지 계속적인 감시와 수사의 대상이 되었다). 핵무기에 반대한 대가로 오펜하이머가 청문회 자리에 앉아서 온갖 사생활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고 있을 때, 소련은 본격적인 원자력에너지 시대를 알리며 모스크바 근방 오브닌스크에 세계 최초로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는 것에 성공한다.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삼십이 년 전의 일이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오십칠 년 전의 일이다.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은 5MW였고, 이 년 후 두번째로 세워진 영국 콜더홀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은 오브닌스크의 열두 배에 달하는 60MW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은 콜더홀 발전소보다 성능이 뛰어난 발전소를 여러 곳에 세울 수 있게 되었지만, 오브닌스크 발전소는 세워진 지 무려 오십년 동안이나 마치 거대한 코끼치처럼 거기에 그렇게 서서 에너지를 방출했다.
또다른 사람들에게 1954년은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남성성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남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엄청나게 신경을 썼지만, 그런 걸 의식한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차릴까봐 겁을 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이들을 멀리하려 했고 때로는 그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평판에 초월한 “진정한 남자”처럼 보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은 헤밍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밉살스럽기도 한 헤밍웨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분명 그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최악의 인물이다.” 1950년, 그러니까 그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한 지 십 년 만에 야심차게 내놓은 『강 건너 숲속으로』가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참혹하게 실패했을 때, 헤밍웨이는 그 실패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공식 석상에 얼굴을 자주 들이밀었고 술집에서 호탕하게 웃음짓고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악담을 퍼부은, “눈이 발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들”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남들 모르게 소설 집필에 몰두하여 1952년 『노인과 바다』를 출간한다. 『노인과 바다』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는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고, 응당 받아야 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듬해인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해 초에 직접 비행기를 몰다가 추락 사고를 당한 그는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어서 수상소감을 써서 스웨덴으로 보냈다(그는 비행기 사고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이 꽤 근사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상소감에 이렇게 썼다. “쓴다는 것, 그것은 최고로 고독한 삶이다. 작가는 고독 속에서 작품을 완성한다. 정말 훌륭한 작가라면 날마다 영원성이나 영원성의 부재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나에게 1954년은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 만난 해로 기억된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조셉 프랭클은 그해 여름을 권투에 바쳤다. 아니, 그해 여름이 아니라 거의 반평생을 권투에 바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권투선수’라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을 정도로 권투를 사랑했다. 심지어 여름휴가를 가는 대신 며칠 동안 내내 권투하는 것을 선택할 정도였다. 1954년 여름, 권투 도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던 조셉 프랭클은 길거리에서 처음으로 랄프 로렌을 만나게 된다. 열한 살짜리 거리의 구두닦이 소년이었던 랄프 로렌은 자신을 티모시 샌더슨(그리고 이 이름 역시 그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다)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그 당시 뉴욕 뒷골목에는 구두닦이 소년이 넘쳐났다. 그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일할 수 있는 구역이 정해져 있었는데, 랄프 로렌이 맡은 구역인 권투 도장 앞은 구두닦이 소년으로서는 무척 '불리한' 곳이었다. 권투 도장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체육복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랄프 로렌, 그러니까 티모시는 그 나이답지 않은 수완과 배짱이 있었다. 격식을 차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 평생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조셉 프랭클과 이 프로페셔널한 구두닦이 소년은 여름 내내 아이스크림 따위를 나눠 먹으며 우정을 쌓게 되고 그해 가을이 끝나갈 때, 조셉 프랭클은 랄프 로렌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미국에서 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이야기를 좇는 데 열중했다. 매일같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내고, 연락하고, 귀찮게 굴고, 문전박대당하고, 또다시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원점 회귀했다. 나는 그들(주로 조셉 프랭클)과 관련된 사람들을 스무 명 이상 만났고, 온갖 기사와 책을 섭렵했다. 나를 작가 혹은 기자라고 지레짐작한 이들만이 나와 만나줬고,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작가라고 속이는 게 ‘그 일’을 하는 데 가장 속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이라니?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계속했던 것일까?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 모든 사실을 고스란히 전해들은 유일한 사람인) 작은이모는 그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야.” 그녀는 자신 역시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멈출 수가 없었거든.” 그녀는 병원의 차가운─물론 실제로는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하고 습도가 적절한 곳이었지만 말이다─침대에 누워 내게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도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구나.” 그리고 덧붙였다. “누구나 그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더 멋들어진 속담을 찾지 못한 건 유감이었다. 그 '일'은 마치 내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쓰레깃더미에서 그나마 쓰레기가 아닌 것, 이를테면 재활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려내는 활동과 비슷했다. 물론 그렇게 골라낸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재활용품이 될 뿐, 보석이 될 수는 없다. 글쎄, 어떤 사람들은 쓰레깃더미에서 굉장히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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