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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난민,
‘준’
시발택시,
사바사바,
후라이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5년, 대한민국의 길을 열어나갈 시발택시의 시대가 열렸다. 시발택시의 발음은 퍽 거북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뜻, 시발始發. 3년 전쟁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는 의미가 나름 그럴 듯했다. 그해 8월, 시발택시가 선보였다. 부품 국산화율이 50퍼센트가 넘는다고 최초의 국산 자동차라 했지만 실은 전쟁 때 쓰던 엔진을 재활용해서 만든 ‘미국제’ 자동차였다. 이 자동차는 서울의 구석구석을 휩쓸고 다녔다. 종로에서 영등포, 마포에서 명동까지 3,000대의 시발자동차는 시내 곳곳을 누볐다. 미국제 엔진은 힘이 세다.
살아남은 자들의 허기
미국제, 일명 ‘미제’는 단지 자동차뿐만이 아니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미제’의 세상이 되었다. 미제 딱지가 붙은 초콜릿이건 미제 딱지가 붙어 있지 않은 밀가루건 ‘미제’라면 마냥 좋아했다. 품질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배고픈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루라도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밤마다 배고파 우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찬장 깊숙이 고이고이 숨겨둔 고구마 한 조각까지도 뱃속에 집어넣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늦은 밤 부엌에 숨어드는 것은 생쥐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계통 없이 처먹고 있다”고 보일 만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먹었다.
근처에 미군부대라도 있을라치면 그건 그저 달콤한 무엇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뿐이었다. “기부 미 쪼코렛토”라는 어쭙잖은 말로 초콜릿을 얻어먹는 축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것조차 먼나라 이야기 같았다.
스무 살도 넘을까 말까 한 노는 계집애와 머리가 고슴도치처럼 부수수하게 일어난 쓰메에리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와서 커피니 오트밀이니 사과니 어수선하게 벌여놓고 계통 없이 처먹고 있다.
밀가루, 옥수숫가루가 우리네 식탁을 점령하게 된 데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 의도가 작용했다. 그래서 전국 여기저기에서 밀가루 향연이 펼쳐졌다. 원조와 배급으로 주어진 밀가루는 어찌 되었든 한국인의 입맛을 바꿔놓았다. 밀떡볶이가 궁중떡볶이의 자리를 이어갔고, 옥수수빵이 학생들 급식으로 배급되었으며 밀면이 냉면처럼 엇비슷하게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밀가루가 전국 각지에서 인기리에 ‘기부미’ 되고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결국은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풍문까지 그럴듯하게 들려왔다. 1963년 대선을 앞두고 태풍으로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수재민들에게 밀가루를 배급해 표심을 산 ‘밀가루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얘기였다. ‘밀가루’와 ‘대통령’이 나란히 얽히는 상태가 상당히 낯설었지만 미국에서 원조 받은 밀가루가 선거 당락을 갈랐다는 알듯 말듯한 소문이 꽤 설득력 있게 떠돌았다. 역시 밀가루는 힘이 셌다.
문리대와 성균관대 사이에 있던 명륜시장에선 펄펄 끓는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참기름 한 방울과 간장으로 간을 한 ‘엉터리 수제비’를 팔았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 종로 6가엔 동대문극장이 있었는데 ‘꿀꿀이죽’미군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들을 모아 끓여낸 잡탕죽을 팔았다. 단돈 10환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주는데 미군들 잇자국이 난 소시지도 맛있는 먹을거리였다.
밀가루는 밀가루에 그치지 않았다. 빵, 국수, 라면에 이어 떡볶이까지 대한민국 전체가 밀가루로 가난의 빚을 잠시 지웠다. 뿐이랴. 밀가루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미군부대에서 버린 각종 먹거리를 한데 넣어 끓인 꿀꿀이죽도 인기였다. 가끔 꿀꿀이죽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나와도 눈 질끈 감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가난했다. 아니 가난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그냥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파서 먹거리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이 음식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았다. 아름다운 나라, 일명 미국美國. 혹자는 “정말 미국에 가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 준다면 그들의 똥구멍이라도……”라는 다소 험한 표현을 입 밖에 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험했다. “미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오갔다. 이는 단지 ‘미국’이나 ‘밀가루’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굶주리지 않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 시절 그런 마음은 종종 ‘자유’로 오해되었다.
어이없게도 우리 집 식구들은 온통 미국열에 들떠 있는 것이다. 인제 겨우 열한 살짜리 지현이년만 해도, 동무들끼리 놀다가 걸핏하면 한다는 소리가, “난 커서 미국 유학 간다누”다. 그게 제일 큰 자랑인 모양이다. 중학교 이학년생인 지철이는 다른 학과야 어찌 되었건 벌써부터 영어 공부만 위주하고 있다. 지난 학기 성적표에는 육십 점짜리가 여러 개 있어서 대장이 뭐라고 했더니 “응, 건 다 괜찮아. 아 영얼봐요. 영얼요!” 하고 구십팔 점의 영어 과목을 가리키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영어 하나만 있으면 다른 학과 따위는 낙제만 면해도 된다는 것이 그놈의 지론이다 영어만 능숙하고 보면 언제든 미국 유학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오 남매 중에서 맨 가운데에 태어난 지웅이 또한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일학년인 그 녀석은 어느새 미국 유학 수속의 절차며 내용을 뚜르르 꿰고 있다. 미국 유학에 관한 기사나 서적은 모조리 구해가지고 암송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자유는 맘껏 누릴 권리야
자유는 그렇게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외출할 때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처럼 사서 쓸 수 있는 것처럼 사용했다. 1954년 신문 연재를 시작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서 ‘자유’와 ‘부인’을 동시에 연기한 주인공 선영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답은 간단했다. “고로 문제는 자본”이라고 일갈할 것이다. 그녀에게 자유란, ‘파리양행’에 있는 물건을 파리 마담처럼 맘껏 사서 즐길 수 있는 권리, 댄스장에서 몸의 열기를 발산할 수 있는 권리였다. 즉 자유는 돈으로 맘껏 누릴 수 있는 부유함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건 부유함이고 부유함은 미국과 같은 말이었다. 미국이나 자유를 추종한다는 말보다 “자유는 맘껏 누릴 권리야”라고 말하는 것이 더 간단했다. 《자유부인》에서 선영은 미군 댄스홀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화려한 눈앞의 광경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도록 황홀”했다. ‘황홀’하다는 표현은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은 ‘파리양행’과 그 건너편에 있었던 ‘25시 다방’과 그곳에서 팔던 위스키와 코코아를 다 합한 것보다 황홀한 것이었다. 미국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의 개츠비가 주말마다 파티를 열며 황홀한 신세계를 연출했던 것처럼, “미국은 개도 저렇게 호강하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아니었다. 운동회 날 운동장에 걸리던 만국기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그 만국기 전체를 휘날리게 하는 세계의 절반이었다. 1951년 약 90퍼센트의 미국 가정에 냉장고가 있었으며, 전 세계 가전제품의 80퍼센트가량을 미국인이 쓰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미국인이 나머지 95퍼센트가 가진 재산보다 많으며, 남아도는 돈으로 거대한 유리를 씌운 우주식민지를 세울 거라고 얘기했다. 미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반쪽이었고 ‘꿈의 공장’이었다.
안정효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병석이는 “우리들은 헐리우드를 홀리우드holy wood로 잘못 생각했다”고 했다. 일본에서 성림盛林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홀리우드라고 생각한 것인데, 사실 헐리우드 영화는 낙원의 이미지였고 그래서 ‘홀리우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듯싶었다.
미국은 ‘행복함’의 현실적 이미지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1950년대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그렇다는 거였다. 물론 1951년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속의 16세 소년 홀든은 다르게 생각했다. 미국은 왕도 아닌 게 왕인 척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세상이라고, 아이들 발밑에 벼랑을 만들어 놓고 ‘건전한 사고’와 ‘경쟁’을 미덕으로 외치고 있는 나라라고 말이다. 병석이와 홀든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힘이 센 건 결국 ‘미국’일지도 몰랐다.
먹거리만 자유로운 게 아니었다. ‘말’은 그보다 더 빠르게 ‘계통 없음’을 알리바이 삼아 거리를 부유했다. 수많은 단어들이 합체하며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을 신나게 알렸다. 여성의 치마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A라인, H라인, 후레야, 타이트, 헵번스타일이 유행을 탔고, ‘자유부인’의 결합만큼이나 낯선 ‘럭키 치약’과 ‘해태 캐러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슈샤인 보이’, ‘닐리리 맘보’, ‘홍콩아가씨’ 등으로 세상이 온통 국제시장 꽃분이네 수입상을 통해 전해지는 것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대중가요에 “니콜라이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구절을 접하고 보면 어디까지가 정말 우리 것인지 헷갈리는 게 사실이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캐시밀런 포대기에서 플라스틱 젖꼭지로 밀크를 빨고 조금 크면 조오니 크래커 스마일쿠키 코코낫 비스켓 등을 먹고 콜라 환타 오렌지 등을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고 브라보, 넉아웃을 연발한다.
물론 이것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본 사태였다. 누군가 이런 것을 보며 역시나 “계통 없다”고 했으나 사실 이는 먹어야 하는 현실 앞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의 흔적도 여전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일어 사용은 여전했다. 아침에 벤또라도 싸려거든 다꾸왕이나 덴뿌라 등을 찾았고, 와리바시도 챙겨야 했다. 뿐만 아니라 한 코미디언은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곱뿌’ 없으면 못 마신다”고 했다. 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닌 강성병이 법정 진술에서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보자는 것도 내 범행 동기의 하나였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사바사바’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사바사바’ 또한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꼭 집어 나타낸 단어였다. ‘곱뿌’와 ‘사바사바’는 한국어 문장에 딱 들러붙어 대체불가의 단어처럼 쓰였다. 그 말이 흠이 되지 않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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