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법의 뿌리
버스에 타면, 법이 있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은 여정에 운임을 지불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돈을 내지 않고 내린다면 형법의 그물망이 당신을 덮칠 것이다. 버스가 사고를 당한다면 법은 당신이 입은 손해가 누구의 책임인지 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법은 당신의 직업, 당신의 가정, 당신의 사회 관계, 당신의 삶과 죽음을 비롯한 많은 것을 관리하고, 제어하며, 규제한다. 사법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그 중심에서 권리를 보호하고 의무를 부과하며, 거의 모든 사회, 정치, 경제 활동의 뼈대를 이룬다. 가해자를 벌하고 피해자를 보상하며 합의의 이행을 보장하는 것은 현대 사법제도가 맡은 역할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아가 사법제도는 정의를 구현하고 자유를 확대하며 법치주의를 유지하고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한편 법은 일반인에게 고도로 기술적이고 혼란스러운 수수께끼와 같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낡은 법률 용어와 구시대적인 소송 절차,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잡미묘한 법률들과 부속 법령들과 판례들 때문이다. 법률가들은 과거 지향적이다. 예를들어 영미법의 ‘선례구속의 원칙’은 과거 사례를 현재의 규범으로 만들어 불안정한 세계에 확실성과 예측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법이 만고불변인 것은 아니다. 법은 세계화, 급격한 기술발전, 행정 규제의 증대에 떠밀려 변화한다. 한 국가의 사법제도는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응해야 할 임무를 맡는다. 한편 많은 사람은 국제법에 의지하여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하고 극악한 독재자를 처벌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이 또한 현대 사법제도가 직면한 무수히 많은 과제 중 일부일 뿐이다.
법은 언제나 논란거리이다. 법률가와 정치인은 법의 가치를 추앙하는 반면, 개혁주의자는 법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한탄하며, 회의주의자는 정의와 자유, 법치주의에 대한 법의 독선적 옹호를 불신한다. 그럼에도 법이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경제적 삶을 진보시키고 개선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임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과거에는 개인사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문제에 법적 규율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초래했는지 생각해보자. 성·인종 평등의 고취, 일과 놀이에서의 안전, 더 건강한 음식, 무역의 투명성, 그 밖에 여러 훌륭한 성과들이 떠오른다. 인권, 환경, 생명·신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법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무엇도 광범위한 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입법 사업의 호황으로 너무나 많은 법이 생겨난 나머지, 일반 시민들이 법과 친숙해지는 것이나 정부가 그 법들을 집행하는 것 모두가 어려워진다.
법은 뉴스이다. 살인, 합병, 혼인, 사고, 사기는 매일같이 언론의 먹잇감이 된다. 특히 분쟁이 법정까지 이어질 때면 더욱 그러하다. 유명 인사에 관한 선정적인 재판들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법에서 소송은 지극히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다음 장만 읽어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너무 간단해서 기만적인 이 질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의 답변을 제시해왔다. 첫 번째 견해에 따르면 법이란 자연에 부합하는 보편적 도덕률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각은 이른바 ‘자연법주의naturalist’ 법률가들이 채택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오르는 오랜 전통의 산물이다. 반면 이른바 ‘법실증주의자legal positivists’들에게 법이란 실정實定의 법과 명령, 규범의 집합에 불과하여, 여기에는 어떠한 도덕적 요소도 없다.
어떤 이들은 법이란 본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와 경제적·정치적·성적 평등을 달성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그러나 법이 사회 맥락과 분리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법의 일상적인 작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 측면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특히 변화의 시대에 그러하다. 우리는 (법과 도덕을 분리하는) 법형식주의formalism의 취약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법과 그 가치 사이의 연관성을 놓치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하다. 법의 본성을 묘사하기란 무척 난해하여 당혹스러울 정도이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된 그림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에 관하여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다. 법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어떻게 구별되고 그 결과물은 또 어떻게 다른지 곧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법의 탄생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법은 기원전 3000년경에야 일반적 법률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문자가 출현하기 전까지 법은 관습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성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이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가장 먼저 등장한 성문법 중에는 바빌로니아 왕국의 건국자이자 통치자의 이름을 딴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함무라비왕기원전 1792~1750년 재위은 기원전 1760년경에 법을 반포하였다. 이는 신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알 수 있도록 지배자가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반포한 최초 사례 중 하나이다.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검은 석판에 새긴 이 법전은 약 300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거짓된 증언을 한 자에게 가해질 처벌사형에서부터, 집이 무너져 거주자가 사망한 경우 그 건물을 지은 자에게 부과될 처벌사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생활상과 연관된 규칙이 있다. 이 법에는 가해자의 항변이나 면책사유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는 무과실책임〔고의나 과실 없이 부담하는 손해배상책임. 근대법의 원칙적 과실책임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불공평을 시정하기 위하여 다시 채택되고 있다〕의 지극히 초창기의 사례라고 할 만하다.
사실 함무라비 왕은 이전 시대에 존재하던 법들(이에 관하여는 매우 희미한 증거밖에 남아 있지 않다)을 성문화한 것이었고, 이는 법전에도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고대 왕정의 지배에 앞서 존재하던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놀라운 초기 법제정의 사례로는 기원전 6세기에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솔론Solon이 만든 법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자 중 한 명이기도 한 솔론은 아테네에 닥친 사회·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가 제정한 법은 경제, 정치, 혼인, 범죄와 형벌에 관한 중대한 개혁을 광범위하게 포함했다. 솔론은 자산 상태에 따라 사회를 다섯 계급으로 나누고, 계급에 따라 (납세 의무를 포함한)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빚 때문에 자기 땅과 신체를 담보로 제공하고 농노로 전락하지 않도록 과감히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농노제도를 없앴다.
상층과 하층 계급 시민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기원전 450년경에 이른바 ‘12표법the Twelve Tables’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법을 동판에 담아 반포하였다. 기원전 455년경에는 ‘10인 입법 위원회Decemviri’가 임명되었다. 이들이 특권 계급(귀족)과 일반 인민(평민)을 포함한 모든 로마인이 준수해야 할 법의 초안을 만들면 집정관 2인이 법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0개의 동판을 채운 여러 규칙의 모음이 완성되었다. 대부분은 이전부터 존재해온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불만족스러웠던 귀족들은 기원전 450년에 두번째 10인 입법 위원회를 선임하였고, 이에 따라 2개 조항이 추가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중반에 이르는 소위 고전기 법률가의 시대에 로마법은 상당히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고전 법률가들(가이우스, 울피아누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등)은 대단한 다작가였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막대한 결과물은 곧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거추장스러워졌다. 그리하여 기원후 529년과 534년 사이에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여러 권의 문서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성문법전으로 압축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로 집대성된 세 권의 책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학설휘찬Digest, 칙법휘찬Codex, 법학제요Institutes로 이루어져 있다)은 더 이상 해석이 필요 없는 확실하고도 명확한 완결판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무조건적인 확실성이라는 이상은 환상에 불과함이 드러났다. 조문이 지나치게 길었을 뿐더러(100만 단어에 육박했다) 너무나 상세해서 쉽게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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