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이 세상은 전부가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 토막극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것을 저것으로 저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려고 한다. 그의 추론과 상상이 이것으로 저것을, 저것으로 이것을 넘을 수 있는가.
0001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에게 이 세상 삶에서 저 세상으로 넘는 죽음의 길은 따라갈 수도, 관찰할 수도 없는 이변異變. 사람은 현실에서 꿈으로 들어가고 꿈에서 현실로 나아가는 건널목이 어떻게 놓이는지조차 모른다.
0002
개미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날씨의 바뀜을 미리 알며 거기에 대처한다. 그러나 그는 햇볕 쨍쨍한 어느 날 먹이를 찾아나서는 길에 그 앞을 지나던 사람의 발 밑에 깔린다. 그것이 그의 최후의 날이다. 걸어가는 사람의 궤도를 그의 지혜로써 미리 볼 수 있는가. 그가 그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조건들을 추적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끝없이 있으려는 존재자의 마지막 날을 결정하는 운명의 법칙은 어떤 것인가.
0003
파도처럼 기복起伏이 심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상만사. 피하려 해도 오고야 마는 늘 사람의 뜻 밖에서 펼쳐져 잡히지 않는 세상 이변. 끊어진 시대의 흐름들. 숨져버린 존재자들. 그들에게 임시의 생명을 주어 태어나고 사라지게 하는 운명의 주재자는 누구인가.
‘이다’, ‘아니다’를 좌우하는 다만 자유의 바람일 뿐인가. 그 방향도 알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고 태고太古의 원시原始로부터 샤먼과 지혜자는 끝없이 방황하지 않았던가.
0004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에 떠나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더 실감나게 들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가 멀리 떠난 뒤에도 귓전에 남아 있는 소리는 어떻게 그의 있음을 절박하게 하는가. 모양이나 색깔보다 소리는 더욱 참으로 있는 것인가. 떠나버린 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그 주인의 없음을, 없음으로 그의 있음을 알려오는가. 여기에 살아서 말하는 자의 소리는 오히려 들리지 않고.
사라져가는 자는 어떻게 그의 있음을 더욱 드러내는가. 사라져가는 것은 어떤 질서에 따르는 것인가. 그도 여기 머물러 있는 자의 기억을 간직하고 떠나는가. 무엇이 사라져가는 것을 가져가는가. 여기 머물러 있는 자는 사라져가는 자를 향하여, 아니 그 사라져가는 자를 가져가는 자를 향하여 외치고 싶다.
0005
생명이 꺼지고 일어나는 지상의 끝없는 파동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것인가. 사람은 꿈마다 현실 아닌 세계로 들어간다. 꿈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의 가장 깊은 관심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 아니다. 그것은 신이 생명 있는 것으로 하여금 현실의 파노라마를 지탱하도록 던진 미끼. 인연의 사슬. 그 너머가 보이지 않게 가로막은 안개.
그러나 때때로 사람은 꿈에서 현실 너머의 세계로 통하는 자유의 문을 바라본다. 현실에 펼쳐지는 인연의 사슬에서 풀리어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얽히어 이어지는 해탈의 문을 찾아 헤맨다.
0006
순간에 찾아오는
깨달음은 징검다리
그밖에는 허허대해虛虛大海.
의문과 상상의 갈림길에 놓인다.
징검다리 위에 세운
환상의 도시
인간의 역사
철학자의 가설假說.
환상공법으로 지탱하는 세상의 이야기.
0007
조각가에게 끌과 망치와 대리석은 장애물이 아닌가. 미술가에게 붓과 물감과 화지는 장애물이 아닌가. 정신에 대하여 육체는 협조자인가, 장애물인가. 작가와 철학자에게 말은 협조자인가, 장애물인가.
말의 걸림을 넘을 수 있는가. 말의 자의恣意를 벗어날 수 있는가. 말의 껍질을 버릴 수 있는가. 모든 매체는 장애물이 아닌가. 매체를 버리고 벗어나고 넘는 순간에 남아 실현되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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