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화와 역사
기원전 333년 11월 5일,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마케도니아 병사 4만 명을 이끌고 바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의 문턱인 이소스Issos(현재 터키의 중남부에 시리아와 경계를 둔 하타이Hatay 지방의 도시)에서 대기중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23세의 푸릇푸릇한 청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마지막 대왕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80-330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는 바로 소아시아Asia Minor(현재 터키의 서부 지역) 일대를 정복하려고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전설의 트로이 부근에 위치한 그라니쿠스Granicus강 지역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둔지 2년도 채 안된 시점이다. 그라니쿠스전에서 페르시아 식민지였던 소아시아 지역의 태수Satrap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차례차례로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획득한 알렉산더 대왕이, 드디어 그 방대한 영역이 인도반도까지 이른다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입구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처음에는 소아시아에 쳐들어온 새파랗게 젊은 알렉산더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각 지역의 태수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라니쿠스전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서는, 자신이 친히 출정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고작 4만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다리우스가 거느린 십만 명이 넘는 페르시아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고대문서들에는 페르시아군이 오십만 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전해오나, 대부분이 과장된 서술이 분명하다고 사계의 학자들은 본다). 이리하여 다리우스 3세는 그가 평생 몸소 지휘했던 전투 중에서 처음으로 이 이소스전Battle of Issos, BC 333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한편 이 전설적인 이소스전은 결국 페르시아 제국 전역을 휩쓸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게 될 알렉산더 대왕의 대정복사에서 결정적인 프롤로그였다. 다리우스는 이소스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의 왕비, 두 공주, 그리고 왕의 모친 모두가 여기서 포로로 붙잡힌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에 가우가멜라Gaugamela(현재 이라크 북부 모술Mosul 근처)에서 그는 다시금 알렉산더와 맞닥뜨려 또 한 번 패배의 쓰라림을 겪고, 그후 일 년도 안되어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써 그 빛나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결국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소스에서 처음으로 두 대왕이 대면한 뒤 삼 년도 채 안되어 페르시아 대제국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채로운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이소스전에서의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3세의 운명적인 첫 대면의 순간이 왜 이토록 많은 고대 미술가들의 상상을 사로잡는 유명한 주제가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폼페이에서 1931년에 발굴된 알렉산더 모자이크Alexander Mosaic, BC 1세기경가 바로 이소스전을 주제로 만들어진 미술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모자이크 작품은 갖가지 다양한 생각을 띤, 이백만 개 이상의 대리석 조각으로 이루어진, 가로 5미터가 넘는 대형의 걸작이다. 고고미술사학계에서는 이 모자이크가 BC 310년에 필록제노스Philoxenos of Eretria라는 그리스 화가가 남긴 원작 회화의 사본이라고 보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가 로마시대 때 폼페이에 사는 호화로운 귀족집안의 마룻바닥을 장식했다는 것 자체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알렉산더 대왕의 공적이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작품 속에서 생동하는 이 장면을 보라! 스물세 살에 불과한 마케도니아의 한 앳된 청년이 용감히 페르시아 대제국의 무시무시한 왕에 맞서는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날렵하게 창을 놀리며 당당하게 앞으로 진격해나아가는 알렉산더의 발아래에는 벌써 페르시아 군들이 사방팔방으로 혼란스럽게 쓰러지고 있지 않는가! 손을 뻗치며 놀란 토끼눈을 크게 뜨고 입을 멍하게 벌린 다리우스는 지금 꼬리를 감추고 뺑소니치기 일보직전이다. 보라! 그가 탄 전차를 끄는 말들은 벌써부터 아연실색하며 휘익 방향을 돌려 그림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알렉산더 대왕이야말로 그리스 역사상 유일하게, 그 어느 신화적인 영웅도 비견할 수 없는 대표적인 영웅이었다. 그는 실로 트로이 전쟁의 찬란한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useh도 따를 수 없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방대한 업적을 단지 십 년 안에 수행하였다. 그의 빛나는 청춘, 육체의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에게서 교육받은 이성, 그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 등등, 이 모든 사항이 그리스 영웅들의 전형적인 패턴에 딱 들어맞는다. 헤라클레스Herakles의 무지막지한 추진력과 신적인 힘, 아킬레우스의 불타는 정열과 뛰어난 전투력, 그리고 오디세우스Odysseus의 병법과 전략을 한몸에 지닌 알렉산더 대왕은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써 그의 영웅적 지위를 확고히 다진 것이다. 호메로스Homeros의 명작 『일리아드Iliad』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에서 십년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싸움을 거부할 때, 그의 어머니인 물의 여신 테티스Thetis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 싸우지 않으면, 오래도록 행복하고 평화스런 삶이 고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 편안한 삶 끝에 죽음이 이른 뒤로는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네가 트로이 전쟁에 나아가 그리스를 위해 싸워준다면 너는 이 전쟁터에서 비록 죽게 되겠지만 너의 명성kleos은 앞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Homer, Iliad 9.499-505)
물론 아킬레우스는 비록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은 전투를 택하였다. 발뒤꿈치를 제외하고는 불멸의 신체를 가진 반신반인 아킬레우스는 그래도 인간적인 죽음을 택하였기에 오히려 참된 영웅으로 승화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또한 그의 짧고 찬란한 인생을 영웅답게 일찍이 매듭짓고, 그의 죽음 자체도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로 전해져서 그는 갈수록 신격화되어 갔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본격적으로 우러러 보던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그들의 신화에 담긴 전설의 영웅들보다도 훨씬 더 감동적이고 인상깊은 역사적 모델이었을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처럼 “마그누스”를 이름 뒤에 붙힌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48 등 야심에 찬 정치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로마 황제들도 수시로 알렉산더 대왕을 롤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알렉산더도 종종 자신이 남성미의 극치를 지닌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제우스가 아닌 헤라클레스를 직접적인 조상으로 모셨다는 것은 그만큼 헤라클레스의 인기를 입증하는 것이며, 영웅이 상징하는 바, 신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아도 예술로 표현된 알렉산더의 모습은 마치 헤라클레스가 환생하여 나타난 것과도 같이 사자머리를 헬멧처럼 쓰고 있다. 알렉산더가 발행한 동전에도 사자머리 쓴 그의 모습이 찍혀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동전은 지금도 중동지방 여기저기서 발굴되고 있다. 헤라클레스와 닮은꼴인 자신의 강력한 이미지를 그동안 정복한 방대한 제국의 수많은 미개한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에는 동전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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