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양이를 부르는 저녁
연봉 3억의 구두 디자이너라는 남자27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등장한다. 백 명의 여자들이 환호한다. 남자27의 등 뒤로 떠 있는 거대한 화면에 그를 원하는 여자들의 ‘콜call’ 수가 뜬다. 63. 반수 넘었으므로 남자27은 그 자리에서 여자를 고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의자에 앉자마자 남자27의 수줍은 미소가 걷힌다. 가죽의 재단 상태를 점검하듯 날카로운 눈으로 이상형을 말하는 남자27. 백 명의 여자들이 가슴을 부풀리고 남자27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녀 역시 귀를 기울였다. 그때, 그녀가 들고 있는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소리 질렀다.
-너무 늦으셨어요!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를 고용하기로 한 사람은 그녀다. 돈을 주는 사람은 그녀인데 오히려 그가 그녀를 다그쳤다.
남자27이 말한 이상형이 될 수 없는 여자들이 스스로 콜을 취소한다. 콜 수는 38로 줄어든다. 남자27의 이상형을 들을 수 없었던 그녀는 텔레비전을 연신 기웃거렸다. 전화통화가 귀찮아진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리려다 가까스로 참고 말했다.
-그래서, 죽지 않게 하려고 전화했잖아요.
휴, 한숨 소리가 나고 그가 목소리를 바꿔 나직이 말했다.
-내일 오후에 짬을 내서 갈 테니 그때 뵙지요. 주소 알려주세요.
그는 그녀가 원치 않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 의뢰를 확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미팅 시간을 정했다. 무례하다.
-아니, 제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저도 일이란 게 있는데. 정확한 시간을 정하셔야지요.
-지금은 D 지역에 의뢰가 있거든요. 어떤 아이든지 무조건 일찍 나서야 찾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쪽에 가보려고요. 시간이 정확히 언제 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아이라는 호칭이 불편하고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불편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하루 종일 한가하지만 그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늦잠을 자고, 지금 방영하고 있는 〈운명의 러브콜〉 지난 회분을 다운받아 본 뒤, 네일 케어를 받으려고 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일이 생기면 취소 전화를 넣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출발할 때 꼭 연락주세요.
-제 느낌에 이곳 아이는 내일 오전 안으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신은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느낌이니까요. 제가 갈 때까지 하셔야 할 일이 있어요. 그곳 아이를 찾으시려면 우선…….
콜 수가 6으로 압축되자 사회자가 각각의 여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여자가 남자27의 고급 수제 구두를 선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대충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저 여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저리 복된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녀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저 혼자 크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어린이 보호소에서 키우던 셰퍼드는 애완동물이라 하기엔 사나웠다. 아이들과 셰퍼드는 보호소에서 주는 밥을 먹으며 홀로 컸다. 보호소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갈 때마다, 셰퍼드의 새끼들이 밖으로 입양될 때마다 그녀는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과정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언제고 헤어질 수 있는 것은 함부로 키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고양이라니.
그녀가 고양이를 발견한 것은 보름 전이다. 열한 시 과외를 마치고 돌아온 늦은 밤. 옆집 문 앞에 노란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그녀를 보고선 흠칫 놀랐지만 도망가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그 집 고양이겠거니, 벌을 받는 중이겠거니, 무심히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문을 열었다. 옆집 사내는 사흘 전 이사를 가서 그 집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피하지 않고 처분을 기다리듯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참치 캔을 따서 앞에 내놓자 고양이는 몇 번 할짝거릴 뿐 먹지 않았다. 외관상으론 냄새도 없고 깨끗해 보였지만 그녀는 고양이를 목욕탕에 밀어 넣었다. 샤워기를 갖다 대자 고양이는 온몸의 털을 세워 소리 지르고 그녀의 팔뚝을 할퀴었다. 금세 붉은 피가 흘렀다. 그녀는 고양이가 어린이 보호소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 같다고 생각했다. 보호소의 아이들은 앞으로의 인생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펼쳐질 것을 알고 있었고 온몸으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고양이를 때릴 기운도 없었다. 중위권 성적의 고2 사내아이에게 함수를 가르치다 온 상태였다.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아 애를 먹이는 아이인데 이번 성적도 오르지 않으면 과외를 끊을지도 몰랐다. 아무 소리 않고 고양이 몸을 닦은 후 이불을 깔아놓은 방에 넣었다. 잠결에 가느다란 동물 울음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체념 때문인지 희망 때문인지 다음날부터 고양이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밥을 먹기 시작한 날 저녁, 그녀는 집으로 오자마자 유기동물센터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접수절차부터 말했다. 유기동물발견 신고접수를 하면 동물을 센터에 데려와 유기동물 공고를 하고 한 달 동안 보호하면서 고양이의 주인을 찾아본 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입양을 보내거나 안락사시킨다고 했다. 여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발견 위치와 시각, 고양이의 건강 상태, 사료 급여 여부 등을 물었다.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도 물었다. 그녀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며 다만 계속 울어서 골치가 아파 신고하게 되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고양이를 데려가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달갑지 않은 건지, 그녀의 말을 듣고 답답함을 느낀 건지, 직원은 아주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직원에게 고양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불쑥 말했다. 말하고 나서 자신도 놀라 했던 말을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직원이 재빨리,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그렇잖아도 퇴근 시간이라 구조하러 올 사람이 없어서 난처했다며, 감사하다는 대답을 해왔다. 그리고 더욱 재빨리, 이메일로 신고접수서류를 보낼 테니 빈칸을 채워 넣고 고양이의 사진을 찍어 첨부 메일로 보내달라는 부탁도 했다. 신장이 약한 고양이에게 사람이 먹는 짠 음식은 해로우니 간하지 않은 닭가슴살 등을 익혀주거나 고양이 사료를 사다 급여하고, 사람이 먹는 우유 역시 소화하기 어려워 설사를 하기 쉬우니 먹이지 말며, 고양이 모래를 사다가 화장실을 만들어주면 용변을 가려서 볼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불법 다단계 회사에 가입해 터무니없는 물건을 잔뜩 사버린 기분이 들어 언짢았다. 다시 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양이는 베란다 창가에 누워 잠을 자고 하루 두 번, 챙겨주는 밥을 먹었다. 그녀는 잠시만 고양이를 보호하는, 아니 보관하는 것이니 절대로 저것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거나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걷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슬쩍 따라다닐 때는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들러붙었다.
그녀가 고양이를 데리고 있겠다 말한 것은 충동적이긴 했지만 미아 임시보호소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고양이를 하룻밤 재운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책장 옆 좁은 구석에서 손가락 크기만한 똥을 발견했다. 그리고 미아 임시보호소의 서늘한 마룻바닥을 떠올렸다. 임시보호소는 미아센터에서 아이의 부모를 찾는 동안, 혹은 어린이 보호소에 배정받기 전까지 아이들이 거처하게 되는 곳이다. 그녀는 자신을 나라에 떠넘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지는 않았다. 가난은 충분히 겪었고 이미 아홉 살이었으므로 보호소 생활에 대해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만, 임시보호소에 납작 엎드린 검은 덩어리가 두려웠다. 마룻바닥과 벽이 연결되는 모서리에 껌보다는 두툼하고 캬라멜보다는 단단한 검은 덩어리가 묻어있었다. 오래되어서 냄새도 색도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분명 똥, 이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멍청한 아이가 지린 설사거나, 모자란 아이가 싼 똥이 어쩌다 그 자리에 흘렀거나, 그것은 똥, 이라는 생각이었다. 똥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그 똥이 자신의 몸에 묻을까 걱정하며 그녀는 혼자 철제 침대에 올라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다 큰 지금도 꿈을 꿀 때 그 임시보호소 마룻바닥에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똥을 노려보며 오래고 앉아있는 꿈을 꾼 날은 하루 종일 나쁜 일을 겪었다. 방바닥에 흘린 고양이 똥을 직접 치우면서 그 시절과 많이 바뀐 자신의 처지가 새삼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고양이가 사라졌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 틈으로 나간 것 같았다. 고양이가 방범창을 찢고 나간 것인지 원래 찢어져 있던 것을 그녀가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떠나는 것들은 왜 익숙해진 후에 가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기동물센터에 연락하자 담당 직원이 책임소재를 묻겠다며 화를 냈다. 이미 접수를 해놓았는데 진짜 주인이 나타나면 어쩔 거냐며 따졌다. 사람의 새끼들도 사라지고 버려지고 국가 보호소에서 키워지는 이 세상에 겨우 고양이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책임을 묻겠다니, 그것도 시큰둥한 반응으로 자신을 대하던 그 여직원의 돌변한 태도가 그녀는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엔 무시하고 버티려고 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생명의 소중함 따위 안중에 없는 직원이 직접 찾아와 따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고양이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방 안에 똥을 싼 고양이가, 그녀의 눈을 올려보던 그 고양이가, 살금살금 걷고 조심조심 밥을 먹던 그 노란색 고양이가 불쑥불쑥 그녀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집을 오갈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야옹─, 하고 작은 소리로 고양이를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가 나올 리 없었다. 그녀는 과외 자료를 만들다가도 인터넷에 접속해서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는 것에 관한 정보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일주일의 시간이 다시 지났다. 고양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고양이를 찾든 찾지 못하든 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 석연찮았지만 전화를 걸었다. 탐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를 남기자 그날 늦은 저녁, 그녀가 〈운명의 러브콜〉에 한창 빠져 있을 때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성가신 일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