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길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산기슭을 따라 휘뚤휘뚤 굽어진 산길을 달린다. 차창을 다 열어놓았다. 9월 눈부신 햇살이 초록빛 넘실거리는 숲속에 쏟아져내린다. 옥빛 물속처럼 하늘도 맑다. 뭉게구름은 산 위에 더 높은 하얀 구름산을 만들어놓는다. 나무숲 사이를 지나온 산들바람이 차창을 넘어와 온몸을 부드럽게 간질인다. 길 밑으로 남한강 물이 유유히 함께 달린다. 풀냄새가 바람결에 묻어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풍경 속으로 젖어들었다. 흥에 들뜬 마음으로 라디오 스위치를 누르려다가 CD 한 장을 떠올렸다. 보름 전 대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다시 찾은 CD였다.
박해운에게 하태산이.
선배의 싸인이 박혀 있는 CD이다. 십년 전 소포로 배달된 CD 안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그 노래를 끝으로 지상에서 증발해버렸다. 전화도 불통이 됐고 그의 집주소도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거의 연락처는 물론 근황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하태산은 1978년 스물넷 나이에 통기타를 들고 텔레비전에 나왔다. 히피 머리와 파마머리가 유행이던 그 시절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다. 넥타이도 안 맨 하얀 와이셔츠 위에 미색 체크무늬 양복 윗도리를 걸친 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까만 구두, 햇볕에 그을린 듯 거무튀튀한 얼굴색,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모습은 시골 청년이 결혼식장에 가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사랑과 이별 타령으로 범벅이 돼 있던 대중가요 속에서 그의 노랫말은 한편의 시였다. 나직하면서도 선이 굵은 그의 목소리가 음을 타고 흐르면 고독한 시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어린 나이에 쓴 것임에도 노랫말이 의미심장했다. 이듬해 그는 방송 가요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받고 작사상도 받았다.
그는 가사를 직접 써서 곡을 만들고 기타와 하모니카를 불면서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였다. 그의 노래는 사람들 마음속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그는 음유시인, 고독한 나그네, 라고 불리며 많은 히트곡들을 몇 년에 걸쳐 내놨다. 그런데도 세월이 갈수록 그의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대중가수로서 독창적인 노래세계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들으며 명성을 쌓던 그가 방송국이 아니라 거리나 사람들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독재정권과 사회의 모순들을 비판하면서 집회 장소에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분노했다. 그런 그가 십년 전 마지막 노래를 세상에 던져놓고 사라져버렸다. 처음 가수로 데뷔할 때 인터뷰도 안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의 고향과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추측성 보도가 난무했지만 흐르는 시간의 속도만큼 그에 대한 관심은 물처럼 녹아 흘러가버렸다.
CD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자 그와 만났던 시간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던 모습, 반전 반핵 평화선언을 알리는 거리에서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노래를 부르던 모습, 황폐한 세월의 그림자 속을 힘겹게 걷던 사람들의 모습. 그 고달픈 지난 시절을 가로질러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곡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낮고 음울하게 울려퍼지는 기타 소리를 따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목소리가 장맛비 쏟아지는 종로 한복판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의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맛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종로4가 집회장 바닥에는 소식지들이 비에 젖어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거리엔 우산들이 하늘을 가리며 지나가도 있었다. 거리엔 우산들이 하늘을 가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집회장에서 나부끼던 깃발들은 쓰러져 있었다. 하태산이 몇십명 앞에서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 ─
우리 사회의 불의를 걷어내자는, 세상은 변해야 한다는 노랫소리는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의 몸부림처럼 바람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사람들은 땅에 코를 박은 채 무심히 흘러갔다.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지도 않는 쓸쓸한 집회장에는 무관심이 장대비처럼 쏟아져내렸다.
그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내 몸은 비에 젖은 듯 무거워졌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맑은 하늘이 흐려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차를 세우고 담배를 태웠다. 지난 세월이 끌고 온 슬픔을 털어내려고 연거푸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올라온 아픈 기억들이 눈가로 몰려들었다. 나는 끝내 치받아오르는 감정을 삭일 수 없어 운전대에 머리를 박은 채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년 전 가을에 겪은 일이었다.
나는 공장에 다닌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은 뒤 햇볕을 쬐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못 쓰는 박스를 깔고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데 정문을 넘어서는 검은 승용차를 봤다.
우리 공장은 식품공장이다. 거래처 사람들과 시청 위생과 등등 각 분야의 사람들이 자주 방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사나 공장장이 달려와 손님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은 작업자들에게 위생모와 마스크를 쓰도록 했고 주변 청소를 한 뒤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두명의 어떤 사람이 작업장에 들어왔다. 그들의 행색은 이제까지 업무차 내사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한사람은 목까지 올라온 티셔츠에 잠바를 입고 있었고 또 한사람은 넥타이가 없는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이상했다. 업무차 나온 사람들이라면 호떡의 무게가 맞는지, 제품상태가 좋은지 등을 살펴보면서 작업자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는데 그들은 말없이 서서 내 쪽을 지켜만 보다 돌아갔다. 그들이 간 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사장이 나를 불렀다.
“소설 쓰는 분이신가요?”
나는 사장이 직원을 호출하는 경우를 일년 반 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소설가인 걸 알았다는 그의 말은 내 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 소설도 씁니다.”
“아니, 소설 쓰시는 분이 공장은 왜 들어오셨나? 소재를 찾으러 오셨나?”
사장이 반말을 섞어가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사장님, 제가 돈 벌러 왔지 인격까지 팔러 온 거 아닙니다. 나이도 저와 같으신데 하실 말씀 있으면 제대로 해주십시오.”
사장이 나를 쫓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주눅 든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리면서 맞대응하지 않으면 대부분 사장들은 비열할 정도로 야비하게 물어뜯는다는 걸 오래전부터 많이 봐왔다.
“우리 공장 이야기도 쓰셨던데?”
“식품공장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죠.”
“아니던데. 소설 속 공장이 우리 공장이던데? 아주 악랄하게 묘사했던데, 내가 주는 돈 받아먹으면서 그렇게 쓰시면 안되지.”
사장은 곱슬머리에 사각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개구리처럼 배가 불룩 나와 있었다. 흘깃거리면서 눈동자를 계속 돌리는 날카로운 눈엔 검은 뿔테 안경이 걸쳐 있었다.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도 불법체류자들만 데려다 일 시키는 사람이었다. 공장이 바쁘게 돌아갈 때마다 브로커를 통해 그들을 대거 모집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약점을 이용해 우리보다 하루 한시간씩 일찍 나와 일하게 만들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을 쓰면서 그들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나이 때문에 다른 일터로 옮겨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깔봤다. 몇년씩 장기근속을 하면서 일하는데도 대우가 형편없었다. 보너스도 없이 명절 휴가비 명목으로 십만원 주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이년 전까진 공장에서 나오는 찐빵과 이웃 공장에서 만드는 막걸리 한상자로 대신했다고 한다.
“난 당신이 소설을 쓰든 뭘 하든 상관 안해요. 근데 정보과 형사들이 와서 당신 동태를 살펴보라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해? 안 그래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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