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앞에서
고은
195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만인보』 『고은 전집』 등이 있다
얼마나 영광인가
살아서
위대한 오늘 밤을 맞는다
하나하나의 촛불이
묵은 제단을 떠나
이 거리
저 거리의 찬바람 속 모여들어
마침내
뜨거운
뜨거운
광장의 몇 백만 심장으로 타오르는 밤을 맞는다.
가장 사악한 권좌와
가장 흉측하게 썩은 무엇을 에워싸고
촛불의 함성으로 꽉 찬
가장 웅혼한 촛불 밀물의 밤을 맞는다
이제
영웅은 하나의 봉우리가 아닌
몇 백만의 파도소리 아니고 무엇이냐
이게 나라냐고 외치는 소년의 나라가
이곳
저곳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 나라가
여섯 번이나 아홉 번이나
지칠 줄 모르는
가장 아름다운 혁명의 나라로 솟아오르는
활짝 열린 산야의 밤을 맞는다
이토록 놀라며 온 누리가 깨닫는 역사 앞에서
촛불의 선남선녀는
새로운 전체
새로운 개체의 뜻을 맞는다
새로운 삶과 죽음을 맞는다
천년의 것 백년의 것 파묻어버린
새롭고 또 새로운 벌판의 밤을 맞는다
얼마나 서릿발 같은 끓는 물 같은 꿈인가
죽기 전 살아서 살아서
오늘 밤과 내일을 맞는다
반드시 올 개벽의 흰 밤을 맞는다
야들아 촛불소풍 가자
남효선
198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둘게삼』 등이 있다.
야들아 목도리 챙기고 장갑도 챙기고
솔이네 엄마는 분주한 손길로 김밥을 말고
따뜻한 유자차도 챙겼습니다.
오늘 솔이네는 이웃집 민이네와
광화문 광장으로 소풍을 갑니다.
소풍은 솔이 엄마 제안으로 이뤄졌습니다.
솔이는 학교 가는 길에 늘 만나던
민이와 광화문에 함께 가는 것이
신났습니다.
광화문에 도착한 솔이와 민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수많은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흡사 촛불바다 같았습니다.
솔이와 민이는 촛불이 달린 머리띠를 둘렀습니다.
머리에 촛불이 환하게 밝혀집니다.
솔이와 민이는 서로를 쳐다보며
활짝 웃습니다.
촛불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이 신났습니다.
자신도 함께 출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광화문을 걸어 청와대를 향해 함께 걸어가며
촛불을 든 또래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또래 아이들은 ‘이게 나라냐’는 팻말을
흔들며 제법 비장한 모습으로
부모와 함께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이 ‘와’ 함성을 지르며
파도처럼 밀려 왔습니다.
함께 걷고 있는 민이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돼 있습니다.
엄마아빠와 함께 광화문 대로를 함께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서
솔이네와 민이네는
촛불을 밝혀 놓고
준비해온 김밥과 초밥을 나눠 먹었습니다.
생일잔치 같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로운 나라를 물려줘야 합니다”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서
어떤 아줌마가 마이크를 쥐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가 무대로 올라왔습니다.
“자기도 6학년이 되면서 무얼 할까 생각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대통령도 생각 좀 하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각하면서 산다’는 게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이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솔이 손을 잡았습니다.
민이 손바닥에 향긋한 땀 냄새가 났습니다.
민이 눈망울에 촛불이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눈망울 속 촛불이 예뻤습니다.
솔이네와 민이네는 밤늦도록 광화문에서 대한문에서 청와대를 향해
촛불을 밝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이네와 함께 먹은
종로2가 길거리 포장마차 어묵 맛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따뜻한 어묵국물을 마시자
두 손에 불끈 힘이 솟았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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