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열매술꾼과 술 한잔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열림원, 2002)
기원의 땅, 이야기의 기원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언어란 말과 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말을 글로써 모두 나타낼 수 없는 아프리카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비문자 문학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구전문학은 아프리카에서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장르이다. 아프리카 문학의 범주는 신화, 찬가, 서사시, 민담, 수수께끼, 속담, 주문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야자열매술꾼Palm Wine Drinkard》 역시 그 특징을 하나로 정의 내리기엔 다소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소설이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소설 속에는 속담과 민담이 그대로 녹아 있고,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시공간의 확장도 보인다. 다양하고 새로운 형식과 낯선 내용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대체 무슨 소설인가, 과연 소설로 보는 것이 합당하긴 한 것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향을 잔득 머금은 이런 소설이 탄생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깔려 있다.
작가는 1922년 서부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도시인 아베오쿠타 출생의 흑인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월레 소잉카Wole Soyinka를 비롯하여 벤 오크리Ben Okri, 켄 사로위와Ken Saro-Wiwa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많이 있는데, 이중 아모스 투투올라Amos Tutuola는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달리 독특한 이력과 작가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능숙하게 영어나 프랑스어 등을 구사하는 반면, 이 작가는 고작 6년간 미션스쿨을 다닌 것이 전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향에 돌아가 생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작가의 길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언어나 문학 공부를 깊이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잡지에서 민담과 설화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아모스 투투올라는, 자신도 어렸을 땐 이야기꾼으로서 꽤 소질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요루바족의 구전 신화와 민담을 재구성한 작품을 써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막상 결심이 서자 단 이틀 만에 원고를 마쳤고, 그 후 석 달에 걸쳐 수정한 끝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야자열매술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민담과 설화 속담을 바탕으로 구상된 소설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의 문화와 정취가 듬뿍 담기게 된 것이다.
첫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소 서툴고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소설을 단 이틀이란 시간 동안 구상하여 써 내려갔다는 것에서 작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비정규교육을 짧게 받았다는 점은 오히려 기존의 문학을 답습하지 않도록 했고, 특유의 독창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독특한 아프리카 문학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다른 작가와 작품의 매력을 먼저 알아본 것은 서구의 문인들이었다. 1952년 발표된 이 소설은 서구 작가들이 새로운 모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합리주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이어지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학구열이 뜨거워지면서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야자열매술꾼》은 이러한 시대의 기대와 필요에 꼭 맞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서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의 시초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당시 아프리카 작가들이 보기에 매우 굴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아프리카의 문화적 유산에 관심을 보이고 민간에 전승된 것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섰지만, 이 작품에 대한 서구의 평가는 자신들의 행보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이국 문화에 호기심을 지닌 서구 인종주의자들의 온정주의에 의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 작가들의 눈에는 맞지 않는 문법 체계 때문에 수준 낮은 작품으로 읽혔고, 더구나 같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설화와 민담의 내용이 낯설지 않은 터였기에 창의적 내용으로 해석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젊은 영어로 쓴 간결하고도 혼잡하고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엄청나고도 대단한 이야기”, “세계 문학의 반열에 들어가는 첫 아프리카 고전”, “독창성과 매력을 지닌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천부적 이야기꾼” 등의 예찬과는 상반되게 “기분 나쁜 유령 이야기, 구연 전통의 단순 차용, 엉터리 문법으로 이루어진 작품” 등의 혹평을 받게 된다. 당시 아프리카 문학 판의 분위기는 아프리카 문학의 규정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고, 대부분의 흑인들은 백인에 대한 쌓인 분노로 가득 차 있어 작가와 편집자들 사이에서 대립적 분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모스 투투올라는 ‘검은 작가 대회’에서 자신에게 혹평을 쏟아낸 이들에게 “아프리카 검둥이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힌다면 차라리 발행되지 않는 편이 낫다”《경향신문》, 1962, 07. 30.는 발언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애국적 나이지리아인들은 이 작품을 수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서구에서 인정받는 아프리카 흑인 작가의 작품이 오히려 아프리카인들에게 비판 받는 독특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후 아모스 투투올라는 문학 공부에 몰입하고 소설을 계속 집필함으로써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또한 문인 집단에 가입하고, 예술 사교 단체 이바단 음바리 클럽을 만들기도 하는 등 작가로서 행보를 이어 나간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뜨거웠던 논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그라지고,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능성이 재해석되면서 《야자열매술꾼》은 재조명을 받게 된다. 이렇게 뜨거웠던 논쟁의 중심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지닌 다양한 특징 때문이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관심을 받을 만큼 독특한 이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끌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아프리카 현대 문학사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서구에 알리는 데 기여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자열매술꾼》은 아프리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으로 읽히게 된다.
작품을 둘러싼 여러 가지 평가를 소개했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을 떠나 “구연 문학의 전통을 살리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문자로 기록되지 못한 것들이 가진 힘을 간과할 수 없는 아프리카적 특징을 생각해봤을 때, 《야자열매술꾼》은 구전되는 문학을 어떻게 창조적 방법으로 현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구술 문학이 문자 문학으로 넘어올 수 있는 교량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영어 문법의 미숙함이라고 지적된 부분 역시 영어와 현지 언어가 뒤섞인, 실제로 사용되는 토착적 영어 문장을 소설에서 구현하는 것이라고 관점을 바꾸어 접근해보면 이야말로 당대 모습의 생생한 반영이다. 제목을 ‘drunkard’가 아니라 ‘drinkard’라고 한 점이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작가가 제목을 바꾸지 않고 고집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번역자가 이를 표지에 그대로 살린 것 역시 작가의 의도를 헤아린 것이 아니었을까. 표준 영어만이 사용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면 세련되지 않고 다소 앞뒤가 맞지 않은 이부분들이 훨씬 구전을 잘 살려내는 작가의 개성이라고 볼 수 있다. 구술 문학을 염두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해석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 여백은 곧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 넣을 공간이 된다. 일방향적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라는 점에서 구전 문학의 맛이자 정취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자열매술꾼》은 어떤 소설보다 아프리카적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인 아프리카가 품은 태초의 이야기들이 오늘날의 문학으로 넘어오는 다리가 있다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 가교를 건너는 것이다.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이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프리카 문학의 주요 소재들과는 거리가 있다. 서구 문화와 아프리카 전통 간의 충돌이나 갈등, 식민 통치 과정에서 파멸되어가는 개인과 사회의 운명 등이 아니다. 그저 열 살 때부터 야자열매술을 마시는 것이 일이었던 주인공이, 자신이 부리던 야자열매술 시중꾼이 죽자 그를 찾아다니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는 신들의 아버지”라 자신을 칭한다. 부적인 “쥬쥬”를 부리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분신술을 쓰기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간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러 사람들과 얽히게 되고, 사람들의 제안과 부탁으로 계획되지 않았던 모험을 하게 된다. 아무도 데리고 오지 못한 ‘죽음’을 마을로 가져오기도 하고, 신체 각 부위를 빌려 순간적으로 멋진 외모의 신사로 보이는 해골에게 잡혀간 처녀를 구해 와 아내로 삼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기근에 싸인 마을을 친구에게 받은 선물인 달걀알로 구원하기도 하는 등 이야기 내내 영웅적인 면모를 뽐낸다.
한편 주인공에겐 허술한 점도 많아 여러 번 어려움에 처하고, 그럴 때마다 조력자가 등장하여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는 등 이야기의 묘미를 살리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이러한 전형성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논리적 서사가 무너지고 우연과 인연에 의해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진행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온갖 고통과 환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단순한 영웅 서사로 읽히기보다 가혹한 삶과 운명의 불가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나무와 숲의 신과 같이 초자연적 존재들이 등장하고, 엄지손가락에서 자라다 종려나무 가시에 찔릴 때 태어난 아이가 무엇이든 끝도 없이 먹어치우는 어마어마한 식성을 가졌다는 설정과 같은 신화적 요소는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하늘과 땅이 사냥에서 겨우 쥐 한 마리를 잡고 서로 자기 것이라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져 영영 만나지 않게 되었다거나, 하늘이 땅에 비를 끝도 없이 내려 물바다로 만들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여러 나라 고전에서 발견되는 내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발상이다.
죽음의 세계로 가는 모티브는 다른 신화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를 만나러 가는 오르페우스 이야기뿐 아니라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가는 바리데기 설화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음의 세계에 다녀오는 심청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 관심사에 접근하는 방식만은 독특하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죽음을 의인화해서 가두거나 데려오기도 하고 심지어 사고팔기도 한다. 이처럼 경계를 넘어갔다 다시 인간 세계로 귀환하는 방식을 풀어내는 과정에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전통적 세계관과 생활양식이 자연스럽게 담기기 마련이다.
민담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보니 교훈적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제공되던 술이 떨어지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제각각 흩어져버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어 부가 사라지면 사람도 남지 않는다는 세상의 모진 이치를 일깨워준다. 완벽한 신사의 수려한 용모에 끌려 해골을 따라갔던 처녀에 관한 에피소드나,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김매는 작업에 선발되지 못한 친구가 일이 끝난 밭을 다시 잡초로 무성하게 채우는 일화 등을 통해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속담과 구전되는 관용적 표현 등에 묻어나는 생활상도 자연스레 엿볼 수 있다. 삶의 지혜나 생활의 보편적 요소가 담겨 있는 장면도 여러 부분이다. 끊임없이 먹어대는 아이를 머리에 얹고 다니다 보니 부모는 휴식을 취할 수도 없는 이야기에서는 아이를 먹여 살리는 것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은 생각할 틈도 없는 부모들의 고충을, 한 번도 돈을 갚아본 적이 없는 채무자와 어떤 돈이든 받아내지 못한 적이 없는 채무 해결사가 죽음의 세계로 도망가고 쫓아가는 내용의 일화에서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빌리고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끝나거나 용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내용과 재미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명확히 권선징악을 나누어 옳고 그름을 주입하는 방식은 지루하고 따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때론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등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나 다층적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이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을 잘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낯선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과 두려움은 동시에 생기는 감정이다. 불편하고 어색함을 떨쳐내고 들여다보면 익숙하고 친밀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독특한 것이 가지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원초적이고 생생한 상상력을 과장된 입담을 통해 들려주고 있는 이 소설은, 아프리카만의 전통적 세계관과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신과 인간의 영역과 삶과 죽음의 영역 등이 혼재되어 경계의 불명확성을 보여주고, 단순한 권선징악이나 영웅의 승리로 끝나지 않기에 정의와 인간적 가치에 대한 질문도 던져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모든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비유와 은유, 해학과 풍자 등 돌려 말하기 방식을 통해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간다. 이것이 낯설지만 가까운 이야기를 또 다른 이야기로 만드는 이 소설만의 마력이라 해야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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