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헌법의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1. 헌법과 무의식
일본의 전후헌법 9조에는 수수께끼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사적으로 이례적인 조항이 왜 전후일본의 헌법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실행되고 있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위대가 있으며 미군기지도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실행하지 않는 법이라면 보통은 바꾸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9조는 남아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세 번째 수수께끼부터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하면 두 번째, 첫 번째 수수께끼도 풀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위대나 미군기지 등은 역대 정권이 행한 헌법 9조에 대한 ‘해석’에 의해 긍정되고 있습니다. 또 집단적 자위권사실 이것은 군사동맹의 별칭입니다도 가능하다는 ‘해석개헌’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 9조를 바꾸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그것을 공공연히 제기하는 정권은 선거에서 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요.
사람들이 헌법 9조를 지지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설령 패전 후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해도 헌법 9조와 같은 것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실제 그것이 생긴 것은 점령군이 명령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전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되면 헌법 9조는 사라질 것입니다. 실제 호헌護憲론자는 그렇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9조는 왜 지금도 남아있으며, 또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려는 것일까요? 호헌론자는 그것을 자신들이 전쟁 경험을 전달하고 헌법 9조의 중요성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서 문제를 그 반대 측, 즉 헌법 9조를 폐기하고 싶어 하는 측에서 바라보도록 하지요. 그들은 60년에 걸쳐 그것을 폐기하려고 했지만 폐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그 이유를 다수의 국민들이 좌익지식인에 의해 세뇌가 되었다는 것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틀린 것입니다. 좌익은 애당초 헌법 9조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946년 6월 26일 신헌법을 심의하는 제국회의에서 노사카 산조공산당의원는 전쟁에는 정당한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이 있으며, 침략을 당한 나라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좌익에게 있어서 오히려 일반적인 견해로, 이후의 신좌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무장투쟁을 한 ‘적군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후 호헌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수파에게는 그들이 의견을 바꾼 것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노사카 산조의 질문에 대해 “근대의 많은 전쟁이 국가방위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정당방위권을 인정하는 것이 전쟁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보수파가 지금은 없습니다. 그들은 집단적 자위권을 헌법 9조를 가지고 정당방위로서 긍정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보수파 쪽도 의견을 바꾼 셈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헌법 9조를 폐기하려고 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선거에서 쟁점이 되면 크게 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얼버무리며 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헌을 목표로 삼은 것도 60년 남짓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분명 그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려 하지 않고 좌익정당이나 진보파 지식인들만 탓하는 것은 자신들의 무력함과 몰이해를 그저 보류하는 것입니다.
헌법 9조가 집요하게 살아남은 것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이미 사라졌을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변덕스럽고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9조는 오히려 ‘무의식’의 문제입니다만, 이 무의식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일단 무의식이란 의식과는 달리 설득이나 선전으로 조작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실제 60년이 넘는 보수파의 노력은 무의미하게 끝났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9조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9조는 ‘무의식’ 차원에 뿌리를 둔 문제이기에 설득이 불가능합니다. 의식적 차원이라면 설득할 수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호헌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법 9조는 호헌파들이 계몽을 했기 때문에 유지되어온 것이 아닙니다. 9조는 호헌파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호헌파야말로 헌법 9조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수파 중에 9조가 무의식의 차원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문예비평가 에토 준입니다. 그는 1981년에 헌법 9조가 존재하는 비밀을 미점령군의 교묘한 언론통제에서 보려고 했습니다. 신헌법공포 때에 다음과 같은 칙어가 발포되었습니다. “짐은 일본국민의 총의總意에 기반하여 신일본 건설의 기초가 다져지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추밀고문의 자문 및 제국헌법 제73조에 의한 제국의회의 결의에 의한 제국헌법의 개정을 재가하여 여기서 이것을 공포한다.” 하지만 에토 준은 헌법을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기초起草한 점, 그리고 민간검열국CCD의 ‘검열’을 통해 은폐된 점을 지적했습니다.
게다가 이 검열의 실태는 ‘검열제도에 대한 언급’을 엄금嚴禁한 후에 실시되는 매우 주도면밀한 검열에 다름 아니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검열제도에 의해 일본인은 헌법에 관해 거울방에 갇힌 것과 같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거울은 이쪽에서 보면 확실히 거울로밖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얼굴 이외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지만, 저쪽에서 보면 즉 점령군 당국과 미국정부 측에서 보면 실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로, 방안의 모습을 전부 손에 잡힐 정도로 잘 알 수 있는 장치이다. 원래 CCD는 검열을 하고 그것을 통해 일본국민의 심리를 조작하고 유도하는 동시에 일본의 각계각층에 관한 정보수집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전戰前 일본의 출판계에서 검열이 이루어져도 독자들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도 검열되기 전에 처음부터 ****나 **라는 복자로 쓰거나 했습니다. 예를 들어, 네 자라면 공산주의, 두 자라면 혁명이라는 것은 독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에토가 말하는 ‘검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검열’이란 그와 같은 검열이 아닙니다. 그런데 검열이란 대체로 검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점령군의 검열이 특별히 주도면밀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점령군이 검열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헌법이 점령군에 의한 초안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점령군의 검열이 헌법 9조가 이렇게까지 깊이 침투하도록 ‘일본의 국민심리의 조작하고 유도’할 수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토 준이 헌법 9조를 ‘검열’의 관점에서 본 것은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사실 옛날에 이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그가 프로이트를 의식해 ‘은밀한 검열’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프로이트의 중요한 작업인 『꿈의 해석』에서 검열이 키워드라는 것은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법 9조에 관련하여 ‘검열’을 문제 삼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무의식’과 관계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꿈은 소망욕망의 실현인데, 그것은 검열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꿈을 꾼 당사자도 그것이 무의식의 소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검열이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검열관이란 무엇일까요.
무의식에는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쾌락원칙’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져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억제하려고 하는 ‘현실원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기 프로이트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검열은 현실원칙의 표현입니다. 현실원칙이란 말하자면 사회의 규범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통해서 아이에게 주입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에서 인간을 규제하거나 검열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전기 프로이트의 것입니다. ‘헌법의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전후 헌법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기 프로이트의 인식이 필수불가결합니다. 헌법 9조를 후기 프로이트의 인식으로 본다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 응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헌법 9조가 제2차 대전 후의 일본에서 생겨난 것처럼 후기 프로이트의 인식도 제1차 대전 후의 오스트리아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에 대해 조금 설명해보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