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상기!
나네. 일철이야. 일철이가 지금 이 탈출기를 쓰고 있단 말이네. 자네도 최서해의 『탈출기』를 읽었겠지. 그런데 그 1920년대가 아닌 1990년대, 그것도 식민지가 아닌 해방년륜을 50돌기나 감는다는 내 나라 내 땅에서 이런 탈출기를 쓰고 있단 말이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닌가! 나의 탈출 기도를 한마디로 찍어 말한다면 그것은 언제인가 내가 자네에게 주었던 그 하나의 약봉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네.
그 약봉투는 내가 정말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던 거네. 자네도 알지만 우리집에는 내 형네 막내인 여덟 살짜리 조카가 노상 와서 살다시피 했네. 물론 내가 결혼하여 따로나기 전까지는 형과 함께 살았고 또 따로 났다는 아파트가 형네 집과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원인만이 아니었네. 진짜 원인은 나의 아내가 그 애를 진정 눈물겨운 사랑으로 살뜰히 애무해주었던 거기에 있었던 거네. 천성적으로 그런 눈이긴 했지만 그 애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은 그야말로 언제나 애틋한 정에 젖어 있었고 때로는 제 새끼처럼 품에 끼고 누운 채 아침까지 자버리기가 일쑤였지. 그래서 내가 ‘여자란 자식을 낳지 못해도 나이가 들면 모성애라는 것을 절로 가지게 되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할 정도로 말이네. 아내는 그 애 말이라면 그저 죽는 판이었네. 그만큼 그 애도 아내를 따랐구. 바로 그 약봉투 사건이 있었던 그날에도 그 애가 우리집엘 왔던 거네.
아내는 아래층 우리 부문당비서네 천장지 붙이는 것을 도와주러 간다고 나가고 직장에서 밤일감이 제기되어 나 혼자 있는 집엘 말이네. 그 애는 문을 열자 작은 어머니부터 찾더니 그가 없음을 알자 나에게 연을 만들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네. 낙엽을 굴리는 마가을늦가을 바람이 바야흐로 아이들의 연날리기를 꼬드기는 계절이었네. 나는 계절 따라 부풀기 마련인 아이들의 그 동심을 흐리게 할 수 없어 연종잇감을 찾기 시작했네. 언젠가 봤던 것 같은 비닐 문풍지를 찾느라 당반선반이며 이불장 뒷구석을 뒤져댔지. 그때 연종이보다 먼저 내 손에 쥐어진 것이 바로 그 약봉투였네. 물론 나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 그러나 그 약봉투가 결혼한 지 근 이 년여가 되어오도록 임신을 하지 못하는 아내와 연결되어지며 점차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네. 무슨 약이기에 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박아두고 먹는 것일까? 무슨 피치 못할 병이라도?… 아 그래서 오늘까지 임신을 못 하는 것이었구나!
나는 그날 연을 만들며 손을 두 군데나 베여야 했네. 암만 궁리해보아야 직통배기로 물어보아서는 감춰두고 먹는 약의 내막을 아내가 쉽사리 대줄 것 같지 않았네. 그래서 대응책을 세운 것이 그 약봉투를 들고 의사인 자네를 찾아가게 되었던 거네. 근데 하루 지나 자네가 나한테 알려준 그 약에 대한 감정 결과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아내의 불임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 것이 아니라 그 병을 만들기 위한 약이 아니었던가!
“피임약이라니?” 나는 그때 여성들도 포함한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자네의 치료실이라는 것도 잊고 이렇게 소리쳤네.
“정말인가?”
“아, 아….”
사람들 앞이라 면구스러운 듯 자네가 내 말을 밀막는* 이런 소리를 등 뒤에 들으며 그때 나는 단숨에 집으로 달려왔네. 하나 막상 아내와 마주서자 달려오며 입안에 폭탄처럼 재웠던 말이 꽉 막혀버리고 말았네. 섣불리 꺼낼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시에 머리를 쳤던 때문이었지. 어찌 안 그랬겠나. 주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나와 아내야 애초부터 짝이 기우는 배우자가 아니었던가! 인격이야 어방지방이었겠지만 이 사회에서는 제1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가정성분이라는 데서 말이네. 그래서 리일철과 남명옥이가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입을 짝 벌린 사람들이 어디 한둘뿐이었던가.
‘공고한 결합이 될까, 백로가 까마귀와 한 둥지에 든다구 한 쌍이 된대?’ 하구들 말이네.
그런데 정말 한 둥지에 들었던 그 백로가 왼장**을 보기 시작했단 말일세. 나는 그때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네. 아직 새각시에 가까운 아내가 애를 낳지 않기 위해 피임약을 먹고 있다는 이유를 내 처지에서 그 외에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가 있었겠나.
* 밀막다. 못 하게 하거나 말리다.
** ‘왼장’은 ‘딴 목적을 가지고 남들과 달리 행동하는 것 또는 몰래 따로 벌이는 장’을 뜻하는 말로, ‘왼장(을) 보다’라는 관용구는 여기서 ‘여자가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치정관계를 가지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급히 들어와 씩씩거리며 마주서는 내 기색을 느낀 아내가 오히려 먼저 입을 열었네. 나는 대답 대신 으스러지게 어금니를 깨물며 두 손가락들을 맞잡아 비틀어 으드득 소리를 냈네. 그러고는 창가 걸상 앞으로 가 꾹 앉아버리고 말았네. 아내가 재티가 날려나오는 듯한 한숨을 조용히 내쉬더니 담배와 성냥갑을 가져다가 창턱 위에 놓아주는 것이었네. 하지만 그런 위로에 사그라질 내 울분이 아니었네. 글쎄 이 리일철이가 오늘의 ‘상놈’ 성분을 타게 된 이유라는 것이 뭐였겠나. 그것은 고작해야 아버지가 한 파장의 랭상모냉상모. 냉상 모판에서 기른 모.를 죽여버렸다는 게 전부였다네. 그것도 전쟁이 끝나고 이 땅에 소위 사회주의 협동경리가 갓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그때에 말이네. 그것이 역사의 한 전환기였을진대 농민들에겐들 생소한 것이 어찌 한둘뿐이었겠나. 랭상모라는 것도 그랬네. 조상대대로 물모밖에 모르던 손으로 랭상모라는 것을 처음 길러보려니 그게 어찌 첫술에 배부르게 되었겠나. 그래서 아버지가 실수를 하게 된 것인데 그 실수가 그만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네. 하기야 아버지가 해방 전에 손발이 닳도록 일한 값으로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었고 협동조합 조직 때 그 땅을 첫마디에 고분고분 내놓지 못했으니 이복자식이 장독 깬 격이 되고 만 셈이긴 했지만 말이네.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쇠고랑을 차고 주소도 없는 그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고 우리는 감나무 푸르던 고향집에서 쫓겨나 압록강 여울물소리 소란한 생소한 이곳으로 ‘이주’까지 당하게 됐던 것이네.
『탈출기』의 ‘나’가 부모처자를 이끌고 ‘오랑캐령’을 넘을 때는 그래도 비운 중에도 행여나 하는 일말의 희망이나마 있었네. 그러나 쇠고랑을 차고 간 남편에 뒤이어 치마폭에 감기는 어린 두 아들을 달래며 저 개마령을 넘어와야 했던 어머니에겐 단 한 오리의 희망마저도 없는 막막함뿐이었지. 사람이 죽을 데를 가도 오랑캐령을 넘던 그네들처럼 제 가고 싶어 제 발로 간다면 그것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거네. 총칼에 내몰려 고향의 정든 모든 것과 발버둥치며 떨어져 역시 총칼의 감시 속에 산 설고 물 선 이곳으로 ‘이주’당해 오던 우리 가정의 그 참상에 비하면 말이네. 그 아픔 그 원한을 못 이겨 어머니도 끝내는 이 타향만리에서 너무도 일찍이 숨을 거두고 말았었지. 불우할 자식들의 장래가 북방의 얼음꼬치처럼 염통에 맺혀와 눈도 감지 못한 채 말이네. 그런데 버림받은 세상에 두 어린 것을 두고 간 어머니의 그 원혼 앞에서 오늘 또 무슨 새로운 비극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상기!
나는 그날 자네에게서 되돌려받았던 피임약 봉투를 호주머니 속에 그냥 그러쥔 채로 끝내 창가를 뛰쳐나가고야 말았네. 어머님의 분묘로, 개마령 기슭으로, 일 나갈 시간이 다 된 것도 잊고 저녁 늦도록까지 어디로 어떻게 헤매었는지는 나 자신도 지금 다 기억할 수가 없어.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평시나 조금도 다름없이 반기며 밥상에서 덮어놓은 신문장을 벗겨놓던 일이며 뜨적뜨적 내 수저가 가닿는 음식 그릇마다 더 바로 내 앞으로 내놓아주곤 하던 일만이 기억날 뿐이네. 말하자면 나는 그날부터 아내를 뜯어보기 시작했지만 나에 대한 아내의 따뜻한 정은 구태의연하기만 했다 그 말이네. 타고난 인정미가 흐르는 수줍은 듯한 그 눈빛으로부터 항상 부드럽기만 한 몸동작이며 조용한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말이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날을 따라 소연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네. 그럴수록 나의 번념은 나날이 더해가기만 했지. 한데 의심이 의심을 낳는다고 한번은 내 귀에 별난 말이 들려오질 않았겠나. 3층 1호집에서는 아침마다 두벌 밥을 짓는지 이른 아침에 한 차례, 늦은 아침에 또 한 차례 꼭 꼭 두 번씩 연기가 오른다는 소문 말이네. 아파트 생활에서 근거 없는 말은 조만早晩. 이름과 늦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 나지 않는다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그저 스쳐버리고 말았었지. 아낙네들의 쓸데없는 말밥에까지 아내를 껴넣고 보고 싶지 않아서였지.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였네.
나는 아침 첫 시간부터 용접작업이 제기되어 온 공장마을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상하차직장 100톤 기중기 팔 꼭대기에 올라앉게 되었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침식사를 치르고 나온 우리집 굴뚝에서 ‘두벌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겠나. 이미 입동도 지나 날씨가 찰 때였지만 용접 부위의 안전성을 확인한다는 핑계를 꾸며대며 나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기중기 팔에 올라갔네. 그리고 3일째 만에는 기중기 팔에서 내려오자 작업반장에게 적당한 구실을 들이밀고 금방 출근해왔던 집으로 되돌아갔네.
“아이, 어떻게?”
증기가 뽀얗게 서린 부엌에서 무엇인가 일손을 놀리고 있던 아내가 자못 놀라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네. 얼굴에다 내 아내답지 않은 헤식은 웃음까지 띠우면서 말이네.
“응. 권척卷尺. 줄자을 둬두고 갔댔구만.”
나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낯간지러운 대답을 하게 되었네.
“권척을요? 참, 별게 다 사람을 공걸음시키네.”
아내는 공장에서 수고로이 되돌아오게 된 것이 마치 자기이기나 한 것처럼 푸념을 하며 냉큼 권척이 있는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네. 이때라 생각하고 식식 증기를 뿜고 있는 가마 뚜껑을 제꺽 열었네. 그런데 가마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은 싱겁게도 개머거리였네. 퍼런 시래기 쪼가리들 속에 약간의 강냉이와 쌀알들이 뒤섞여 풀떡거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개머거리였단 말일세. 개머거리!
“어마!… 별걸 다.”
권척을 들고 나오던 아내가 황급히 솥뚜껑을 닫는 나를 보고 기겁한 소리를 질렀네.
“개죽을 멀 더 이렇게 정성스럽게 끓이우?”
“예? 예, 개, 개죽을 좀…….”
“날마다 이렇게 끓이우?”
“네. 저….”
“글쎄 당신 일만 잘해주세요. 집일 걱정은 조금도 말구. 이런 실수가 없이 말이에요.” 아내가 내 손에 권척을 꼭 쥐여주며 당부하는 말이었네.
“아래층 당신 부문당비서가 또 왔댔어요, 어제. 당신의 입당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으니 일을 더 잘하도록 당신 뒤를 잘 받들어주라구요. 그런데 내가 받들어드린다는 게 고작….”
아내는 갑자기 아랫입술을 꽉 감쳐무는데 말 못 할 가슴속 아픈 사연이 일시에 눈물로 터져나오기라도 한 듯 두 눈 가득 눈물이 시글거리는 것이었네. 아내는 그런 얼굴을 픽 돌려댔지만 나는 나대로 그 이상 더 낯을 들어 아내를 바라볼 수가 없었네.
그날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권척은 호주머니가 아니라 온종일 내 명치 끝에 괴롭게 매달려 있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부터 나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이었네. 졸렬한 일로 아내의 뒤를 밟았다는 양심의 자책도 자책이었지만 아내가 그 무슨 다른 이유로 해서 피임약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타협심이 가슴 한구석에 싹트기 시작한 때문이었네. 만약 아내가 정말 ‘까마귀’의 피를 받게 될까 두려워 피임약을 쓰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가 나에게 부어온 애정도 모두 가면이었을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이었네. 나에 대한 그의 애정을 두고 그 무슨 가면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정말 천벌을 받을 일이었지. 제발 모든 것이 나의 오해로 끝나게 되었으면!… 그래서 아내가 나의 아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으면!…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