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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대륙’을 바라보는 편견과 오류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에 뒤따른 행복감과 낙관론은 때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사라져 버리고, 전례가 없는 가난과 끔찍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쇠퇴가 뒤에 남았다.─ 2001년 밀레니엄위원회 보고서
전직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베냉공화국의 알베르 테드제보레 교수와 협력하여 시작한 ‘창조적 집단사고 순례단’이 작성한 문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일정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수도를 거쳐 코트티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의 수도 아비장에서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나라가 아프리카 대륙을 내부에서부터 좀먹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깊은 불안감의 본보기로 떠올랐다.
밀레니엄위원회 보고서 작성자들은 여러 전임자의 이름을 나열하고 과거의 노력을 바탕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강조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이런 발상은 처음이 아니다. 위원회는 다른 사례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라고스행동계획, 아루샤선언, 유네스코의 오디언스아프리카, 마프MAP, 오메가OMEGA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회합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중에 일부는 잠비아의 루사카에서 열린 아프리카정상회의가 채택한 강령 ‘아프리카 발전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NEPAD으로 구체화되었다.”
참석자들은 그런 노력에 따라 곧바로 변화가 나타날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실망스럽게 되풀이되는 유산과 무익함을 충분히 의식하고 그렇게 경고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사건들, 특히 발전의 척도가 되는 성취들은 침체 상태나 퇴보적인 역사의 반전으로부터 가시적인 돌파구에 해당하는가를 향해, 다소 과장된 면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평가를 향해 우리가 조금씩 다가가게 만드는 희망적인 측면이 있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 중에는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오래전에 그것을 장려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으뜸은 기적처럼 보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취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수결 원칙이라는 취약한 탄생의 탯줄을 누르고 있는 과거의 무게를, 가장 낙관적인 사람들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든 방식으로 떨쳐 냈다. 몇 십년 된 수단의 분쟁 해결은 훨씬 더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갈등을 해결하는 길에 대한 독특한 교훈을 전 세계에 준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였다.
아프리카는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두 가지 사건이 그런 사정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상반된 태도로, 대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하나는 조용하고 가라앉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알려질 가치가 큰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대륙을 위한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 즉 국경을 초월한 독립적인 통신과 정보 접근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것은 ‘서아프리카 열린사회 이니셔티브’와 제휴한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고 어느 정도는 정부의 재원에 의해 유지되긴 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운용된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서아프리카 민주라디오’라고 명명되었다. 그것이 발족한 것은 2005년 8월이었다. 라이베리아의 유혈극이 종식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라이베리아의 암울한 상황은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고, 그 여성 대통령은 2011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엘런 존슨 설리프 같은 지도자가 서아프리카 지도자 세 사람과 함께 ‘마노 강 지역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대륙의 총괄적인 관리를 위한 설득력 있는 상징적 사업과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된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나온 자신감 덕분이었다.
그것은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네 지도자는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이 편리할 때마다 늘,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기질상 민주적인 통치 방식에 적합하지 않다고 단정했던 대륙에 민주주의를 영구히 확립시키기로 결의했다. 불행히도 새로 선출된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특사를 보내 메시지를 전달했다. 메시지는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다른 나라들뿐 아니라 주최국 세네갈에게도 도전이며 아프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잘 요약하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국은 여러 해 전에 생각했던 것이었다. 방송국의 본거지는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였어야 했다. 그런데 내전 탓에 그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 존슨 설리프 대통령은 메시지에서 방송국이 라이베리아에 세워지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만약 세네갈 정부가 민주적인 목소리가 세네갈 땅에 있는 것에 싫증을 낼 경우 라이베리아가 애초에 예정된 바대로 방송국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동료들을 놀리는 가벼운 형식이었지만, 그 메시지는 모든 참석자들을 위한 진정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그것은 대륙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자 상징이며 징조였다.
그 모임에 참석한 몇몇 사람을 비난한 것은 다른 사건에 대한 기억들, 즉 마노 강 유역 협력과는 정반대로 르완다식 통신 시설이 보여 준 것 같은 사건에 대한 기억들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정반대 편에 서 있는 ‘르완다 밑 콜린스 라디오 방송’은 1백만 명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3주 만에 잔혹하게 학살하는 과정에 효율성을 발휘했다. 그처럼 우울한 기억들도 있고 또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괴로운 소식이 연이어 보도되는 상황에서, 마노 행사는 기분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 과거의 중독성을 제거하고 네 지도자 사이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에 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것처럼, 라이베리아의 학살자이며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지낸 군벌 찰스 테일러1948~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테일러가 반인류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헤이그로 송환되면서, 서아프리카의 소구역 사람들은 이것이 악몽의 끝이고 지도자들에 대한 관용의 끝이며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억제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랬을까? 결국 테일러가 체포된 것은 전임자인 새뮤얼 도우1951~가 아이의 오줌을 먹다가 실제로 토막이 나서 죽은 비참하고 가학적인 결말이라는 교훈이 있었던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건이 찰스 테일러에게는 교훈이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전쟁에 신물이 난 민주적인 사다리의 허약한 가로장 위에서 권좌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테일러의 통치는 일상적인 잔혹함 이상으로 나아갔다. 그가 권좌에 오르는 길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의 정적들은 테일러의 통치를 오랫동안 묵인할 수 없었다. 테일러의 ‘충직한 부하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집단 기억은 그가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정치적 합법성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 상아해안는 어떠한가? 2002년에 벌어진 코트디부아르의 때 이른 붕괴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참석자들이 밀레니엄위원회를 위해 아비장에 모였을 때, 비록 표면 아래에서 끓고 있는 불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할지라도, 일단 코트디부아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미래 지향적인 회의가 과거의 가마솥 속으로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른바 코트디부아르의 민주주의는 가짜였다.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권좌에 있던 수십 년 동안 그 나라는 건설적인 발전과 안정된 민주주의의 귀감이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그것은 가부장적인 일당독재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의 정치적인 성공은 배제의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해롭지 않아 보이는 ‘아이보리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외부인들이 ‘아이보리인’이라는 구호를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 예를 들어 프랑스인이 아니라 아이보리인을 위한, 아이보리인에 의한 코트디부아르를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보리인들은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코트디부아르의 부와 성공적인 자립은 이른바 외국인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외국인들’이 이웃 국가 출신의 동료 서아프리카인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은 과거 오트볼타공화국이던 부르키나파소 출신이었다. 다수의 ‘이민자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아오면서 총리직을 포함하여 공직과 정치 분야의 고위직에 있었으며, 아이보리 여권을 가지고 다녔고 다른 나라에 관해 알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편리하게도 순전히 선거인단 숫자 때문에 자신들의 땀으로 경제적인 명성을 얻은 나라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언젠가 끓어 넘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리 되었다! 서아프리카 소지역의 회원국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난 것을 특히 괴로워했다. 그들의 협력으로 두 회원국인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기에 더욱 그랬다.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살인적인 갈등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자원이 고갈되어 갔다. 소년병으로서 온갖 잔혹 행위를 저지르며 성장한 젊은 세대의 윤리적 파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그 아이들이 나이가 더 들었더라면 잔혹 행위를 저지른 반인류 범죄 혐의로 국제법정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을 지구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또 배타성이라는 문제가 아프리카 대륙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중동, 그리고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탈레반의 폭력을 피해 배를 타고 건너온 난민들이 해안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오스트레일리아가 해군을 동원해 막았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종종, 그들의 진짜 목적인 배제를 명시하지 않는 법률적인 형식주의로 가장하지도 않고 노골적인 외국인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냐 그들이냐’의 정신 구조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상황은 곧 잔혹하고 지속적인 다양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전쟁은 오래된 저강도 전쟁이지만 잔인한 아일랜드 내전이었다. 이 전쟁은 2009년까지도 불미스러운 폭력이 상습적으로 벌어졌지만, 마침내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살인 발생 지역에서 최종적인 무장해제가 아프리카 정치인 시릴 라마포사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훨씬 더 잔혹하고 배타적인 사건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인종 청소였다. 결국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무력으로 그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쟁들은 억압과 자원 경쟁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뿌리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편협한 배타주의였다. 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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