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
저녁 식사는 어떻게 식탁에 올라올까? 이는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질문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극도로 복잡한 문제다.
우리 대부분은 날마다 소비하는 것들의 극히 일부분만을 직접 생산한다. 나머지는 구입한다. 빵은 가게 선반에 있고 전등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전선을 통해 흐른다. 그러나 빵 두 개, 전기 1킬로와트조차 전 세계 수천 명의 긴밀한 공조를 필요로 한다.
밀을 수확하는 농부, 빵 봉투 제조 회사, 빵을 납품하는 제빵 공장, 그리고 빵을 파는 슈퍼마켓. 이 모든 게 제 기능을 해야 우리가 슈퍼마켓에 가서 빵을 구매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농기구를 파는 사람들, 상품을 운반하는 사람들, 그 교통수단을 정비하는 사람들, 슈퍼마켓을 청소하고 상품을 정리하는 사람들 모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이 모든 과정이 얼추 제시간에, 얼추 순서에 맞게 진행되어야 빵 코너의 선반이 비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빵 한 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 바비 인형 한 개, 폭탄 한 개, 풍선 한 개 등 우리가 사고팔 수 있다고 상상하는 모든 물건에 해당된다. 현대의 경제 활동은 이런 정교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이에 경제학자들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방법에 대한 과학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이 이 개념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랑은 아껴서 사용해야 하고, 불필요한 곳에 써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사회를 움직이면 개인적인 삶에서 사용할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찾기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자들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사랑 말고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랑 말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사용하면 어떨까? 아주 풍족해서 남아도는 요소 아닌가?
1776년,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경제학에 대한 현대적인 정의를 내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푸줏간 주인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다.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빵집 주인이 빵을 굽고, 양조장 주인이 술을 빚는 것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취하기 위해서다. 빵과 맥주의 맛이 좋으면 사람들이 구입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빵집 주인과 양조장 주인이 일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빵과 맛있는 맥주를 공급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건 원동력이 아니다. 원동력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는 명확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욕구는 무한하다.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어, 사회 전체에 골고루 나눠줄 만큼 풍부하지 않다. 따라서 사랑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병에 넣어서 잘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길이는 100미터에 속도는 달팽이이며, 양배추만 먹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소련의 빵집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다.
소련처럼 되는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시장이 효율적인 경제를 만드는 데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다. 의무와 규제를 집어치우고 시장을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두면, 경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라는 무한한 공급원을 동력 삼아 시계처럼 잘 맞아떨어져 돌아간다는 논리를 폈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 모든 사람이 각자 필요한 재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빵은 슈퍼마켓의 선반에서 구할 수 있고,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흐른다. 그리고 저녁 식사는 식탁에 오른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전체가 잘 돌아가게 된다. 성원 중 누구도 전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마술 같지 않은가. 그리고 이는 우리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이야기가 됐다.
경제학의 초창기에는 이기심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1800년대 말,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제1원칙은 모든 주체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대 경제는 ‘자기 이익 추구라는 화강암처럼 견고한 바탕 위해 세워진 것’으로, 우리 모두 감탄의 눈길로 그것을 우러러봤다.
경제학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경제학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피는 학문이었다. 본질적으로, 경제학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기술하는 역사였다. 모든 상황에서,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여전히 주류 경제학 이론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경제학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특정 행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류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정확하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내려면 현실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도덕성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으면 좋을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를 표현하고, 경제학자들은 그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 알 필요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덕분에 사회가 유지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것이 가장 큰 역설이다. 그리고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신은 항상 역설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이다. 애덤 스미스가 만들어 냈지만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후대 경제학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모든 일이 방향을 정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보거나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밖에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거나 물건을 움직여 배치하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주고, 행동과 선택 사이에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안에서부터 작용해서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개념은 애덤 스미스 본인보다 후대 경제학자들의 이론에서 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이 표현을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대에 와서 이 개념은 경제학과 그 학문이 그리는 독특한 세상의 기초가 되었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해 이야기하기 약 1세기 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펴냈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자연과학자, 연금술사였던 뉴턴은 달이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작용하는 힘을 설명했다. 그는 행성들의 움직임과 서로 당기는 힘, 그리고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 등을 연구하여 이 모든 것이 천체를 움직이는 힘인 인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턴은 우리에게 현대 과학을 소개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뉴턴의 시대에 수학은 신성한 언어로 간주됐다. 인류는 신이 부여한 자연이라는 책을 수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이해했다. 신이 우리에게 수학을 선물한 이유는 인간이 신의 창조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뉴턴의 발견에 전 세계가 도취됐다.
그중 가장 깊이 도취된 것은 아마도 애덤 스미스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정치경제학 분야였을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만이 알았던 태양계의 법칙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했다. 신이 개입해서 벌을 주고, 바다를 가르고, 산을 옮기고, 매일 수백만 송이의 꽃을 피우던 세상에서, 이제 신이 창조하고 태엽을 감아 놓은 후 자리를 비웠으나 스스로 잘 돌아가는 우주로 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의 기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은 하나의 기계이자 엄청나게 큰 로봇, 내부의 다양한 요소가 자동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연장이 되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뉴턴이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뉴턴이 자연의 법칙을 밝혀내면서 세상을 위해 신이 마련해 놓은 설계도도 밝혀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와 동일한 접근법으로 사회의 법칙과 인류를 위한 신의 설계도까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이 움직이는 모종의 메커니즘이 있다면, 사회에도 메커니즘이 있을 것이다. 천체가 움직이는 데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인간이 움직이는 데 적용되는 법칙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과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사회를 그에 맞춰 흘러가도록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설계도에 맞춰 조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물길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물결에 따라 헤엄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는 시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마찰 없이 잘 돌아가면서, 우리에게 제일 좋은 방향으로 정확히 움직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애덤 스미스와 경제학이 스스로 맡겠다고 나선 임무였다. 쉬운 임무는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까?
태양계에서의 인력과 동일한 역할을 사회에서 해내는 힘, 그것은 바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다.
뉴턴은 “나는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세상에 관한 신의 설계도를 밝혀낸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은 뉴턴의 물리학에 완벽하게 상응하는 천부의 자유권에 대한 발견이라고 묘사되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분해해 보면 된다. 뉴턴이 사용한 방법론이다. 전체를 쪼개서 작은 조각으로 나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으면 또 나눠 본다. 더 작은 조각으로 잘게 쪼개는 것이다.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마침내 전체를 나누고 나눠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가장 작은 조각을 얻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는 원료가 된 근본적인 레고 블록이다. 소립자. 원자. 가장 작은 구성 요소. 이제 그것을 연구하면 된다. 그 조각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전체가 변화하는 것은 근본이 되는 입자들이 변화해서가 아니다. 이 입자들은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전체로부터 독립적이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입자들이 배열되는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입자들의 움직임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 그리고 세상은 시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돌아간다.
경제학자들도 이 기술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이들은 경제를 이해하고자 작은 단위로 쪼갠다. 원하는 날 아무 때나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그 모든 복잡한 톱니바퀴 같은 구조를 쪼개 본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더 작은 단위로 쪼갠다. 조각을 점점 더 작게 쪼갠 끝에 경제학자들은 전체를 분해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이라고 불렀다.
이 개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당시 물리학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집중했던 것처럼 경제학자들도 자유 의지를 가진 개인을 연구하는 데 온 정신을 바쳤다. 사회는 이 개인들의 총합에 불과했다. 경제가 변화한다면 이 개인들이 변화해서가 아니다 ─ 개인의 졍체성은 다른 요소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대신 개인은 선택을 한다.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배열된 패턴이 변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과의 관계 안에서 행한 선택들 때문이다. 이 선택들은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치 당구대 위의 당구공들처럼. 그러나 개인으로서 가진 의식 자체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침묵을 지킨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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