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
성냥 한 개비를 켜면
눈먼 소녀가 덜덜 떨며 울고 있습니다
성냥 한개비로 촛불 하나를 켜면
망루에 얼어붙은 다섯 그림자가 상여를 밀어올리고
또 성냥 한개비 그어 촛불들을 옮겨 붙이면
높은 사다리 위에 선 그녀가 멀리 타전하고 있습니다
금 간 벽에 부러진 성냥 한개비 긋자
벽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들
붕대를 감은 그림자들이 재개발 상가 입구에 멈추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늙은 소년들이 지하도로 숨다가 멈추고
꼿들이 피다가 멈추고 새들이 날다가 멈추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저 혼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너져내리는 벽 속을 뛰쳐나와 누군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
저기 멀리 불붙는 광장에 눈먼 소녀 머리카락이 보일락 말락
못, 자국
검버섯 같은 하늘이 점점 내려오는 저녁
한 여자가 꽃잎을 여기저기 붙이고 돌아다녔다
개흙이 훤한 똥바다에 삿대질하다가
수문통시장 다락방들을 지날 때면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다가
만화로다방 앞에 와서는 옷을 다 벗어버렸다
돈 벌러 중동 간 남편이 죽었다 하기도 하고,
아이가 열병으로 죽었다 하기도 하고,
꽃잎이 하나들 떨어져서야
여자의 마맛자국이 보였다
못 자국 같은 생生의 숨구멍들이 보였다
지금은 솔빛마을이 들어서고
도로 밑에 개흙, 죽은 물고기들,
수문통 다락방 젖은 나무들,
모두 묻혀버렸지만,
비석 같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마맛자국처럼 하늘에 구멍을 낸
달이 떠서 또
바다로 흘러가고 있지만,
동일방직에 다니던 그애는
하늘에 온통 붉은 눈발 내리던 날들이 지나고
빙판길에도 봄이 들어서는
꽃을 꽃이라고만 불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와
내가 상고에 간신히 입학했을 때
그애는 동일방직에 나갔지
낮에는 공장 다니고, 밤에는 산업체 야간학교 다니고
내가 밀린 납부금 때문에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을 때
그애는 여공이 되어 솜뭉치로 매일 가슴에 돋는 상처를 봉했네
커다란 기계 밑에서 나사못처럼 구부러지고 있었네
나사못이 된 그애가 만든 실이 내 몸으로 감겨왔던가
나는 밤마다 영혼의 올이 하나둘 풀려 가느다란 실로 집을 지었네
전염병처럼 졸음이 오고 분홍 알약이 목구멍으로 사라지면
잠 대신에 악몽 속의 귀신들이 따라다니며 실을 풀어갔네
천사가 올 때까지만 다닌다던, 그애
굵은 눈송이가 눈물 대신 내리던 어느날
파란 시내버스에서 만난 그애는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지
매연 같은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리던 그애, 검은 신사복과 팔짱을 끼고 갔네
옆방에 세 살던 은자 언니도
키 큰 신사복에게 구두 선물을 받고는 했지
그러곤 헤어졌다네 신사복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지
벌집통을 누군가 차버렸나
매일 벌에 쏘였네 퉁퉁 부은 상처로 문을 걸어 잠그고
내가 음악 속으로 사라질 때도
주판알을 튕기며 맞지 않는 숫자와 세상의 셈을 미리 배울 때도
그애는 검은 신사복과 집 나간 사랑을 했던가
공설운동장 구석진 담벼락 아래, 어린 군인들이 매일 군홧발에 맞고 있었네
내 가슴은 조금씩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네
그애는 여전히 낮에는 솜뭉치, 밤에는 책 속에서 벌레가 되었네
내 잠속에서 커다란 악보가 물결 춤을 출 때
그애의 잠 속에는 커다란 남자가 잔병처럼 나뒹굴었네
무거운 실들이 지나간 물결 자국, 안감과 겉감처럼 포개지고 뒤엉켰네
그애의 얇은 음막이 찢어졌네
미끄덩거리는 울음이 미리 빠져나간 자리
습자지 같은 사랑이 찢어졌네
하늘이 내려앉은 그애의 가슴은 점점 더 큰 솜뭉치가 되어갔네
눈물 먹은 솜뭉치는 얼어버렸나 쨍그랑, 얼음처럼 깨졌네
그애의 질병 같은 사랑도 영 끝이 났다네
산업역군이라던 그애의 가면 아래 썩어가던 일기장
폐수가 흐르는 수문통에서 다시 그애를 만났을 때
그애의 상처는 딱딱하게 굳어갔지
밀랍 인형 몇이 따라다니며 상처를 닦아주었네
인형들의 눈빛은 공장 굴뚝 연기처럼 흔들리고 있었네
우리 올 풀린 영혼들, 물풀처럼 개천으로 흘러가 마냥 더러워지기로 했네
개천이 만들어준 평화는 오래된 흑백 일기예보처럼 맑음 대신 아직도 천둥 번개가 치지만
용서는 개천에나 버리기로 했네
부러진 빗자루를 탄 구름마녀들의 하늘이 모두 개천이 될 때까지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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