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서론
― 과학자, 군대, 사회운동
1960년대 미국의 과학자들은 《타임》이 뽑은 ‘올해의 인물’이었다. 과학자들은 영향력과 사회적 기여 측면에서 인류 역사상 다른 어떤 집단도 뛰어넘는 슈퍼 히어로로 묘사됐다. 과학자들은 ‘진정한 20세기의 모험가이자 당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며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인류의 가장 위대한 탐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정치인이자 학자이며 건설자고, 심지어 사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10년에 걸쳐 환경주의자, 반전 활동가, 대항문화 구성원들의 비판을 받고 난 1970년에 《네이션》은 과학이 ‘전쟁/우주 기계’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몇몇 시민들은 ‘과학에 적대적’이고, 과학을 ‘전쟁, 오염, 온갖 종류의 악과 동일시’하게 됐다. 《사이언스》의 편집인 필립 에이블슨은 ’과학자들에 맞선 전쟁‘이 확대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런 흐름이 ‘사회에 관련된’ 과학 연구에 대한 비현실적 요구 탓에 촉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때 국가 안보에 기여한다며 상찬되던 과학자들은 이제 전쟁을 영속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았다. 과학자들과 군대의 관계를 향한 도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는 이런 도전들을 그저 ‘외부인들’이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과학자들 자신이 비판자 대오에 합류했고, 동료, 정부, 산업체를 향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과학의 약속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공격했다. 과학과 과학자들을 향한 공격, 그리고 기술이 주는 혜택에 관한 의심은 미국에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1970년이 되자 과학과 과학자들을 향한 비판은 어느 때보다도 더 소리 높여 다양하게 제기됐다.
과학자들의 자기비판을 예외적 현상으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기록은 정반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20세기 내내 미국의 과학자들은 특히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려 노력하면서 다양하고 눈에 띄는 형태의 공적 정치 활동에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종종 과학자가 아닌 활동가들에게서 영감을 얻고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과학을 뒤흔들다》는 1945년부터 1975년 사이에 과학자들과 군대 사이의 재정적 연관과 정치적 관계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운동이 전개된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그런 탐구를 위해 이 책은 과학자들이 다양한 공공정치상의 역할을 표방한 조직을 결성한 일화 세 가지를 비교한다. 1950년대 초에 평화주의 과학자들은 과학의사회적 책임협회Society for Social Responsibility in Science:SSRS를 결성해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포기하라며 다른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1950년대 말에는 대기 중 핵 실험의 타당성을 둘러싼 대중적 논쟁에 관여하게 된 과학자와 시민들이 세인트루이스 시민핵정보위원회Committee for Nuclear Information:CNI를 결성해 낙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960년대 말에는 과학자들이 사회적행동과정치적행동을위한과학자들Scientists for Social and Political Action:SSPA(나중에는 사회적행동과정치적행동을위한과학자와엔지니어들Scientists and Engineers for Social and Political Action:SESPA로 알려졌다)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그 뒤 자기들을 민중을위한과학Science for the People:SftP이라고 부르게 됐다. 처음에 민중을위한과학은 직접 행동과 대중 교육을 비롯해 여러 다른 방법들을 써서 과학자들과 군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가 맺는 연관 관계에 관심을 모으고 이런 연계를 좌절시키려 했다. 각각의 단체는 공적 생활에서 과학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전망을 제시했고, 과학과 국가 사이의 새로운 질서에 따라, 당대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정치적 의미와 용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수행한 구실은 《과학을 뒤흔들다》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가장 급진적인 분파의 경우 자기가 지닌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와 자기가 하는 연구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약화시키기까지 하면서 군대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의 노력은 어떻게 미국의 정치 생활에서 과학의 힘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그 힘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는가? 이런 논쟁에 관여한 과학자들은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 하는 학문》에서 제기한 ‘학문의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과 씨름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 과학자들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적절한 관계란 어떤 것인지, 또한 어떤 것이 돼야 하는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나름대로 이상과 실천을 정의하고 있었고, 이런 이상과 실천이 과학과 공적 정치 사이의 규범적 연결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책의 핵심에는 사실과 가치, 정치와 과학, 전문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하려 한 과학자들의 역동적 노력이 있다. 가장 적극적인 비판자들은 과학자 전체로 보면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의 배경은 다양한 지위, 분야, 기관에 걸쳐 있었다. 몇몇은 유명 대학과 정부 기관에 속한 아주 저명한 인물인 반면, 다른 몇몇은 산업체에서 일했다. 대학원생에서 노벨상 수상자까지 지위도 다양했다. 연결(과 분리) 전략도 거기에 못지않게 다양했고, 과학 학술 대회 방해, 편지 쓰기와 대중 연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정보 제공, 비슷한 생각을 지닌 과학자와 활동가들을 상대로 한 협력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어떤 전술을 선택하든 간에 과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혜택을 제공한다는 과학의 약속을 가장 잘 이행하는 방법을 놓고 사려 깊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노력들은 20세기의 공적 생활에서 과학이 자리한 곳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자연에 대해, 자기들과 공적 정치 생활의 관계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을 하고, 과학 지식과 정치적 가치 사이의 관계를 매개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권위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과학적 지식 그 자체의 권위는 증가했다. 이 장에서는 이 책의 중심을 구성하는 주장을 개관하고 뒤에 이어질 장들의 구조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군대, 과학, 사회운동, 1945~1975
2차 대전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면서 과학과 과학자들이 진보를 위한 한결같은 힘이라는 생각은 점차 공격을 받게 됐다.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기술의 혜택에 관한 의심은 미국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 시기에 나타난 비판들은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격렬하고 다양했다. 많은 비판이 과학자들과 군대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앞으로 보게 될 테지만, 과학을 비판한 사람들은 당대의 사회운동에서 힘을 끌어왔다. 초기의 도전들은 상대적으로 점잖은 형태의 지면 논쟁과 구두 논쟁의 형태를 띠었지만, 1960년대 말이 되면 과학자들과 과학을 대상으로 삼은 급진적 비판자들은 과학자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장소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차분한 전문적 담론과 지적 논쟁의 범위를 넘어서 개별 과학자들을 지목해 조롱하거나 때로는 물리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몇몇 엘리트 과학자들은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 학술 대회에서는 야유와 방해에 시달렸고, 집이나 직장 앞에 진치고 있는 시위자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군대의 후원을 받은 연구가 애국적 행동이라고 생각하던 과학자들은 베트남전을 지휘한 장군들만큼이나 그 전쟁에 책임이 있는 존재로 여겨져 공격 받았다. 다른 비판자들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객관성의 가면을 쓰고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인 연구 결과를 생산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1945년에서 1975년 사이에 과학자들이 대중과 국가의 관계를 재조직하려 한 시도가 별난 일은 아니었다.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도 공적 문제와 관심사들을 자기 관할 영역 안에 포함하면서 자기들을 위한 특별한 일련의 과업, 숙련, 책임을 여전히 남겨두려는 운동을 스스로 조직했다. 이를테면 크리스텐 루커는 19세기 중엽 미국의 의사들이 자기 나름의 전문직 관할 영역을 확립하기 위해 여성들을 낙태에 관한 의사 결정에서 배제한 사실을 보여줬다.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은 공적 정치 논쟁에 관여한 결과로 새로운 연구 주제들을 채택했다. 릴리 호프먼은 1970년대 의사들과 도시 계획가들의 동원에 관한 연구에서, 스콧 프리켈은 환경 독성학 분야가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서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줬다. 또 다른 전문직들은 새로운 집단에 대한 봉사를 포함하도록 자기들의 관할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런 모습은 크리스티언 스미스가 중앙아메리카의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 사이에 해방 신학이 발전하는 과정을 다룬 연구에서 보여준 내용과 같다. 좀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1960년대 종반에 서구 국가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부분 공적 정치에서 제기된 쟁점들과 자기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면서 당면한 사회적 사안과 정치적 관심사들을 다루는 데 자기의 기량과 권위를 더 잘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미국 과학자들이 정치적 참여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엔지니어들은 동료들 사이에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조직을 만들고 운동을 펼쳤다. 1920년대 종반에 창조론보다 진화론을 가르치는 쪽을 선호한 몇몇 과학자는 진화 이론과 과학의 활용을 개인적 도덕성과 공공적 도덕성의 기반으로 옹호하는 강연과 출판 활동을 벌였다. 많은 우생학자들이 미국 ‘인종’을 ‘정화’하는 폭넓은 운동의 적극적 구성원이었고, 미국 전역에서 정치인과 시민 집단들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했다. 1930년대에 과학자들은 파시즘과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고 과학을 활용해 빈곤과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으려고 단체를 조직했다.
20세기 중반은 그러나 특별한 사례를 제공한다. 몇몇 과학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하던 정치 활동의 일부를 계속 이어가려 했고, 좀더 폭넓게 보면 연방 정부의 군사적 우선순위보다 지역적 필요에 기반한 뉴딜 방식의 과학 분야 자금 지원 시스템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충족되지 못했다. 군대 친화형 과학 지원 세력이 누가 원자력 생산을 통제하고 어떤 근거에서 연방 자금을 지원할지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한 때문이었다. 지식 생산, 전쟁, 대중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정의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강화된 현실은 단지 철학적 논쟁이나 인식론적 논쟁, 또는 지적 견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현실은 과학의 변화하는 물질적 조건에 대한 대응인 동시에 서로 다른 많은 정치 공동체와 사회 계층에 속한 미국인들의 정치적 동원에 대한 대응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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