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책 이야기 1
좋은 책을 읽으면 잠이 달다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골드베르크 변주곡〉 바흐, 연주: 반다 란도프스카/ 글렌 굴드
사람들이 서점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책을 가지고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을 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세상에서 몰랐던 책과 우연히 만나는 기회를 일상 속 여기저기에 흩뿌리고 싶어서다.
북 디렉터라는 직업을 가진 내가 최근 음악 감상과 독서의 관련성을 느낀 적이 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죽었을 때 머리맡에 있던 두 권의 책이 『성서』와 『풀베개』였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요코다 쇼이치로의 『「풀베개」 변주곡』을 보면, 굴드는 연주활동을 그만둔 지 삼 년이 지난 1967년에 윌리엄 폴리라는 대학교수가 보내준 그 소설을 세상을 떠난 1982년까지 여러 차례 읽었다.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폴란드 출신 쳄발로 연주가 반다 란도프스카의 연주로 처음 들었는데, 굴드의 연주 CD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서도 묘하게 끌려 내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약동하는 것을 느꼈다. 1955년에 녹음된 그의 데뷔 앨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양식樣式으로 J. S. 바흐가 울린다. 템포가 빠른 것은 물론이고 페달을 적게 사용해서인지 매끄러우면서 밝고 발랄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굴드는 『풀베개』의 무엇에 자신을 일치시킨 걸까?
이 소설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서양화가가 무릉도원 같은 시골의 온천 여관에 묵으면서 그림을 그려야 할 순간을 찾는다는 아련한 이야기다. 인간의 정情을 초월한 나쓰메 소세키의 ‘냉담’이 잘 표현되어 있고, 그의 예술론을 보여주는 책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혜로 움직이면 모가 난다. 정에 편승하면 휩쓸려 간다. 오기를 관철시키려 하면 옹색하다. 아무튼 사람 사는 세상은 살기 힘들다.’라는 도입부를 소리 내서 외웠던 국어시간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둘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속적인 모차르트를 싫어한, 철저히 ‘비인정非人情’의 음악가였던 굴드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풀베개』를 낭독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굴드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의 어디에 공감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알 수 없음이 독서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백 명 있으면 각기 다른 백 가지 독서법이 있다. 책의 어디에 영향을 받고 공감하는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그렇다, 독서법에 정답은 없다. 독자는 책의 책장을 편 순간, 작가가 쓴 문장에 깃든 신비한 힘을 이해하는 자유를 얻는다.
물론 스스로 책과 마주하는 것이 전제다. 최근에는 인터넷 검색으로 책의 줄거리와 결말, 골자는 물론 미스터리소설의 경우 범인(!)까지, 상세히 정리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책을 읽은 기분을 느끼기도, 책을 읽은 척하기도 편한 세상이다. 그렇지만 독서는 글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일대일 관계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고 마음속의 무엇이 움직였는지가 중요하다.
독서는 몇 시간 공상 속을 여행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읽은 책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라도 마음에 깊이 꽂혀서 피와 살이 되고 하루하루 실제 생활에 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빠르게 많이 읽어서 많은 정보를 접하는 효용만 강조하는데, 그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침에 십 분 일찍 일어나려는 마음이 들었다거나 저녁 반찬 레시피를 떠올렸다고 하는, 사소하지만 일상을 만드는 조각에 책이 관계하면 좋겠다.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아는 것’이 ‘사는 것’과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한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려고 노력은 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외부기억장치가 발전할수록 만물박사인 인간은 필요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외부기억장치에 의존하는 인간은 단편적인 답만 즉각 얻을 수 있는 대체가능한 존재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책을 읽는 것은 작가의 인생을 더듬어가는 터무니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일대일의 정신적 교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길러내는 유일한 수단이다. 결국, 책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이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다시 음악 이야기로 돌아와서, 자신의 무언가를 흔드는 음악을 들었을 때도 나는 정신의 교류를 느낀다. 작곡자. 연주자. 그들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 이상을 전달받은 느낌이다. 음질이나 재생 미디어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음악에 무엇을 느끼고 마음의 어느 곳이 움직였는지, 마음의 어느 곳이 일격을 당했고, 그래서 어떤 상처가 자신에게 남았느냐 하는 문제다.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나쁘지 않다. 음악 감상이 취미인 것처럼. 하지만 지식을 위한 독서, 교양을 위한 음악은 이제 멈추어도 되는 시대가 아닐까. 외부기억장치로는 발견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체험을 주는 독서와 음악 감상의 기회. 이런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방대한 데이터만 나뒹구는 세계가 되어버린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것. 그 감촉을 기념사진처럼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 스며들게 할 것. 좋은 음악을 들으면 밥맛이 난다. 좋은 책을 읽으면 잠이 달다. 이런 생활이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겨지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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