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통근의 탄생․성장․승리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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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두 번 런던에 간 사람
럭비 스쿨의 교장을 역임한 고故 토머스 아널드Thomas Arnold박사는 런던-버밍엄 철도 노선의 개통을 문명의 행진에서의 또 한 번의 위대한 걸음으로 간주했다. “이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군.” 그는 철도 위에 놓인 육교들 가운데 하나에 올라서서 이렇게 말했고, 기차가 자기 발밑으로 쏜살같이 지나가 멀리 떨어진 산울타리 사이로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모습을 보게 되어, 봉건제가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되어 기쁘군. 어떤 악惡 하나가 진정으로 사멸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어.”_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공학자들의 생애Lives of the Engineers》(1862)
“사무실과 사생활은 별개이지. 나는 사무실로 갈 때는 성城을 두고 가고, 성으로 올 때는 사무실을 두고 오니까.”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1861)에서 변호사의 사무장인 존 웨믹은 이렇게 말한다. 일부 문학평론가들은 그를 이 작품에서 가장 현대적인 인물로 간주하는데, 어쩌면 그가 매우 현대적인 분열증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일터에서 그는 야심만만하고 세속적이며, 머지않아 교수형에 처해질 사람들의 ‘소지품’을 훔친다. 그리고 가정에서, 즉 스스로 지은 성에서는 그는 유쾌하고 괴짜이고 다정하다. 그는 19세기 초반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당시에 이르러 일터와 가정은 때때로 상충하는 기준의 지배를 받는 별개의 세계가 되었다. 농장이나 대장간에서 일할 때는 일터와 쉼터가 동일했기에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한결같았고, 항상 같은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자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이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터와 거주지의 분리를 옹호하는 도덕적 차원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위생적인 고려였다. 웨믹이 뒤로 하고 떠난 디킨스 시대의 런던에서는 하나의 하수도 양쪽에 수많은 공장과 빈민가가 이어져 있었다. 콜레라가 20년에 한 번씩 돌았고, 웬만한 가정에서는 방 하나에 다섯 명이 살았으며, 성인의 체격이 조부모보다 작았고 기대 수명도 겨우 35년에 불과했다. 디킨스의 명성은 어떤 면에서는 석탄불과 아궁이에서 나오는 검댕이 뒤섞인 런던의 비를 맞고 살아가는 주정뱅이 거지들이 개방식 하수도 옆 지하실에 살면서 미래의 범죄자를 길러내는 섬뜩한 이야기를 써서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나빴고, 산업혁명으로 인해 변모하고 있던 영국 다른 도시들의 상황도 런던과 마찬가지였다.
1832년, 한때 찰스 다윈과 함께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정치가 겸 교육가 제임스 필립스 케이James Phillips Kay가 《맨체스터의 면화 제조업에 고용된 노동계급의 도덕적․신체적 상태The Moral and Physical Condition of the Working-Class Employed in the Cotton Manufacture in Manchester》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기에 묘사된 도시의 더러움과 질병과 타락의 장면들을 읽은 중산층 독자들은 자기 집 문 앞까지 들이닥친 질병에 대해 각성하게 되었고, 가급적 빨리 도시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무척이나 많이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케이가 보고한 맨체스터의 팔러먼트 스트리트Parliament Street의 상황은 이러했다. “주민이 380명에 달하지만 변소는 단 하나뿐이고, 그나마도 좁은 골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인접 주택으로 악취가 스며드는데, 이것은 십중팔구 질병의 매우 비옥한 원천으로 입증될 것이다. 또한 이 거리에는 격자 뚜껑이 덮인 시궁창이 주택 출입문 가까운 곳에 있어서, 거기에 쌓인 역겨운 오물에서 유독한 악취가 항상 흘러나온다.” 심지어 그의 모교가 있는 에든버러에도 ‘북부의 아테네Athens of the North’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낡아빠지고 쥐가 들끓는 건물들이 밀집한” 빈민가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인간의 비참함이 수두룩하게 펼쳐있다.
아궁이와 사냥터를 분리하려는 열망, 즉 건강한 곳에서 살고 수익이 가장 많은 곳에서 일하려는 열망은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런 분리는 증기력을 이용한 운송수단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기술 덕분에 가능해졌으며, 결국 통근의 꽃봉오리가 맺히고 머지않아 활짝 꽃을 피웠다. 이것은 ‘철도 문화locomotivity’라고 일컬어진 더 커다란 발전의 일부였다. 1830년대에 시작된 이런 발전은 향후 50년 동안 영국을 변모시키게 된다. 철도의 도래와 함께 이 나라가 분주히 움직이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철도는 사람이 아니라 화물을 옮기려고 건설되었다. 예를 들어 광산에서 생산한 석탄을 공장이며 도시로 운반하고, 지방에서 생산한 식량을 도시로 운반하고, 공장에서 생산한 옷감을 항구로 운반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철도가 개통된 1833년 이래 철도 운영업체들은 막대하고도 자발적인 여객 수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스톡턴-달링턴 철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는 원래는 더럼 주County Durham에 있는 여러 탄광과 스톡턴온티스Stockton-on-Tees에 있는 여러 공장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증기 열차가 도입된 1833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철도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개통 당일에만 무려 500명이 열차에 올라탔다. 그날 운행한 열차는 석탄 화차 21량과 객차 1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객차에는 적절하게도 ‘익스페리먼트Experiment(실험)’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기차를 따라왔고, 종착지에는 만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1838년에 이르러 스톡턴-달링턴 철도 노선은 매년 20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고, 여객 운임 수입이 화물 운임 수입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찬가지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도 본래 생生면화를 맨체스터로 운송하고 완제품을 리버풀의 부두로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업계의 큰손들이 굳이 철도 건설에 자금을 댄 것은, 오로지 운하에만 의존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운하 운영업체들이 과도한 이용료를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물이 꽁꽁 얼거나 여름에 가뭄으로 수위가 너무 낮아지면 운송이 아예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화물 전용 철도도 첫해에 4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며, 여객 운임 수입이 화물 운임 수입의 “두 배 수준에 달했다”.
하지만 때로는 철도 회사가 마지못해 승객을 태우는 경우도 있었다. 런던-사우샘프턴 철도London and Southampton Railway는 수도와 지방과 해안을 연결하며 연료, 생선, 소떼, 수입품을 실어 나르려는 의도로 건설되었지만, 윌리엄 제임스 채플린William James Chaplin의 간섭으로 인해 방향을 틀게 되었다. 채플린은 “역마차의 나폴레옹Napoleon of Coaching”으로 통하던 인물로, 그의 회사는 모두 64대의 역마차와 1,500마리의 말을 보유하고서 런던 발착 역마차를 매일 92회나 운행했다. 당시 그는 국가적 사업의 주요 운영자 중 한 명이었다. 역마차는 철도가 생기기 전 육로에서 유일무이한 장거리 여객 운송수단이었다. 영국은 광범위한 동시에 (영국의 내재적 한계를 고려할 때) 효율적인 연결망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여행자가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단 사흘 만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마차는 기차에 비해 속도가 느리고 크기도 작았다. 런던-슈루즈베리Shrewsbury 구간 역마차는 평균 시속 약 20킬로미터로 ‘경이의 역마차’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이처럼 화제가 될 만한 속도를 달성하려면 약 250킬로미터의 여정 동안 무려 150마리의 말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역마차 역시 대부분의 역마차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승객 8명과 수화물밖에는 운반하지 못했다. 채플린은 철도 개통으로 자기 사업이 망할 거라고 예견했다. 그래서 기존 사업을 매각하고 얻은 수익을 런던-사우스 웨스턴 철도에 투자했다. 그 대가로 그는 이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회사 운영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분적으로 완성된 노선에서 승객을 태우는 시험 운행이 실시되었는데, 1838년 더비 경마 개최일에 엡섬Epsom까지 열차를 운행한 것도 그러한 시험 운행 중 하나였다. 역이 문을 여는 오전 8시 전부터 런던 종점인 나인 엘름스Nine Elms에 5,000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후에도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 객차에 다 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급기야 “인파 속에서 여성의 비명이 들리더니, 군중이 예약 카운터를 뚫고 들어가 개찰구를 넘어 승강장으로 침입해 들어갔고, 다른 승객들이 예약해놓은 열차 안으로 무턱대고 몰려들었다.”
이 시험 운행은 비록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수익이 제법 쏠쏠했기 때문에 애스콧 경마Ascot races 때에도 반복되었다.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런던-사우스 웨스턴 철도는 하다못해 수소 한 마리, 석탄 한 자루도 운송하지 않고, 오로지 10만 명가량의 승객만 받았다. 1840년 런던-사우샘프턴 노선이 최초로 완공되어 영국 왕세자Duke of Cornwall가 참석한 가운데 악대 연주와 21발의 축포와 연회가 이어졌을 때, 채플린은 이 회사의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 행사를 기념하는 설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지식이 증대할 것이다”라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12장 4절을 토대로 했는데, 결국 여객 운송이 이 회사의 미래라는 그의 전망이 옳았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철도 열풍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런던 사우스 웨스턴 철도의 개통식과 비슷한 축하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연회, 깃발, 악대, 설교, 어린이 합창단이 동원되는 행사가 의무사항처럼 여겨졌다. 이 열풍이 절정에 달한 1846년에는 무려 294건에 달하는 의회 법안이 통과되어 서류상으로 거의 1만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새로운 철도의 건설이 예정되었지만, 실무를 담당한 업체 가운데 ‘선로 건설 기록track record’을 보유한 곳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열풍은 이듬해에 결국 사그라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투자자들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브론테 자매 세 명 가운데 두 명도 철도 주식에 손을 댔다가 예금을 날려버렸고, 전국 곳곳의 장원 저택과 목사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중산층에는 이보다 더 치명적인 공황이 없었다. (……) 주택은 집행관에게 모독을 당했다.
비록 손실이 크긴 했지만, 거품이 꺼진 뒤 철도 열풍이 남겨놓은 유형 자산도 없지는 않았다. 1840년대에 무려 9,500킬로미터 이상의 철도가 완공되었던 것이다. 이후 증기 열차는 영국 풍경에서 하나의 특징이 되었다. 요란한 색을 칠한 이 철 괴물들이 덜컹거리며 들판을 가로지르고, 언덕 속으로 사라지고, 강을 건너고, 불을 내뿜고, 짐승처럼 헐떡이고, 두 개의 허파를 가진 그 어떤 생물보다 빠르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너나없이 승차권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철도에 분개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철도 선로들은 영국의 국토뿐 아니라 계급체계에도 흠집을 냈으며, 철도 열풍이 지나간 뒤의 손실은 가뜩이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문지르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노샘프턴을 관통하는 새로운 노선에 반대하는 항의 집회에서는 철도가 “우리 지역을 망치고 우리 하인들을 버려놓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철도가 자연의 절경과 고대의 기념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에 지역을 망친다는 것이었고, 철도가 속박되어 노동에 종사하는 하인들에게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하인들을 버려놓는다는 것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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