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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보다 높이 솟은 산꼭대기에 일왕日王의 정원사였던 사람이 살았다. 전쟁 전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해가 뜨는 나라인 고국을 떠나 말라야*의 중앙 고산지대로 왔다. 언니에게 처음 그 정원사에 대해 들었을 때가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고, 그를 찾아 산으로 올라간 것은 10년쯤이 지나서였다.
그는 동족인 일본인들이 우리 자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빗줄기가 들이치던 아침에 처음 만났을 때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어떤 말이 내 고통을 달래고 언니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알았다. 그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금의 말레이시아
* * *
그날 아침 이후 36년이 흐른 지금, 다시 아리토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울림이 깊은 허허로운 목소리. 잠가놓은 기억들이 빙벽에서 얼음 파편 쪼개지듯 갈라지며 나오기 시작한다. 잠자는 동안, 갈라진 유빙들이 기억의 새벽빛을 향해 떠간다.
산의 고요가 나를 깨운다. 깊은 적막감. 유기리**에 살면 이렇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눈을 뜨면 집에서 웅웅 소리가 울린다. 전에 아리토모가 한 말이 기억난다.
“오래된 집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
**‘저녁 안개’라는 뜻으로 작품에서는 정원 이름으로 쓰인다.
집사인 아 청이 문을 노크하고 가만히 나를 부른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 가운을 걸친다. 두리번거리며 장갑을 찾다가 침대 협탁에서 발견한다. 양손에 장갑을 끼고 아 청에게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가 들어와서 협탁에 백랍 쟁반을 내려놓는다. 쟁반에 찻주전자와 파파야 접시가 놓여 있다. 집사는 매일 아침 아리토모를 수발하던 방식 그대로 내게 해준다. 그가 몸을 돌리고 말한다.
“은퇴하셨으니 오래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테오 판사님.”
“그래요, 내가 아 청보다 먼저 은퇴했네요.”
내가 알기로 그는 나보다 대여섯 살 연상이다. 엊저녁 내가 도착했을 때 아 청은 집에 없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기억 속의 그의 모습에 지금 보이는 모습을 겹쳐서 바라본다. 아 청은 키가 작고 단정하다. 기억하는 것보다 작다. 이제 완전히 대머리가 되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다.
“처음 나를 봤을 때를 생각하는군요, 그렇죠?”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모습을 생각합니다. 판사님이 떠나시던 날이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잇는다. “아 푼과 저는…… 저희 부부는 늘 판사님이 언젠가 돌아오시기를 바랐지요.”
“부인은 잘 계시지요?”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 청의 뒤쪽을 쳐다본다. 그의 부인은 내가 부르면 들어오려고 문간에 서서 기다릴 것이다. 부부는 타나라타***에 살면서 매일 아침 자전거로 산길을 달려 유기리로 온다.
***타쿠알라룸푸르에 인접한 캐머런 하일랜드 내의 지역으로 평편한 땅이라는 의미
“아 푼은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테오 판사님. 4년 됐습니다.”
“아, 맞아. 그랬지요.”
“아내는 판사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했어요. 병원비를 내주셔서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닫으면서,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이 어딘지 기억하려고 애쓴다. 병원 이름이 생각난다. 레이디 템플러 병원.
“5주네요.” 그가 말한다.
“5주라니요?”
“5주 후면 아리토모 씨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4년이 됩니다.”
“세상에, 아 청!”
나도 거의 그만큼이 지나서야 유기리에 돌아왔다. 아 청은 내가 이 집을 비운 세월에 따라 나를 평가할까? 아버지가 부엌 벽에 자식의 키를 눈금으로 표시하듯이.
아 청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딘가에 머무른다.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그가 몸을 돌리려 한다.
나는 좀 더 부드러운 말투로 말한다.
“오늘 아침 10시에 손님이 오기로 했어요. 오시면 응접실 베란다로 모셔주세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가 문을 닫는다. 그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랜 세월 아리토모의 시중을 들면서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긴 게 처음은 아니다.
파파야가 차갑다. 난 시원한 게 좋다. 파파야에 라임 조각을 짜서 즙을 뿌려 두 조각 먹다가 접시를 내려놓는다. 미닫이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낮은 기둥 위에 집을 지어서 베란다가 바닥에서 60센티미터 떨어져 있다. 대나무 발을 걷어 올리니 삐걱 소리가 난다. 산은 늘 기억하던 그대로다. 첫 새벽빛이 산의 옆구리에 쏟아진다. 풀밭에는 시든 잎과 부러진 잔가지가 축축이 젖은 채 잔뜩 널려 있다. 안채는 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정원 가운데서는 보이지 않는다. 울타리 한쪽이 무너지고 바닥에 깔린 널 사이로 풀이 높이 자라 있다. 이럴 거라고 짐작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유기리가 이 정도로 방치되다니, 충격이 크다.
울타리 너머 동쪽으로 마주바 차 농장의 일부가 보인다. 휑한 계곡은 마치 수도사가 축복을 구하느라 하늘을 향해 든 손바닥을 연상시킨다.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찻잎을 따는 일꾼들은 비탈에서 한창 작업 중이다. 간밤에 폭풍우가 쳤고, 산봉우리에는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나는 베란다에서 내려서서 폭이 좁은 타일 바닥에 발을 딛는다. 맨발에 닿는 촉감이 서늘하고 축축하다. 아리토모는 아유타야에 있는 폐허가 된 궁에서 이 타일을 구해왔다. 한때 고대의 이름 모를 왕궁에 깔렸던 타일들은 잊힌 왕국의, 역사가 망각에 묻힌 나라의 마지막 유물이다.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공중에 퍼진 내 숨결을 본다. 이 공기로 된 거미줄은 방금 전만 해도 내 몸속에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경이감을 느낀다. 지난 몇 달간의 피로가 몸에서 빠져나갔다가 얼마 후 내 안으로 다시 밀려온다. 이제 주말에 잔뜩 쌓인 항소장을 읽거나 문서 작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니 기분이 묘하다.
몇 차례 더 입으로 숨을 쉬면서, 정원으로 흩어지는 숨결을 지켜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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