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경제 문제
이 책에서 탐구하려는 주제와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곧바로 과거의 경제를 살펴보는 작업으로 들어가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주시기를. 경제사를 더듬어 올라가는 작업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는 먼저 경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또 먼저 경제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고, 또 경제의 문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 대답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경제학이란 모든 인간 사회에 나타나게 마련인 과정 즉 사회의 물질적 안녕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단순 명료하게 말한다면, 경제학이란 인류가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런 주제를 그것도 역사적으로 세밀히 살펴본다는 것이 그다지 흥분이 끓어오를 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역사”라고 불리는 것은 보통 엄청난 대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장관의 대행진이니,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조달했는가 따위의 소박한 문제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역사책을 펼쳐보면 권력과 영화榮華, 신앙과 광신, 사상과 이념 등 인간 연대기의 거창한 주제들이 쏟아지지 않는가. 비록 인간 생활의 원동력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는 소박한 노력에 있다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지만, 이는 어떤 철학자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라고 선전되어 온 국제적 범죄와 대량 학살의 역사”라고 부른 것의 뒤편에 꼭꼭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류가 밥만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밥을 못 먹으면 살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모든 생물들처럼 인간도 먹어야 하며, 이것이 존속을 위한 으뜸의 절대 법칙이다. 그런데 이 제1의 전제 조건은 보기와는 달리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 자체가 생존을 위해서 그다지 효율적인 장치가 못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100칼로리의 음식을 먹어봐야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기계적 에너지가 기껏 20칼로리에 불과하다. 제대로 먹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인간이 하루 종일 내놓을 수 있는 일이란 기껏 말이 한 시간 동안 하는 정도의 일과 비슷한 정도이다. 그리고 일을 한 뒤 지쳐버린 몸을 충전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 또한 그 남은 힘으로 조달해야 한다. 마음껏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단 그렇게 배를 채울 식량을 생산하고 남는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존속 자체가 불확실한 나라가 허다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륙에서, 근동 지역에서, 심지어 남미의 몇몇 나라들에서, 동물적 차원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아직도 맹수처럼 사람들의 면전에 버티고 서서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오랜 시간 동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이 그렇게 죽어간다. 매일의 삶에서 굶주림을 일상적인 조건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방글라데시에는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배부르다는 느낌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농민들이 있다고 한다. 많은 소위 저개발underdeveloped 국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미국인 평균 수명의 절반도 못된다. 그다지 옛날도 아니었다. 몇 년 전 인도의 인구학자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100명의 아시아 갓난아기들과 100명의 미국 갓난아기들을 비교해볼 때 미국 아기들 중 65세까지 살아남는 수보다 아시아 아기들이 5살까지 살아남는 수가 적다고 한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통계 수치를 살펴볼 때 우리를 기가 질리도록 압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통계가 아닌 영아 사망률의 통계이다.
개인과 사회
이로써 우리는 경제사의 탐구는 생존이라는 결정적 문제 그리고 인류가 그 문제를 해결해온 방법에서 출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대부분의 우리들은 경제학이란 자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라고 느끼게 될 것 같다. 우리들 중 계속 숨을 쉬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사투를 벌이는 그런 경험을 비슷하게라도 겪어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인도의 촌사람들과 볼리비아의 농투사니peon들이나 경험할 지독한 굶주림의 고통을 몸소 겪는다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파국적인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모를까 우리들 중 대부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의 의미를 뼈저리게 알게 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도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들이 비록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목도하는 순간에 우리는 아직도 생존의 문제가 우리 삶의 밑바탕에 그대로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오늘날 개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원시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부족들로 다가갈수록 이 개인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몇 배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누이트, 부시맨, 인도네시아나 나이지리아의 농부는 자기가 사용하는 연장만 지니고 있다면 홀로 남겨져도 상당한 시간 동안 생존할 수가 있다. 그들은 경작지나 사냥감과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기에 스스로의 삶 ─ 물론 여자들은 ‘스스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 을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몇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공동체들은 심지어 무한히 오랫동안 살아갈 수가 있다. 사실 오늘날도 인류의 상당한 부분은 바로 그런 방식 ─ 실질적으로 고립된 채 생존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외부 세계와 최소한의 접촉을 갖는 작은 농촌 공동체들을 보라. ─ 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심한 빈곤으로 고생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일정한 경제적 독립성을 누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그러한 독립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래전에 절멸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뉴욕 사람이나 시카고 사람을 살펴보면, 그 정반대 상황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들 대부분 일상의 물질생활은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에 지독하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대도시 지역에서는 방금 말한 홀로 사는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가 아무런 타인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상점이나 잡화점을 습격하여 음식과 생필품을 털어가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한 번도 곡식을 재배해본 적도, 사냥을 해본 적도, 가축을 키워본 적도, 밀가루를 빻아본 적도 없으며, 아마도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든가 자기 집을 짓는다든가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절망적일 만큼 훈련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자기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가 조금만 고장이 나도 우리들 공동체 내에서 자동차 수리나 수도관 수리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불러야 하는 판이다. 실로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지만, 아마도 어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그 평균적 거주자들이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생존하는 능력은 확실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노동 분업
물론 이러한 역설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대신 일을 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타인들이 무더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곡식을 재배할 수 없다면, 사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고용하면 된다. 이 엄청난 규모의 노동 분업을 거치게 되면, 우리의 능력은 천 갑절로 늘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의 기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술까지 갖추어 혜택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 장의 논의에서 이 노동 분업이라는 것을 중심적으로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이득에는 일정한 위험이 또한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한 예로, 1억 3천만 명의 노동력이 존재하는 미국의 경우 석탄과 같은 필수품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노동력의 수가 2십만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전체 비행 노선의 승무원들의 수는 훨씬 적다(약 6만 명). 온 나라의 철도 화물을 운송하는 기관차 운행 노동자의 수는 훨씬 더 적다. 이러한 소집단들 중 하나라도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간혹 지독한 파업이 벌어져서 경제작동의 요충지를 맡은 소수 ─ 심지어 쓰레기 수거반조차도 여기에 들어간다. ─ 가 맡은 바 작업을 중단하게 되면 경제라는 기계 전체가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적 풍요의 삶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취약성이 함께 따르게 되어 있다. 이 몇 개 사단 병력만큼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협력할 것으로 확신하여 의지할 수 없다면 우리가 누리는 풍요 또한 보장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계속 부유한 나라로 살아갈 것이라는 주장에는 현존하는 사회 조직의 메커니즘이 계속 효과적으로 기능해줄 것이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유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당연한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엮어 전체 사회로 만들어주는 유대가 끊어진다면 그 또한 사라져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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