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산촌자본주의’에서 ‘어촌자본주의’로
바다를 되살리는 ‘어촌’
슈퍼마켓 등에서 생선을 고를 때, 신경을 쓰고 있는가?
‘자연산’인지 ‘양식養殖’인지를.
‘양식’이 확연하게 좋아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신경 안 쓰게 되지는 않았는지? 실제로 표시가 없다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비롯한 물고기 양식장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틀림없이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물고기가 살고 있는 환경도 먹이도, 과거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양식스러움’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변해도 양식은 양식이다. ‘자연산’이 아니다. 어떻게 자연산에 가깝게 만들 수 없을까?
그래서 ‘이런 방법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양식용 그물을 찢어볼까?”
“말도 안 된다. 방어魴魚가 도망가버린다”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세토 내해는 거대한 ‘천연 수조’라고 말하고 있잖아?”
“그것은 그렇지만…” 나는 한 번 더 질문을 던진다.
“세토 내해 전체를 ‘수조’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방어가 살기 좋은 바다로 만들면 되잖아. 먹이가 풍부하고 오염이 없는, 알을 낳기에도 치어가 자라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장소가 많이 마련된 이상적인 ‘천연 수조’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곳에서 ‘키운’ 방어는 슈퍼마켓 생선코너에 진열되면 당당히 ‘자연산’으로 표시된다. 미식가도, 자연산을 최고라 여기고 화학물질이나 첨가물 같은 것들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도, 내 아이에게 안전한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는 어머니도, 일반인들도, 모두 “그 생선을 먹고싶다”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한 목표를 달성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를 기쁘게 만든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생선을 파는 사람도, 생선을 사는 사람도.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도, 여름휴가 때 해수욕을 가고 싶은 가족도.
그리고 이런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들을 우리는 ‘어촌’이라 부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양식 방어’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양식’이라는 단어에서 삭막한 풍경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바다에 펼쳐진 좁은 그물. 무엇인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물. 마치 점토처럼 보이는 인공 사료. 그 사료를 뿌리면 방어들이 우글우글 모여든다.
1970년대, 1년간 거의 300회의 적조가 발생했던 세토 내해는 더럽고 냄새나는 바다로, ‘죽음의 바다’라고까지 불렸다. 해수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눈앞의 바다는 ‘수영금지’가 되어버렸다. 바다로 철철 흘러드는 콤비나트kombinat*의 공업하수, 인구가 증가한 연안 도시에서 흘러드는 각종 생활하수, 그리고 ‘양식 방어’.
바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인간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면 언제나 바다는 오염되었다.
그 바다가 ‘어촌’에 의해서 되살아났다.
바다에 씨를 뿌리는 어부들
물고기가 첨벙 뛰어올랐다가 퐁당 하고 돌아간다.
거울처럼 파도 한 점 없는 바다 위를 조용하게 달리는 작은 배 밑에는 푸른 ‘바다 숲’이 가득하다. 살랑살랑 잎사귀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잎사귀가 수면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한층 더 시원하게 느끼게 해준다.
초여름 아침의 세토 내해, 오카야마 비젠시岡山 備前市의 히나세日生라는 항구 근처. 실은 바다 숲은 오랫동안 거의 사라졌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5~6년 사이 단숨에 부활했다고 한다.
숲의 정체는 ‘잘피’라는 해초이다. 볏과에 가까우며 씨로 번식한다. 수중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서 왕성하게 광합성을 하기 때문에 바닷속 산소의 공급원이 되기도 한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보자. 잎 그늘 속에 다양한 물고기 새끼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 새끼 농어, 새끼 볼락. 이곳은 ‘바다의 요람’이다. 잘피 잎의 뿌리 부분 주변에 알이 붙어 있다. 갑오징어의 일종이다. 투명한 알 속에는 물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의 귀여운 새끼 오징어가 보인다.
히나세 어부에 의하면, 갑오징어의 일종은 바다의 오염이 심했던 무렵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랬던 것이 역시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잘피 숲의 부활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저절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자그마치 30년에 달하는 어부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히나세의 어부는 바다를 보호하고 가꾸는, 말하자면 바다 ‘지킴이’이다.
태평양전쟁 이후의 고도경제성장시대, 세토 내해는 ‘적조의 바다’가 되었고 마침내 물고기가 과거의 절반밖에 잡히지 않게 되었다.
어부들은 사라져버린 잘피 숲을 자신들의 손으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잘피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농부들처럼.
그것은 바로 ‘산촌’의 상수리나무 숲이나 논밭을 가꾸는 ‘지킴이 농가’와 같은 일이다. 상수리나무가 크게 자라면 밑동을 남기고 잘라서 표고버섯을 기르는 ‘버섯나무’** 등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버섯나무는 산속에서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상수리나무의 밑동에서는 다시 줄기가 자라난다. 흙의 영양분을 빨아들이면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뿜으면서. 산의 생명은 농가의 손을 빌려 물질을 순환시키면서 언제까지나 그 상태를 유지한다.
장수풍뎅이도 그 순환의 일원이다. 애벌레 시절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도중의 버섯나무’를 먹으며 자라고, 성충이 되면 상수리나무의 수액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소년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놀이 상대가 된다.
동일한 광경이 히나세의 바다에서 반복된다. 초여름, 물속에서 잘피가 씨를 살찌우고 있을 때를 노려서 어부는 ‘씨 따기’를 한다. 그리고 바다 속에 4개월 정도 매달아놓고 성숙시켜서 가을에 ‘씨뿌리기’를 한다. 해저에서 싹을 틔운 씨는 바다 숲이 된다.
바다 숲의주민 중에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해마도 있다. 밤에 수중카메라 앞을 ‘우주유영’을 하는 것처럼 헤엄치면서 먹이인 작은 새우를 쫒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우아하다.
그러나 세토 내해가 ‘적조의 바다’였을 때는 오염 때문에 물의 투명도가 낮아서 좀처럼 해저까지 빛이 닿지 않았다. 잘피 씨가 힘들게 싹을 틔워도 금세 시들어버렸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굴뗏목’을 끌고 온다. 굴에게는 바닷속 플랑크톤을 먹인다. 양식하는 굴뗏목에서는 인공 사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굴은 적조의 원인이 되는 질소나 인 등, 이른바 물속의 ‘부영양화물질’을 먹고 자란 플랑크톤을 열심히 먹어치운다. 그래서 굴은 ‘천연의 여과장치’이다.
어부는 잘피도 굴도 활용한다. 바다의 생명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여겨보고 관리한다. 그렇게 하면 바다는 보답을 해준다.
바다와 사람의 ‘상부상조 관계’, 그것이 ‘어촌’이다.
(본문 중 일부)
* 서로 관련이 있는 몇 개의 기업을 결합하여 하나의 공업 지대를 이루어 생산 능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기업 결합을 말한다.
**버섯 재배에서 버섯 균이 퍼져 있는 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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