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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 사회적 선악의 중개자
자연재해는 선한가 악한가? 누구나 답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 재난은 지독히도 가혹하며 끝 모를 정도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나쁜 영향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 전 세계적으로 재난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진보를 이루기 훨씬 더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경제적 자원을 교육, 보건 체계, 법 제도와 같은 사회 진보에 필요한 기관과 구조를 만드는 데 쓰지 못하고 피해 복구에만 계속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조 기금이나 세계은행World Bank 기금 등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사회 진보를 위해 투자하기보다는 그동안 하던 식의 복구를 약간 더 근사한 형태로 계속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가 생각만큼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연재해가 끼치는 선한 영향과 나쁜 영향이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재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국제연합과 각 국에서 지원하는 수많은 기관, 셀 수 없이 많은 비정부기구NGO들이 대대적이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재난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재난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 위험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이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발생한다. 작은 섬나라 같은 소규모 국가는 나라 전체가 재난 취약 지역이다. 인간은 작은 규모의 재난 피해는 막을 수 있고, 중간 규모의 재난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규모로 덮쳐 오는 자연의 변덕은 인류가 가진 역량을 모두 끌어낸다 해도, 당분간은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재난은 다 똑같이 나쁘기만 하다는 생각은 즉각적,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시스템 사고에 한해서 타당하다. 주변이 온통 파괴되고 수천 명이 희생당하는 현장은 확실히 비극적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아닌 한 죽음과 파괴를 좋게 보기는 어려우니 당장에는 재난을 나쁘게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장기적인 영향을 살펴보면 이는 그렇게 단언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정밀한 방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자연재해가 나쁜 일이라고 증명하기는 놀랄 만큼 어렵다.
재난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미묘한 사회경제적 과정은 (사회복지 수준을 드러내는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이하 GDP〕과 오늘날 경제학자와 정치학자가 크게 의존하는 계량경제학상의 통계 도구를 활용해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자연재해가 좀처럼 달리 볼 수 없는 뚜렷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몇 안 되는 계량경제학계의 연구 결과들은 모순적이다. 재난은 경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한편, 죄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자료도 있다. 일부 재난은 일부 조건하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물도 있고(예를 들어 홍수는 이로운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모든 재난이 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현재 사회과학자 대다수는 가능하면 무작위 통제 실험RCT: Randomized Control Trial을 통해 연구의 근거를 마련한다. 무작위 통제 실험은 애초에 신약新藥 실험에서 실험군(약을 복용한 집단)과 대조군(가짜 약을 복용한 집단)의 실험 결과를 비교하는 과정 가운데 개발된 방법이다. 그렇기에 이 방법을 자연재해에 활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즉 자연재해가 일으키는 피해를 엄밀하게 측정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현대 사회과학이 사용하는 도구가 이 문제를 풀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GDP로는 사회의 진보를 제대로 측정할 수가 없다(이런 까닭으로 GDP는 노벨상 수상자인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뛰어난 경제학자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특히나 재난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가난한 지역일수록 GDP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서구와 달리 가난한 나라 경제의 상당 부분은 고용주에게 급여를 받는 노동자의 생산이 주가 되는 형태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런 비공식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세금을 걷을 수가 없을뿐더러,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GDP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사회과학의 방법이 무용지물이라면, 재난이 죽음과 파괴라는 눈에 보이는 피해 외에 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재난은 과연 어떻게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계량경제학상의 분석 결과를 지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사례나 반증 자료 역시 수없이 찾아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태풍,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을 겪으면서도 최근까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근거로는 재난이 일본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거나, 하도 자주 겪다 보니 일본인들은 재난을 재빨리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분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일본 경제가 후퇴하는 것은 파멸적인 경제 정책과 인구 감소 및 노화, 그 밖의 여러 요소 때문이지 자연재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011년 무시무시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도, 모두들 일본 경제가 전 세계에 큰 파장을 끼치며 붕괴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실제 일본 경제는 후퇴하지 않았다. 지금 일본 경제가 허약하고 언제까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이와 상관없는 문제다.
칠레는 비록 태풍은 아니지만 일본 못지않게 수많은 재난〔대표적으로 지진〕을 겪고 있으면서도 중남미 국가 가운데 가장 부유하다. 지진이 태풍보다 감당하기 더 수월해서일까? 아르헨티나에서는 몇 차례 매우 파괴적인 지진이 발생한 것 외에 다른 재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수십 년째 경제가 후퇴하고 있다. 2010년 이전까지 아이티에서는 200년 동안 심각한 지진이 단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중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데다 다른 나라들과의 격차도 매우 크다.
반대로 산업혁명 발생지인 서유럽은 상당히 안전한 지역이다. 홍수가 나지도 않고 허리케인이나 심각한 가뭄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지진이나 초강력 폭풍에 취약한 지역이었다면, 발전소와 공장을 가동하고 산업혁명을 이루어 내기까지 인류의 복지를 향상시켜 준 석탄을 채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자연재해를 두려워하는 미국인 사이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진 지역이다. 디트로이트가 아니라 토네이도 앨리Tornado Alley*라든지, 지진 또는 홍수가 빈번한 지역에서였다면 자동차 산업이 그렇게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쇠퇴와 파산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와 여타 경제적 요인 때문이지 자연재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미국의 경제·문화적 수도인 뉴욕의 경우, 며칠씩 도시를 마비시키는 겨울 폭풍이 몰아치곤 하지만 전반적인 기후는 상당히 온화하다.
* 대기가 불안정해 토네이도가 자주 발생하는 미국의 중부 평원 지역. 텍사스 주, 오클라호마 주, 캔자스 주를 포함한다.
일부 계량경제학 연구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재난을 통해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2002년 마크 스키드모어와 히데키 토야는 〈이코노믹인콰이어리〉에 ‘자연재해가 장기적 성장을 촉진하는가?’라는 매우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게재하며 이런 발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계량경제학의 기본 기법을 이용해 홍수와 허리케인 같은 기상학적 재난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즉 기후 재난은 경제적으로 이로우며 규모가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들이 논문에서 “장기적” 효과를 다루었다는 점과 수년에 걸쳐 수많은 나라의 경제적 성장을 연구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재난 이후 재건 단계에서는 주로 건설 산업이 경기 부양 혜택을 받는다(직접 피해를 입은 재난 발생 지역 내부의 산업은 혜택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그 효과는 지속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재난의 긍정적 결과에 대한 설명은 1939년부터 1946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다소 부드러운 어감을 가진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산업적 돌연변이industrial mutation”라고 칭하면서, “경제 구조를 안에서부터 끊임없이 변혁하고,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실제 슘페터의 연구는 재난보다는 새로운 산업에 대한 것으로, 재난이 언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창조적 파괴의 사례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개인 컴퓨터의 등장이다. 개인 컴퓨터 산업은 기존의 주요 컴퓨터 회사에 타격을 주고, 일부를 퇴출시키기까지 했다. 즉 새로운 산업은 기존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기존 산업에 해를 끼친다.
창조적 파괴의 광풍이라고도 불리는 슘페터의 이론 속 개념을 재난 분석에 적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새로운 산업 혁신이 기존 산업을 파괴한다는 구도를, 재난이 낡고 비능률적인 자산을 파괴하고 더욱 새롭고 생산적인 자산이 발달할 환경을 조성한다는 구도로 대치하면 된다. 기존의 자산은 새롭고 더 나은 자산으로 바뀐다. 재난은 기술 개선을 이끌어 내 수많은 산업과 경제 전반에 혜택을 준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더 나은 삶으로 데려다 줄 광풍에 올라타는 사람은 누구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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