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우리는 왜 언어에
상처를 받는 걸까
우리가 언어에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때 언어에 어떤 행위능력agency을 귀속시킨다. 즉 언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권력을 귀속시킨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언어가 상처를 주게 되는 그 궤적의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우리는 언어가 행위한다고 주장하고, 언어가 우리에 맞서 행위한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하는 이 주장은 지나가버린 사례의 힘을 저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추가적인 언어의 사례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힘에 저항하고자 할 때조차 언어의 힘을 행사하게 된다. 어떠한 검열로도 돌이킬 수 없는 곤경에 휘말리면서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즉 존재하기 위해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언어에 취약vulnerability하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의 용어들 내에서 구성된 그 결과 때문인 것은 아닐까? 만일 우리가 언어 내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그 형성적인 권력은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어떤 결정에도 선행하며 그것에 조건을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의 권력을 통해 우리를 처음부터 모욕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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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욕insult은 특정한 시간성을 띤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우리가 알게 되는 최초의 언어적인 상처injury 중 하나다. 그러나 모든 이름 부르기/욕하기name-calling가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또한 언어 내에서 주체가 구성되는 조건 중 하나다. 이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호명interpellation’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제공하는 예시들 가운데 하나다. 상처를 줄 수 있는 언어의 권력은 언어의 호명적인 권력으로부터 따라 나오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언어적 행위능력은 언어에 취약하도록 만드는 이 장면으로부터 어떻게 출현하는가?
상처를 주는 말injurious speech에 대한 문제는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가, 어떤 재현물들representations이 모욕을 주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발언되고 발언될 수 있는 명시적인 언어의 부분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언어적인 상처란 누군가에게 전달된 말뿐 아니라 전달되는 방식 그 자체, 즉 주체를 호명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기질이나 관습적인 태도─의 효과인 듯하다.
사람은 자신이 불리게 된 그 이름으로 단지 고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처가 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폄하되고 비하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또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존재existence가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부름을 발생시킨 과거의 목적을 넘어서는 언어의 새로운 시간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만일 전달받는 것이 호명되는 것이라면, 모욕적인 부름은 그 모욕적인 부름에 반박하고자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어떤 주체를 언어 속에 도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말을 전달하는 것이 상처를 줄 때, 그 전달은 자신이 상처를 입히는 자를 향해 자신의 권력을 작동한다. 이 권력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권력의 충돌 지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존 랭쇼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은 어떤 발언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 즉 발언의 수행적인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적인 말의 상황total speech situation’ 내에 그 말을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전체성의 범위를 한정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없다. 오스틴의 견해에 대한 검토는 그 같은 어려움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한다. 오스틴은 ‘발언내적illocutionary’ 언어 행위와 ‘발언효과적perlocutionary’ 언어 행위를 구별한다. 발언내행위는 말하는 순간에 말하는 것을 행하는 언어 행위이다. 발언효과행위는 어떤 효과들을 자신의 결과로 생산하는 언어 행위이다. 즉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어떤 효과가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발언내적 언어 행위는 그 자체로 자신이 야기하는 행동이지만, 발언효과적 언어 행위는 그 언어 행위 자체와는 같지 않은 어떤 효과들로 단지 이어질 뿐이다.
발언내행위의 경우 전체적인 언어 행위에 대한 한정은, 발언의 순간에 어떤 관습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것들을 적용하는 사람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적용되는 상황은 올바른가에 대한 이해를 의심할 여지 없이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발언내행위적인 발언이 가정하는 ‘관습’의 종류를 어떻게 한정할 수 있을까? 그 같은 발언은 말하기의 순간에 말하는 것을 행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관습적일 뿐 아니라 오스틴의 표현대로 “관례적ritual이거나 의례적ceremonial이다.” 그것들은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관례의 형태를 부여받는 한에서만 발언으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발언 그 자체의 순간에 한정되지 않는 작동 영역을 지니고 있다. 발언내행위적 언어 행위는 발언의 순간에 행동을 수행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의례화되는 만큼, 절대로 그저 개별적인 순간이 아니다. 의례내에서의 그 ‘순간’은 압축된 역사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그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는, 말의 사건을 구성하고 이를 벗어나는 인용의 효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발언내행위의 힘을 인식하는 것은 언어 행위의 ‘전체적인 상황’이 규명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오스틴의 주장은 근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만일 의례로 여겨지는 언어적인 관습의 시간성이 발언의 사례를 넘어선다면, 그리고 그 초과가 완전히 포착될 수 없거나 확인될 수 없는 것(발언의 과거와 미래는 어떠한 확실성으로도 서술될 수 없다)이라면, 무엇이 ‘전체적인 말의 상황’에 해당하는가의 한 국면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례들의 그 어느 것에서도 전체적인 형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언어 행위의 효과를 어떻게 최선으로 판단하는가를 알기 위해, 문제의 언어 행위에 대한 적절한 맥락을 찾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의 상황은 따라서 단순한 종류의 맥락이 아니다. 즉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경계들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맥락의 상실을 겪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가 되는 언어 행위에 대해 예상치 못한 것이 그것의 상처를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상처가 자신의 수신인을 통제 불능으로 밀어 넣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상처를 주는 말을 전달받는 그 순간, 언어 행위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위태롭게 된다. 상처가 되게끔 말을 전달받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로 열리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상처의 시간과 공간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결과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순간에 노출되는 것은 바로 화자 집단 내에서 누군가의 ‘장소’가 휘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언어에 의해서 ‘그 장소’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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