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규방에서 탄생한 군자
– 조선 시대와의 숙명적 만남
남자가 ‘장가를 드는’ 시대
조선은 1392년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계층에 의해 건국되었다. 새 왕조인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를 뒷받침한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표방하며 고려와는 다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취했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사상적 경향은 고려 시대의 국교였던 불교를 비판하고 배격하면서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性理學을 이념화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 안향安珦, 1243~1306에 의해서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 사회에서 더욱 깊이 있게 발전하여 지배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성리학은 국가의 모든 제도적 질서를 재편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일에서부터 피지배층의 일상생활에 규범을 제공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석구석을 새롭게 비추고 규율하는 사회 원리였다.
이렇듯 성리학 사상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철저하게 성리학의 지배를 받았으며, 교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문화가 사회 전반을 이끌어 왔으므로, 유교 문화가 정착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특히 성리학의 우주관에서는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일정한 위계질서를 지키며 각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우주관은 인간세계에까지 적용되었고, 한 사회 안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위계질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유교의 이상으로 정의되었다.
삼강三綱은 한나라漢의 무제武帝, 기원전 140~기원전 87가 유학을 국시로 삼은 후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기원전 104가 유학의 음양 이론을 받아들여 성립된 윤리 규범이다. 동중서는 『춘추번로春秋繁露』 「기의基義」편에서 하늘天과 땅地을 임금과 신하에, 양陽과 음陰을 남편과 아내에, 봄春과 여름夏을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비유하면서 이를 왕도王道와 결부시켰다.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관계를 양존음비陽尊陰卑 사상에 따라 양은 남성을, 음은 여성을, 위와 아래의 존비尊卑 관계로 정하여 종속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윤리는 당시의 전제군주권, 가부장제적 부권, 남존여비에 입각한 남편의 절대적 권위 등을 반영하여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삼강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그리고 부부夫婦 간의 관계를 이르는 말로, ‘임금은 신하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군위신강君爲臣綱, ‘아버지는 자식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위자강父爲子綱, ‘남편은 아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다분히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조선의 경우도 유교가 도입되고 그것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삼강의 수직적 윤리가 체제를 지탱하는 기틀이 되었다.
오륜五倫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의 도리를 이르는 것으로,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며 『맹자』에 연원을 둔 말이다. 삼강에 장유長幼 즉 연장자와 어린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붕우朋友 즉 친구 간의 관계를 더한 것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군신유의君臣有義,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부부유별夫婦有別,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붕우유신朋友有信, 이 다섯이 바로 오륜이다.
삼강오륜 가운데 조선 여성들의 삶과 가장 관계가 깊은 덕목은 부위부강夫爲婦綱과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다. 오륜의 부부유별에서 뜻하는 유별은 삼강의 부위부강처럼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상의 구분을 말한 수평적인 개념이었으나 삼강과 오륜이 합쳐지면서 부부유별은 부위부강처럼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개념으로 바뀌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유별의 개념에는 종속적인 여러 가지가 포함되나 주로 여성이 거하는 주거 공간뿐만 아니라 여성이 하는 일도 철저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부부유별의 빗나간 가르침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의 폐단을 낳았고, 후에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는 곡해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의례儀禮』 상복 편에 나오는 말로,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를 뜻한다. 세 가지 도리란 여자는 어려서는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 이념이었으며, 이 삼종三從의 교훈은 실로 여성의 생애를 지배하는 근본 관념이었다. 또한 일단 출가하여 남의 아내가 되면 그 남편을 좇을 뿐 아니라 시부모를 섬기며 가사 잡무에 헌신하고, 때에 따라서 관혼상제의 예절을 다하는 것이 부녀자의 의무였고, 아들을 생산하는 일 또한 최상의 의무였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중국 고대로부터 발전한 유교적인 예교禮敎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는 일곱 가지 이유를 뜻한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 부정한 행위를 한 경우, 질투하는 경우, 좋지 않은 병이 있는 경우, 말이 많은 경우, 도둑질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조선의 위정자爲政者들은 이러한 삼강오륜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세종 16년1434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반포하였다.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명에 의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이다.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내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은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다. 충忠, 효孝, 정貞의 삼강이 조선 시대 사회 전반에 걸쳐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그러나 『삼강행실도』는 반포된 후 백여 년 사이에 『열녀도烈女圖』, 『효자도孝子圖』와 함께 다섯 번 이상이나 빈번히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장려의 측면도 물론 있었겠지만, 반대로 그 당시 불교적 유습에 젖어 있었던 각 가정에서는 ‘삼강오륜’의 정신이 아직 철저하게 수용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 조선의 새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하여 삼강오륜을 교화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오랜 풍습을 짧은 시간에 변화시키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혼인 풍습이나 재산 상속, 제사봉사祭祀奉祀 등에서도 고려 시대 이후 16세기 후반까지 여성들의 삶의 형태는 고려 시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대였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남녀칠세부동석이니,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니 하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17세기 중엽 이후에 정착된 것이다.
그 당시 대표적인 혼인 풍습으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시행되고 있었다. 남귀여가혼의 혼인 풍습은 고대부터 있어 온 우리의 일반적인 혼인 풍속으로 기록상으로는 그 기원이 고구려의 서옥제婿屋制에서 비롯된다. 서옥제란 여자 집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 혼인할 딸 내외를 살게 하는데, 그들이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사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제도였다.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장가가다’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사임당이 혼인 후에도 친정에서 20여 년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사임당이 딸만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이러한 남귀여가혼 풍습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초기에 위정자들은 유교적인 덕화德化의 일환으로 남귀여가혼 대신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던 친영제도親迎制度를 실시할 것을 권장하였다. 친영제도란 남귀여가혼과 반대로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온 다음 신랑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제도이다. 유교 이념을 국가의 기본 방침으로 채택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2)과 권근權近, 1352~1409 3)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지되어 시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무엇보다 새로운 제도를 주장한 양반 사대부들조차 냉담한 태도를 보여 사회 전반적으로는 보급되지 못하였다. 일반 백성들도 이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친영제도는 환영받지 못한 채 잊히게 되었다.
그 후 명종 때부터 반친영제도半親迎制度가 도입되었다. 반친영제도는 남귀여가혼과 친영제를 절충한 것으로 예식은 처가에서 거행하지만 처가에서의 체류기간을 줄여 3일 만에 친영례를 거행하는 제도로 조식曺植, 1501~1572 4)이 주자가례 원형대로 친영례를 실시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만들었다. 이런 반半친영제도가 16세기 이후 점차 보급되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남귀여가혼의 풍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남성들과 대등했던 여성들의 지위도 남귀여가혼의 풍습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아직 성리학적인 사회질서가 확고히 정착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유교의 종법적인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않아서 남자가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도, 아버지 신명화도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에 따라 처가살이를 하였던 것이다.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아니어서 후손이 없어 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한다. 조선 후기 ‘칠거지악’ 중 하나인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나는 경우’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은 유교적 제도보다도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관습이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시기였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과 딸은 차별받지 않았다. 남녀, 형제 구분 없이 균등하게 배분되었음도 16세기 조선 사회의 특징이다. 하물며 출가한 여성도 똑같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적장자차등상속嫡長子差等相續이 아닌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문제에서도 남자 형제와 똑같이 상속받은 여성의 재산은 그가 혼인한 후 남편 혹은 시가媤家의 재산으로 흡수되지 않고 부인의 재산으로 존속되었다. 또한 그 부인이 자녀가 없이 죽게 되면 부인의 재산은 시가媤家의 재산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친정 재산으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재산을 쥐고 있던 여성들은 절대 홀대 받지 않았다.
또한 제사를 모시는 방법에는 아들, 딸이 돌아가며 부모의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오랜 풍습이었다. 자녀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니 딸과 사위가 제사에 참여함은 물론이고, 그의 자식들인 외손도 제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외손봉사外孫奉祀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외손봉사란 유교적 종법제도에 의한 친손봉사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행해지던 제사 잇기의 한 방식으로, 직계비속의 대가 끊겨 더 이상 친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잇게 하지 못할 경우, 딸의 남편이나 자손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한 풍습이다. 자녀균분상속으로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었던 때, 대개가 처가 쪽으로 옮겨 가서 한마을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외손이 외조부모와 동거하는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풍습이었다. 외손봉사 또한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 사회로의 변화과정 중 나타난 우리 고유의 풍습 중 하나이다.
사임당의 가문도 외손봉사의 사례를 잘 보여 준다. 오죽헌烏竹軒은 연산군 때 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지냈던 최응현崔應賢, 1428~1507의 집이라 전해진다. 강릉 조산에 살던 최응현이 북평촌으로 이거하면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응현의 북평촌 집오죽헌은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외동딸 용인 이씨에게로 이어졌다. 그 후 용인 이씨의 외손인 권처균에게 상속되어 지금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이 다섯 명의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남긴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외손자 율곡에게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노비 전답을 주었고, 또 다른 외손자 권처균에게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강릉 북평촌 기와집 한 채와 노비 전답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외손자가 제사를 받들고 묘소를 살피는 일은 이상할 것이 없는 우리의 오랜 풍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두어 제사를 지내도록 한 제도는 17세기 이후에 일반화되었고,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장자, 즉 큰아들이 제사를 모시는 장자봉사長子奉祀가 정착되었던 것이다. 장자봉사의 정착과 함께 재산 상속권에 있어 처음에는 딸들이 제외되었고, 그 다음엔 장자 이외의 아들들이 제외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장자봉사와 장자상속권이 굳건히 확립되어 그 전통이 근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본문 중 일부)
─
1) 이은식, 『여인, 시대를 품다』, 도서출판 타오름, 2010, p.125
2)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3) 권근의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도전과 함께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이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건국 후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등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4) 조식의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당대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