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예술이
뭐지?
예술을 생각하기 전에…
저는 꽤 오랫동안 대학에서 대중예술론 수업을 했는데,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문제를 던져 놓고 이야기 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다음의 내용이 적힌 시험문제를 일단 배포하고요.
■ 다음 중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가려내 보고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대중가요 <남행열차>
TV 뉴스 프로그램
한겨레 그림판:한겨레신문 1컷 시사 만화
판소리 <춘향가>
장타령:품바타령
발레 <백조의 호수>
마루운동
각 항목이 예술이라 생각하면 O, 아니라고 생각하면 X를 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간단하게 메모하라고 합니다. 10~20분 정도 시간을 주고 써 보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도 한번 풀어 보실래요?
첫 수업 시간부터 시험지를 돌리고 무엇을 쓰라고 하니, 학생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하지만 이게 시험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키지요. 이건 그냥 써 보기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각자 쓴 답안지를 걷어서 채점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데 왜 시간을 주고 쓰게 하느냐고요? 그렇게 안 하면 학생들이 토론을 잘 안 하니까요. 일단 자신의 답안지에 뭐라고 끄적인 것을 놓고,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대학생들한테 뭐 그런 걸 시키느냐고요? 옛 속담에 ‘안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지요. 초·중·고등학교 12년 내내 소극적 태도로 주입식 교육만 받아 온 학생들이, 대학생이 됐다고 갑자기 적극적으로 토론하지는 않거든요. 특히 아직 고등학교 때의 습관이 남아 있는 대학 1~2학년 학생들은, 선생과 눈빛으로 호응하면서 강의 듣는 습관조차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귀는 열어 두었는지 모르지만, 손으로 딴짓하거나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선생을 바라보지요. 나이가 훨씬 많은 일반인 대상의 인문학 특강을 해 보면, 수강생들이 아주 적극적인 눈빛으로 호응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톡톡 튀는 젊은 감성을 지닌 대학생들의 학교 수업에서는, 선생의 말을 적극적으로 따라가면서 함께 생각을 모아 가는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남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따라가는 것, 일단 그게 되어야 거기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고, 그래야 토론이란 걸 할 수 있고, 또 남의 말을 들으면서 메모하고 필기하는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요즘은 대학 강의에서 점점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강의하거나 아예 강의안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인터넷으로 배포하니, 학생들은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요약하고 필기하는 능력도 점점 떨어지는 추세입니다. 어느 교수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 판서板書해 주세요!”라고 요구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더라고요. 중학생도 아니고, 판서라니요! 강의를 요약하여 필기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잖아요.
잘 듣는 것, 그리고 함께 생각하는 것. 이것을 하기 위해, 저는 거꾸로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말하고 토론하게 합니다. 말을 하려면, 그 시간만이라도 뭔가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하니까요. 특히 강의 시작 후 몇 주 동안은 그렇게 합니다. 대중예술론 같은 인문학 강의는,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사유 과정이 중요하니까요. 그건 제가 하는 말의 과정을, 계속 함께 생각하면서 따라와야 하는 거지요. 인터넷에 무진장 들어 있는 단순 지식을 대학 강의실에서까지 반복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적극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답을 쓰되, 학생들이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 O/X형으로 쓰라고 합니다. 일단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O, 아니라고 생각하면 X를 쳐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를 간단하게 메모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라고 시킵니다. O/X로 쓰라고 했으니, 찬반 토론을 붙이기가 아주 편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적극적 사유를 부추기기 위해 제가 짜낸 일종의 꼼수지요.
그런데 문제의 항목을 보십시오. 아, 만만찮습니다. O/X 문제니까 부담 없이 뭔가를 끄적거리기는 하는데, 이건지 저건지 고민되는 항목이 많습니다. 학생들 얼굴에 고민의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일단 성공입니다. 뭔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이런 문제에 정확한 답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기준에 따라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답을 하는 ‘논리적이고 타당한 근거’입니다. 다른 답을 하는 사람끼리 그 근거를 놓고 토론해 보자는 것이, 이 문제 풀기의 취지죠. 그러니 ‘선생이 원하는 답이 뭘까?’를 고민하지 말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뭘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항목을 훑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토론은 ‘내가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즉 자신의 예술관을 점검하기 위한 토론입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딱딱하고 어려운 개념들로 이야기하면 머리에 쥐가 날 테니까, 일단 익숙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 보자는 거지요. ‘○○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 즉 정의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쉽지 않습니다. 그 대상을 잘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명하면서도 추상화된 말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과’라는 과일을 다 알고 있지만, ‘사과’를 정의하라고 하면 아마 쩔쩔맬 겁니다. 대신 여러 과일을 모아 놓고, 사과와 사과 아닌 것을 나누어 보고,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뜻밖에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도 그렇게 부담 없이 쉽게 접근해 보자는 겁니다.
예술에 기준이 있을까?
이제 첫 항목부터 시작해 봅시다. 첫 항목인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쉽게 의견이 일치합니다. 가끔 ‘예술이 아니다’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는 학생이 있긴 합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감동하지 못해서’라든가 ‘연극을 잘 만들었으면 예술이고 잘 만들지 못했으면 예술이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견은 그대로 존중하며 논의를 진행합니다. 예술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자신의 감동 여부라면 그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알려 주고, 작품의 질이 기준이라면 ‘잘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거지요.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선 의견이 꽤 갈립니다. 대중가요 <남행열차>정혜경 작가, 김진룡 작곡, 1986, 과연 이것은 예술일까요, 아닐까요?
일단 이 질문을 받는 즉시 독자 여러분의 머릿속은 ‘고상하지 않다’, ‘우아하지 않다’, ‘저속하다’, ‘품격이 없다’ 등의 말이 맴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 버리면, 예술은 고상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고, 요즘처럼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에 ‘고상’, ‘우아’, ‘저속’ 같은 기준을 들어 편견을 가지는, 일종의 자기검열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히 말로 꺼내 놓지는 못하고 목에서 꿀꺽 삼킵니다(제가 나중에 “솔직히 말해 <남행열차>가 너무 없어 보였다고 말하고 싶었죠?”라고 하면, 다들 까르르 웃으며 시인합니다). 대신 좀 더 객관적인 근거를 내놓아야 하지요. 그렇게 머리를 굴려 노력한 결과로 내놓은 답변은 이렇습니다.
- 너무 쉽다
- 절제감이 없다
- 별 내용이 없이 그저 오락적이어서 즐기고 나면 여운이 없다
- 돈벌이라는 예술 이외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 예술은 오랜 수련을 거쳐 얻어지는 전문적인 영역의 것인데, 이것에는 그런 전문적인 완성도가 없다
반면에 ‘예술이다’라고 의견을 내놓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근거는 이런 것들입니다.
- 내용이 없는 게 아니다. 사랑의 슬픔을 노래했다
-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신이 나도록 움직인다
- 음악과 가사로 이루어진 형태가 어쨌든 노래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래는 예술에 속하는 것이다
양쪽 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이제야 팽팽한 논쟁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왔으니, 한 가지씩 논리 대결이 필요합니다. 잠깐 옆길로 새는 감이 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토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토론하자고 하면 학생들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의 논리를 공박하길 꺼리지요.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토론을 끝내고 싶어 합니다. 논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인데 말이지요. 의견 차이가 생기는 논점은 뭐고, 타당성은 어떠한지를 따지는 게 토론의 핵심이니까요.
물론 이해는 됩니다. 남 기분 나쁘게 하는 것, 심지어 학점 받아야 하는 수업 시간에 다른 동료를 궁지에 빠뜨리는 상황이 불편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과정을 겪어야 논리력이 향상합니다. 논리 싸움이게 바로 ‘논쟁論爭’이지요도 싸움인지라 창피하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심리적 후유증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을 더 열심히 하면서 논리력과 이견 조율 능력이 향상합니다. 그러니 토론에서 깨지는 걸 두려워하며 몸 사리지 않는 게, 빠르게 성장하는 지름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봅시다. <남행열차>가 예술이냐 아니냐에 관한 토론 말입니다.
결국 논점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서 서로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고, 잘 하지 않으면 제가 나서서라도 반론을 제기합니다. 반론에서 중요한 것은 ‘반증反證’, 즉 반대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각각의 의견들은 ‘나는 예술을 이러이러한 것으로 생각한다’라는 일종의 예술관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의 역할은 예술관을 일깨우는 것이고요. 즉 ‘예술은 좀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절제감이 있어야 한다’, ‘오락성만 있으면 안 된다’, ‘예술 외적인 목적이 없어야 한다’ 등의 견해를 밝히는 거지요. 논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집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논리가 가진 ‘예술관’을 파악하고, 그것을 논박해야 합니다. 이런 식이지요.
■너무 쉽다
↔ 그럼 어렵고 비대중적인 것만이 예술인가? 그건 너무 엘리트주의적 견해이다
■절제감이 없다 / 별 내용 없이 너무 오락적이어서 즐기고 나면 여운이 없다
↔ 탈춤이나 민요 같은 민속예술에도 절제감, 깊이 있는 내용, 여운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음담패설로 뒤범벅되거나 말장난만 하다가 끝나는 민요나 탈춤 장면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들을 모두 예술로 인정한다
■돈벌이라는 예술 이외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벌이하지 않는 전문 예술은 거의 찾기 어렵다. 비전문 예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문 창작 예술은 다 상품이다. 또한 예술 외적 목적을 가진 예술도, 예술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대나 중세까지의 예술 대부분은 예술 외적인 목적이 있었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도 주술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교회 음악은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고, 바흐 음악의 상당수가 왕의 대관식, 생일잔치 등을 위해 지어졌다. 즉 상업성이나 예술 외적인 목적 여부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가를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술은 오랜 수련을 거쳐 얻어지는 전문적인 영역의 것인데, 이것에는 그런 전문적인 완성도가 없다
↔ 그럼 비전문적인 예술은 예술이 아닌가? 민속예술의 상당수는 비전문적인 예술이다. 또한 <남행열차>가 전문적 완성도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노래 아닌가
반면에, 찬성 의견에 대한 반론도 꽤 나옵니다.
■사랑의 슬픔을 노래했다. 감정을 표현한 것이니 예술이라 해야 한다
↔ <남행열차> 듣고 슬퍼해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사랑의 느낌도 전혀 가져 보지 못했다. 이 노래가 사랑의 슬픔을 노래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음악과 가사로 사람의 마음을 신이 나도록 움직인다
↔ 그렇게 신이 나게 하면 모두 예술인가. 제자리 뛰기만 해도 신은 나는데, 그렇다면 그것도 예술인가
■어쨌든 노래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이 노래가 예술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논쟁해 보면 ‘예술이 아니다’라는 반대론은, 근거를 대기도 쉽지만 반론을 제기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찬성론은 그 근거를 대기도 쉽지 않지만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습니다. 논리적으로 찬성론을 설명할 수 있다면, 논리적 타당성으로서는 찬성론이 훨씬 우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예술이 아니다’라는 의견의 근거를 대기가 쉬울까요? 그리고 왜 반론도 쉬울까요? 쉽게 말하면, <남행열차>가 대중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본격예술‘고급예술’ 혹은 ‘순수예술’, ‘지식인예술’이라고도 합니다만, 이 책에서는 ‘본격예술’이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의 미감과는 전혀 다른 대중예술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아직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쏭달쏭하지요?
대중가요라 할지라도 양희은의 <아침이슬>김민기 작사·작곡, 1971이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양희은 작사, 이병우 작곡, 1991,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작사·작곡, 1987,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강승원 작사·작곡, 1994, 심지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서태지 작사·작곡, 1992 같은 노래로 예술 여부를 물어보았다면 대답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대중예술론’ 수업을 듣겠다고 들어온 학생들이라면 태반이 ‘예술이다’라고 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 <남행열차>라니요! 아마 <소양강 처녀>이호 작사·작곡, 1968나 <미안 미안해>김동주 작사, 김영광 작곡, 1991, <어머나>윤명선 작사·작곡, 2004, <신사동 그 사람>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 1988 같은 노래를 배치했더라도, <남행열차>처럼 답변에 고민이 좀 많았을 겁니다.
이제 좀 더 따져 봅시다. <남행열차>부터 <아침이슬>, <신사동 그 사람>까지, 앞에 열거한 모든 작품은 다 노래이고 대중가요입니다. 분류상 ‘같은 종류’에 속하지요. 그런데 어떤 것은 예술로 쉽게 인정할 수 있고, 또 다른 것은 예술로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예술을 판단하는 기준이, ‘종류’를 판별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예술이다’라고 답한 학생들은 ‘슬픈 사랑 노래이다’라는 대답을 제외하고는, <남행열차>가 질은 어떠하건 간에 음악과 가사가 결합한 ‘노래’라는 점을 인정하는 겁니다. 삼단논법에 따라서 ① <남행열차>는 노래다’, ② 노래는 예술의 한 종류로 예술에 포함된다, ③ <남행열차>는 예술에 포함된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겁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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