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옥상 정원이
제일 잘 나가!
마트에서 단호박을 샀다. 단호박을 반으로 잘라 씨를 긁어냈다. 긁어낸 씨앗들은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들어갔다. 냄비에 물을 붓고 찜틀을 넣고 단호박을 올렸다. 물이 끓고 단호박이 익었다. 단호박을 맛있게 먹었다. 자, 여기까진 아주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되었던 일상이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조금 속된 말로 ‘만날 그 냄비에 그 호박’인 일상적 행위였다.
그런데 그날, 천둥번개가 친 것도 아니고, 상서로운 빛줄기가 구름을 뚫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던, ‘그날이 그날 같던’ 그날,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에서 반기를 들었다. 어쩌다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지, 누가 알랴. 단호박 씨앗들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저기요, 잠깐만요, 혹시 말이죠, 저희를 옥상 텃밭에 뿌려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누가 아나요? 저희 중에 하나라도 싹을 틔우게 될지. 그 아이가 자라서 단호박이 주렁주렁 열리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잖아요. 세상일을 누가 알겠어요? 싹을 못 틔우고 다 썩는다 해도 비료는 되지 않겠어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그날 단호박 씨앗들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대신 옥상 텃밭에 뿌려졌다. 그날이 언제였더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일이었다. 기대 같은 것 없었다. 그 사이에 비가 내렸는지, 햇빛이 충분했는지, 밤중에 기온은 너무 내려가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으니 어느 날 아침, 옥상 텃밭에 물 주러 올라갔다가 호스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좇던 내 눈길이 텃밭 한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야말로 ‘깜놀’하고 말았다.
‘씨앗에서 떡잎으로’ 이름과 형태를 다 바꾼 그 녀석들을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까? 신세계를 발견한 콜럼버스도 나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인터넷 얼굴책에 그 이야기와 사진을 올리면서 녀석들을 ‘트랜스포머’라고 불렀겠는가! 단호박 씨앗들은 떡잎을 쑥쑥 밀어 올리며 옥상 텃밭 한 모퉁이를 제 영토로 선언하고 있었다.
닷새쯤 지난 뒤, 튼실한 몇 놈을 옥상 텃밭 귀퉁이 적당한 자리, 그러니까 원래 심어진 다른 식물들과 덜 싸울 법한 자리에 옮겨 심었다. 그렇게 옮겨 심으면서도 나는 사실 녀석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녀석들이 정말 튼실한 호박잎을 키워내고, 예쁜 호박꽃도 피워내고, 끝내는 단단한 단호박도 키워낼지 확신이 없었다. 왜? 상추와 방울토마토, 오이까진 키워봤지만 한 번도 단호박을 키워본 적은 없었으니까. 나의 옥상은 사실 텃밭이라기엔 너무 부실했고, 정원이라기엔 너무 가난했으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녀석들이 떡잎을 올린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고, 심지어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녀석들은 이미 ‘대박’이라고. 이제 겨우 떡잎을 피웠지만, 흥부의 박보다 더 위대한 대박이라고. 설령 녀석들이 단호박을 맺지 못해도 괜찮다는 주문이었다. 호박 같은 거 바라지 않아, 그냥 호박잎만 키워도 좋아, 어쩌다 호박꽃 몇 송이 보여주면 더 좋고…… 어린 단호박 떡잎들에게 내가 건 주문이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신은 아마 짐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행진!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어둡고 외로웠지만,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단호박들은 씩씩하게 잎을 키우고 덩굴손을 뻗어나갔다. 정말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확연히 다를 만큼 무섭게 나왔다. 노란 호박꽃들이 배시시 피어났고, 서울 시내 한복판 비탈진 언덕 동네의 붉은 벽돌 다세대 주택의 옥상에 호박꽃이 피었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도대체 어디에 둥지가 있어서 날아오고 날아가는지 알 수 없는 벌들과 연애질을 벌이기 시작했다.
호박꽃 핀 자리 모두에 호박이 영글지는 못한다는, 가슴 아픈 진실을 처음 배웠다. 벽돌담으로 칸막이 치고 간신히 흙 채워 넣은, 가뜩이나 옹색한 옥상 정원의 퇴비도 제대로 먹지 못한 가난한 흙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단호박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에게 허용된 자원, 그러니까 물과 햇빛과 흙 속 영양분을 몇 개의 단호박에게 집중시켜 보냈다. 녀석들 때문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내 발길은 몹시 잦아졌다. 가끔은 그저 넋 놓고 한참 동안 녀석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면 덩굴손이 뻗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도 했다. 지켜보노라면 녀석들이 한없이 대견했고, 또 문득문득 가슴 한켠이 찌르듯이 짠해지기도 했다.
단호박 덩굴들이 옥상을 덮어가기 시작했고, 덩굴손 몇 놈은 옥상 담벼락을 넘기 시작했다. 엄마, 아버지가 부르던 진도아리랑 노랫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르는 세상, 내가 싱긴 호박 박모 담장을 넘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잡설이 길었다. 호박씨를 뿌렸는데 호박이 열렸다, 이렇게 한 줄로 충분히 다 할 수 있는 얘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유는? 그렇게 잡설도 끼어들고 객쩍은 농지거리도 끼어들어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 ‘쎄멘 공구리’로 지은 다세대 주택의 옥상에다 우리 엄마가 악착같이 텃밭을 꾸며놓으신 이유도 별로 다르지 않았으리라. 엄마가 떠난 이제 와서야 나는 깨닫는다. 흙이 있는 땅뙈기 한 뼘 가질 수 없는, 서울이라는 살벌한 삶의 터에서 옥상 텃밭은 엄마가 몸으로 부른 아리랑이었다.
엄마가 키워서 유기농이라며 자랑스럽게 밥상에 올려놓으시던 그 상추와 고추를 기억한다. 그 상추와 고추를 기르기 위해 엄마가 바친 노동을 기억한다. 그건 거의 터무니없는 농담 수준의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노동이었다. 마트에 가서 천 원짜리 몇 장이면 살 수 있는 그 상추와 고추를 위해 엄마는 3층집의 옥상까지 흙을 머리에 이고 나르셨다. 깻묵과 한약 찌꺼기를 이고 날랐고, 관절염으로 절뚝거리면서 매일 아침저녁 물 주기를 계속하셨다. 농약 치지 않겠다고 손으로 진딧물과 달팽이를 잡으셨다.
물론 엄마의 옥상 텃밭에 먹을거리 채소만 초대받았던 건 아니다. 초여름이 되면 빨간 나리꽃도 피었고, 여름이 깊어지면 연보랏빛 비비추도 꽃대를 올렸다. 그리고 엄마의 텃밭에선 쑥갓도 꽃을 피웠다. 쑥갓꽃을 본 적이 있는가? 쑥갓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 아직 갈 길이 멀다!
엄마가 아직 옥상 텃밭의 주인이었을 때, 나는 몰랐다. 그것이 엄마가 당신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 삶의 존엄성을 지켜나간 일종의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무 한 그루는커녕 상추 모종 하나 심을 땅도 없는 삶, 그것이 엄마의 삶이었다. 서울 달동네 언덕 중턱의 집에 시멘트로 덮이지 않은 맨땅, 흙이 드러난 맨땅은 사치의 극한이었다. 엄마에겐 끝내 허용되지 않았던 샤넬, 에르메스 급의 사치였다. 나이 칠십이 가까워 엄마는 마침내 하루 종일 햇볕 잘 드는 옥상을 당신 몫의 재산으로 갖게 되셨다. 철마다 해마다 그곳엔 내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온갖 푸성귀와 화초가 피고 지고 열매 맺고 시들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텃밭말고도, 옥상에는 청색과 갈색을 주조로 하는 플라스틱 화분을 비롯해 생선을 담았거나 야채를 담았던 스티로폼 상자들까지 흙을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 자리를 차지했다. 혼돈에서 질서가 스스로 생겨난다는 혼돈 이론을 들어보셨는지? 창발, 자기조직, 프랙탈 어쩌고저쩌고는 접어두자. 그냥 엄마의 옥상은 혼돈 이론이 증명되는 현장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엄마의 옥상 텃밭은 그 어떤 만다라보다 아름다웠노라고. 엄마의 옥상 텃밭은 한바탕 육자배기 소리였고 강강술래 춤사위였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너무 늦게 내가 깨우쳤다는 것이다.
엄마의 옥상 텃밭이 할 일 없는 도시 노인네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선언에 해당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나는 엄마가 옥상 텃밭을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초토화된 옥상 텃밭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말이다. 부끄럽게도 그렇게 아름다웠던 엄마의 텃밭을 나는 한 번도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상 떠돌아다니다니며 남의 정원들에선 죽자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으면서 말이다.
엄마 아버지가 떠난 집에 장남의 특권으로 들어앉았다. 힘들지 않았냐고? 질문이라고 하는가? 힘들었다. 모든 부재는 힘든 법이다. 그 텅빈 공허를 채울 모종의 방법이 필요했다. 엄마가 가르쳐주신 노래를 부르듯이 엄마의 텃밭을 다시 일구기로 했다. 그건 내가 찾아낸 치유의 방책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속죄의 방편이기도 했다. 한 번도 합당한 관심과 감탄을 보내드리지 못했던 엄마의 옥상 텃밭에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했다.
완전 초보 엉터리 아마추어 농부 또는 정원사의 서툰 손에서 참 많기도 많은 생명이 제 몫의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시들어야 했다. 어느 생에서든 그 죗값을 갚아야 할 것이다. 생명을 집안에 불러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거늘, 정말로 무책임하게 남의 나라 정원들 구경 간다며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유람 떠난 일도 꽤나 여러 번이었다.
우왕좌왕, 갈팡질팡, 왔다리 갔다리, 아무리 배움의 길은 본래 시행착오의 연속이라지만, 내 옥상 정원에선 참 많은 비극이 벌어졌다. 그렇긴 해도 초록이들은 역시 강인했다. 얼치기 주인 밑에서도 악착같이 씨앗을 틔우고, 주인의 게으름 또는 건망증에서 비롯된 가뭄과 홍수도 이겨내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그리고 몇몇 여러해살이들은 봄이 되면 기적처럼 다시 새 잎을 키워내곤 했다.
엄마의 텃밭 시절부터 터 잡고 살아온 지렁이들은 이제 슬쩍 모종삽만 갖다 대도 눈에 띌 만큼 그 숫자가 불어났다. 꽃이 피면 어김없이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 물론 달갑지 않은 터줏대감도 있다. 달팽이! 이파리도 모자라 딸기가 빨갛게 익을 만하면 어김없이 삭삭 갉아먹고 마는 지독한 놈들이다. 어느 해에는 진딧물이 기승을 부리기도 하고, 그러면 또 어디선가 무당벌레 군단이 날아와 내게 동맹군이 되어주기도 한다. 손바닥만한 옥상 정원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그래도 나름대론 잘 굴러가는 생태계라고 자부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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