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한 사전 편찬자의 자기 소개서
모아서 정리하니 “보기에 좋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내 어린 시절 얘기를 해보려 한다. 사적 경험이지만 공적으로 읽을 만한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로 탐구발표라는 게 있었다. 주제를 하나 정해서 열심히 조사한 다음 수업시간에 공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초등학생에게는 꽤나 버거운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택한 주제는 ‘국보 1호부터 50호까지 정리하기’였다. 번호가 있으니 순서대로 찾기만 하면 되었고, 조사 범위도 한정적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번호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 자체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국보랑 친해둔 덕에 경천사십층석탑이나 고달사지부도 따위의 이름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고, 이후 조선시대 역사에도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문화재청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어릴 적에 얻은 정보를 주워섬기며 관계를 터나간 기억이 있다.
그 외에도 내가 좋아했던 건 모두 뭔가를 모으는 일이었다. 메모지를 모았고, 지우개를 모았고, 딱지와 게임용 카드를 모았다. 지우개 따먹기나 딱지치기를 해서 따기도 하고, 친구들과 교환도 해가며 차곡차곡 모았다. 무엇인가를 일정 수량 이상 모으다 보니 정리가 필요했다. 정리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었지만, 정리하면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정리하는 기준은 내 마음대로였다. 모양, 색깔, 디자인, 크기…….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기준을 따랐다. 그렇게 정리해서 상자에 담아두면 “보기에 좋았다”.
조선의 민속 공예품을 모았던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의 관점을 수립하고 그 관점에 따라 소장품을 모았으며, 그것을 ‘창작적 수집’이라 불렀다. 수준이야 비교할 바가 아니겠지만 수집을 통해 미감을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초등학생 시절 나의 행위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런 수집 과정에서 배우는 게 있었다. 예를 들어 게임용 카드는 대부분 규칙이 비슷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고스톱 규칙이었다. 디자인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다르게 구성한 것이었다. 금메달을 다섯 개 받으면 오광이 된다거나 금은동메달을 모두 모으면 청단 세 개를 모은 효과가 있다거나, 뭐 그런 식이었다. 얼마 전에 조카의 유희왕 카드를 보니 기본적인 것은 옛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카드 안의 다양한 요소를 잘 파악해야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었고, 카드의 이름과 이미지에는 수집 욕구를 자극하는 여러 가지 변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허기지게 만들려고 작정했는지 전부 모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종류가 많았다. 게다가 온라인 게임의 요소까지 받아들여 오프라인 카드 게임인데도 복잡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복잡한 규칙을 조카는 열심히 배워나가는 것 같았다.
보편적인 요소나 규칙을 찾는 것은 수집 정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지우개를 수집할 때는 어떤 지우개가 잘 지워지는지, 어떤 지우개가 빨리 닳는지와 같은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메모지를 모으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던 시절에는 어떤 디자인이 여자 아이들에게 먹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잉여적인 지식들이긴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안에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나의 수집 인생은 당연하다는 듯 우표로 이어졌다. 우표는 수집 대상으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맛을 가졌다. 국가별, 도안별, 연도별, 이슈별로 분류 방법이 워낙 다양했다. 초일봉피first day cover(우표가 발행된 첫날에 봉투에 우표를 붙여 소인을 찍은 봉피), 소형 시트souvenir sheet(수집가들을 위해 소량의 우표를 그림이나 문구와 함께 세트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 등의 특별한 수집물도 있었고, 발행일에 맞춰 우체국으로 달려가 우표를 사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2, 3년 신나게 모았다. 새 우표를 사기도 하고, 봉투에 붙어 있는 우표를 물에 불려 떼기도 했다. 매년 발행되던 우표 도록을 사서 한국 우표의 역사를 살펴보곤 했는데, 거래 금액을 보면서 무엇이 그 우표의 가격을 결정했을지 궁금했다. 또 귀한 우표에 대한 소유욕도 생겼다.
가장 좋았던 건 우표 디자인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1~3대 대통령 취임 우표를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 취임 우표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 사람들은 몇 번이나 연속으로 대통령이 되었을까? 이런 의문은 고등학생이 되어 현대사를 공부하며 해결할 수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 우표는 너무 많아서 얼굴이 혐오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이 과시적인 추한 미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민족 기록화 우표나 각종 국제회의 기념우표 등 각각의 우표들에는 그것이 발행되던 시절의 분위기가 한껏 담겨 있다. 나중에는 그 우표들에도 정치적인 함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우표를 사지 않지만 지금도 우표를 좋아하고, 우표 가게를 지날 때면 전시된 우표를 유심히 보곤 한다. 또 해외에서도 우체국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우표 발행 계획 포스터를 보며 도안을 구경한다. 우표 수집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괜찮은 취미라고 생각한다.
소년, 사전을 만나다
1976년생인 나는 전두환 정권 시대에 부자도 빈자도 아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치가 둔했던 탓에 어려서는 우리 집이 중산층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빈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머니는 집에서 공장 스웨터의 마무리 수작업을 부업으로 하셨다. 그 일로 버신 용돈은 가끔 집에 오는 방문 판매 책장수의 손에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책을 꽤 얻어 읽었다.
아동용 세계문학전집도 있었고 도감도 있었다. 그 여러 책들 중에는 문제의 백과사전이 있었다. 바로 계몽사의 『컬러학습대백과』(1972년 판, 8권)였다. 가나다순으로 편집되어 있으며 한 페이지의 상단 70퍼센트에는 도판이, 하단 30퍼센트에는 설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판에는 사진뿐 아니라 기계의 구조도나 동물의 해부도 등 일러스트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말 그대로 책 가운데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봤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부업을 하시고 나는 그 옆에서 뒹굴면서 책을 읽었는데, 가장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책이 바로 이 백과사전이었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일단 그림이 크고 설명은 간결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에게 긴 설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 책은 그 점을 아주 잘 알았다. 책 전체에 걸쳐 설명의 분량을 최소한으로 일정하게 유지했다. 또 다른 장점이라면 이 책은 그 자체로 균형감과 완결성이 있었다. 앞뒤로 넘겨가며 찾아보기만 하면 일상에서 궁금한 것들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도 괜찮았다. 어딘가에는 내 의문을 해소해줄 항목이 있었다. 각종 기계와 동식물의 구조/단면도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고, 볼 때마다 계속 생각할 수 있었다.
당시 방문 판매 책장수 아저씨들은 정보량이 부족한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꽤나 열심히 영업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은 당신 자식이 다른 아이들에게 밀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돈 없어요. 돌아가세요”라고 얘기하시는 어머니를 본 기억도 있지만, 대개는 중요한 책을 내 자식만 못 보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이런저런 책들을 구매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친구들 집의 책장에는 대체로 백과사전 한 질 정도는 놓여 있었다. 당연히 안 봐서 깨끗한 것들이 많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중학생용, 고등학생용 하는 식으로 새롭게 사곤 했으니 버려지는 것도 많았다. 그렇게 버려진 책들은 지금도 헌책방을 조금만 뒤지면 살 수 있다.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1970~80년대에는 백과사전의 종류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 백과사전들은 사실 학생들을 위해 새로 편집된 보급판이었다. 그 이전에는 학원사의 『세계대백과사전』(1967년 판, 12권)이나 태극출판사의 『대세계백과사전』(1974년 판, 16권),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1984년 판, 30권) 등 어른을 위한 백과사전들이 있었다. 이 사전들은 아무래도 한자가 많고, 아이들이 읽기엔 부담스러운 분량이었다. 가격도 꽤 비싸서 어지간한 인텔리 집안이 아니고서는 집에 들여놓는 것이 사치였다.
그 무렵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문판이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렸는데, 피아노처럼 교양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팔려나간 측면이 있었다. 당시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던 한창기는 그 점을 잘 알았고, 이를 이용해 큰 수익을 올렸다. 그 돈으로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했으니 백과사전을 사들이던 당시 중산층의 지적 허영심과 한창기 개인의 글과 책에 대한 사랑이 만나 한국의 출판, 잡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장이 커지던 차에 계몽사에서 『컬러학습대백과』를 내놓아 크게 히트를 쳤다. 책은 중판을 거듭했고, 이후 계몽사는 잡지도 발행하고 음반 산업에도 진출하는 등 중견 출판사로 성장했다.
1980년대는 백과사전을 출간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일본의 백과사전을 생각 없이 번역해 내놓은 것들도 있었다. 성인이 되어 읽어보니 옛날 백과사전들의 상당수가 형편없는 문장들로 가득해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어차피 어머니들은 그 책들을 읽어보고 구매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문장의 수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학습백과는 백과사전이라기보다는 큰 형태의 전과 같은 것이었다. 전과는 너무 노골적인 학습 교재라 사주기 불편했던 부모들도 학습백과는 부담 없이 사줄 수 있었다. ‘학습’과 ‘백과’라는 매력적인 단어 두 개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 붐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과외 금지 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1989년에 과외 금지가 폐지될 때까지 백과사전과 전집류 도서들은 학부모들의 사교육 욕구를 해소하는 배출구 역할을 했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책이라는 학습 매체가 가정 단위까지 보급된 이후 시장 규모가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묘사된 것처럼 안방에는 컬러 TV가, 아이들 방에는 백과사전 한 질이 놓여 있는 것이 당시 평범한 가정의 풍경이었다. TV에서는 주말 아침저녁이면 〈장학퀴즈〉나 〈퀴즈 아카데미〉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경쟁적으로 상식을 쌓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백과사전의 두 번째 붐은 1990년대에 찾아왔다. 1980년대에 출간된 백과사전들의 개정판이 나올 시점이기도 했고,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CD롬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 백과사전이 학습 도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물론 컴퓨터로 백과사전을 차분하게 들여다본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어차피 지갑을 여는 사람은 학부모였고,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컴퓨터+백과사전 CD롬’은 썩 괜찮은 조합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에 IMF가 닥혔다. 각 가정의수입이 급감하고, 그에 따라 사교육 시장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 대안으로 다시 한 번 주목받은 것이 학습백과였다. 스스로 학습하게 해준다는 말이 학부모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즈음 기존 학습백과의 완결편이라고 할 만한 『21세기 웅진 학습백과사전』(1998년 판, 21권)이 출간된다. 브리태니커 영업사원 출신인 윤석금 회장이 타이밍 좋게 내놓은 이 백과사전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첫 달에만 150억, 6개월 만에 300억 매출을 냈다고 한다.
학습백과 시장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사교육 시장의 과열이고, 또 하나는 검색의 범람이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교육 시장이 폭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명 학원 강사들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던 시점은 2000년대에 들어서였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인터넷 사용이 폭발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면서 학생들이 감당해야 할 정보량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이 되었고, 소박한 학습백과로는 더 이상 경쟁이 되지 않았다. 학습백과 시장은 축소되어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을 하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위한 교재들만을 소비하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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