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부자연’스러운 사회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아이들
: 우리가 대물림하는 가치
짜맞춰진 퍼즐, 성과주의
(전략)
우리 아이들의 생활 세계는 전방위에 걸쳐 삶의 경제화가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 파악되고 측정되고 숫자로 변환된다. 관리 제어는 우리 사회의 마법 주문이다. 모든 것에는 등가가, 반대급부가 따른다. 이러한 성과주의는 생활영역 전반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런 원칙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적어진다. 갈수록 많은 가족들, 또 갈수록 많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굴복한다. 그들에게는 삶이 흡사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점점 빨라지는 벨트컨베이어처럼 변하고 있다. 작동을 멈출 조절기가 없다.
우리 아이들은 한편으로는 끝없는 요구들로 가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증오에 찬 전쟁이 늘어가는 분열된 세계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점점 이른 나이에 낙관주의와는 한참 동떨어진 감정 상태에 빠진다.
아이들이 보고 겪는 어머니들은 우리 사회에서 극한의 서비스업 종사자다. 그들은 아이의 양육과 직장 일을 조화시키는 과제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 좋은 어머니, 보충수업 교사, 셔틀버스, 훌륭한 요리사, 헌신적인 아내 역할에 더해서 가족기업에 자기 몫의 유로화를 보태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이런 어머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죄책감이다. 그 모든 일을 다 수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로와 탈진 같은 감정을 아이들에게 전염시킨다. 비극적이게도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종종 그 자신이 번아웃의 한가운데에 빠져 있다. 다름아닌 자신과 아이들에게서 번아웃을 멀리 떼어놓으려 과로하는 탓에 말이다.
이런 소진은 아버지들의 호위를 받는다. 그들은 일에 파묻힌 채 그 자신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번아웃을(자신의 번아웃도 포함해) 촉진하는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진 퍼즐에 틀을 두른다.
이런 구조를 지원하는 것은 디지털 가족이 빠른 템포와 무거운 압력 속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부모와 아이들은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의 올바른 사용을 놓고 다툰다. 그리고 아무런 반대 없이, 비용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데이터를 벌써 오래전에 팔아버렸다. 디지털미디어 세계는 숨가쁨과 관음증이 특징이다. 우리는 관찰된다.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놓고 또 타인의 사진을 탐욕스럽게 주시하며 논평하는 이런 관음증적 진열에서 생겨나는 분위기는 우리를 나르시시즘으로 몰아댄다. 현대판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완벽한 상을 좇지만 그것에 결코 닿을 수 없다. 나르키소스는,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예측이 불가능하고 위험이 도사린 세계를 과로하여 질주한다. 그러면서 안식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찾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 모두는 다른 이의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숨이 가쁘다.
디지털미디어를 규탄하는 사람은 우리 어른들이 거기에 책임이 있으며 그럼에도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디지털미디어의 수중에 있으며 스스로를 혹사하지 않도록 이를 다루는 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서야 아이들이 우리를 뒤따르도록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심지어 우리보다 앞서가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파티를 할 때 모두들 합의해 스마트폰을 탁자에 쌓아두고 먼저 다가가는 사람은 지는 것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이 더 자주 실행된다면 좋을 것이다.
원인이란 퍼즐은 학교를 언급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못한다. 내가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우리가 내적, 외적 원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외부 대책, 즉 전일제로 일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구제책으로서 수업시간을 늘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학과목에 대한 열망과 의욕을 북돋우면서 아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열다섯 살인 조피가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조피는 부모가 헤어진 것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반응한 탓에 반년 동안 외래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조피는 현재 8주 전부터 영국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받는 요구들이 함부르크의 (엘리트!) 김나지움에서보다 훨씬 높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조피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보내는 환경을 기꺼이 감수한다. 헌신적이고 잘 설명해주며 조피의 이해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뭔가 애매하다는 신호를 보내면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위의 경우처럼 학생에게 혼자 힘으로 나머지공부를 하면서 심화하도록 요구하는 대신 말이다.
학교라는 환경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이 제기되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은 학교의 요구들은 충족시키며 엄청난 과로를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학이 파산했다는 선고나 다름없다! 이때 학교에 대한 만족이란 외적인 환경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방식과 내적 태도의 문제다. 하지만 증명된 바와 같이 독일사회에서 교사가 되는 건 아비투어 성적이 가장 좋은 수험생들이 아니라 가장 나쁜 수험생들이다. 이 또한 우리 교육이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되는 데 기여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역사적, 개인적, 집단적 요소들로 조합되는 퍼즐에서 나오는 것은 완전한 그림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주위로 점점 좁혀 들어오며 숨통을 죄는 고리다. 그것은 너무 높은 의자에 기어오르려는 아이의 발버둥 같은 반동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아무도 오래 견뎌내지 못한다. 번아웃의 원인들은 우리 삶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삶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이들과 청소년들 본인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다. 부모인 우리와 사회로서의 우리. 종종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바꿀 수는 없기에 속수무책인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에겐 현 상황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 우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아이들의 과로를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리미리 예방책을 생각하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해야 한다. 항상 어떤 경우에도 아이가 번아웃 키드가 되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진되지 않은 아이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노력으로 쟁취한 아이다.
(중략)
4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번아웃, 성과주의 그리고 우리의 책임
아이들에게 번아웃이 증가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질환은 우리 사회의 원칙으로 각 개인이 실천하고 있는 성과주의와 직접 연관이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심리 징후를 어른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번아웃을 제때 인식하고 치료해야 한다. 번아웃이 덜 일어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모든 가족마다 번아웃을 예방하는 생활 환경을 세심히 만들어내도록 힘써야 한다.
유념해야 할 몇몇 규칙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첫번째 규칙은 아이가 나타내는 탈진이나 탈진우울증의 증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망설이지 말고 제때 전문의나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기 아이에 대한 전문가(!)인 어머니의 눈에 감지되는 증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라면서 괜찮아지겠지”나 “아기가 과민하네요” 같은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찬찬히, 되도록 상세하게 아이에게 물어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불안해하지 말고 아이에게 공인된 아동정신과 의사가 처방한 약을 주어야 한다. 물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의술가에게서 ‘진정시키는’ 약을 구하는 것은 금물이다.
두번째 규칙은 자기 자신과 온 가족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방식을 분석하고 어떤 모범을 보이고 있는지 주의해야 한다. 어떤 가치를 아이에게 전달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를 전달하길 원하는지 자각해야 한다. 아이가 어떤 방향으로 발달하길 원하고 있는가? 그것이 실제로 아이와 잘 맞을까? 고민해야 한다.
세번째 규칙은 아이의 주위 사람들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위임으로 당신의 아이를 맡은 모든 전문가들에게 아이를 존중과 주의로 돌보도록 기대하고 요구해야 한다. 당신 자신이 아이를 대하는 방식대로, 또한 어른들이 일반적으로 서로서로를 대하는 방식대로 말이다. 교사, 트레이너, 의사, 심리치료사와 대화를 꺼려서는 안 된다. 아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보살핌이란 개념을 몸소 생생히 실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충분한 자극과 이완, 재미와 즐거움, 신중함과 무모함, 성적과 배우는 즐거움을 도모해야 한다. 삶은 변화와 대조라는 리듬이 있어야 생기를 띤다.
하지만 아이가 벌써 소진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진된 아이들을 관대하게 돌봐주어야 한다. 회복될 때까지 오로지 이해와 배려로 함께해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일단 원기를 회복하고 확신을 새로이 찾아야만 ‘마침내 붕대를 풀고’ 공기와 햇빛 같은 자연환경에 나머지 상처 치료를 맡길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신체적 상해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훨씬 너그럽다. 나는 우리가 골절 치료에 들이는 시간을 정신적 치유에도 허락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골절 뒤에 걷기를 다시 배우듯이, 번아웃을 치료하고 나서는 각 아이마다 그 특성에 맞게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떻게 지원해야 좋을지 새로이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뜻에서 우리 아이들을 잘 보살피며 책임지는 데 성공한다면, 아이들은 놀라운 존재로서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아직 다른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지금보다 만족하고 스트레스는 덜 받는 아이들을 배출하는 세상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변화를 촉구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서 빌렸을 뿐이다.” 얼마나 현명한 문장인지 나는 번번이 감명받는다. 이 문장은 (아마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렇듯) 우리가 아이들에게 세상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으스대며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낼 시간이 아이들보다 적게 남았으니 ‘차용인’으로서 빌린 재화를 망가뜨리지 않고 잘 손질해서 되돌려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에 맞추어놓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여러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 아이들을 소진되게 놓아두고 번아웃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새로운 미래의 생명들을 낳아 기를 것이다. 이 손자 손녀들을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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