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한 묵묵함을 지닌
제주 옹기의 재해석
강승철1972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LG문화센터 도예교실과 제주관광대에서 가르쳤다. 1999~2012년 제주옹기디자인협회전, 2001~2003년 강승철·정미선 해피데이 소품전, 2002~2013년 제주도예가회전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2013년 일본 오사카에서 ‘숨쉬는 제주 옹기, 바다를 건너다’와 2014년 제주 노리갤러리에서 ‘흙과 불-강승철’전 전시회를 열었다. 2007년 제주도미술대전 공예 부문 대상을 비롯하여 2000년 서울평화미술대전 도예 부문 대상과 2004년 제1회 토야 테이블웨어 공모전에서 금상을, 2010년 울산 세계옹기문화 엑스포 공모전에서 입선을 했다. 현재는 제주미협, 제주도예가회, 제주옹기디자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담화헌 대표로 있다.
“당신의 옹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별스러우면서도 느닷없는 질문에 작가는 사람 좋게 웃었다. 잘왔다며 내민 것이 옹기였다. 괜찮겠냐는 물음에도 옹기를 내민다. “그래도 작품인데…” 머뭇머뭇 옹기를 손에 쥐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작가가 묻는다.
“어때요?”
“좋은데요.”
“그게 옹기에요.”
마뜩한 표정이 남는다.
“제주에서 옹기는 생활에 요긴한 용기였어요. 쓰면서 좋다 느껴야지, 보면서 괜찮다 하는 건 제주 옹기가 아니죠. 집집마다 안 쓰는 것 없이 제 역할을 하던 것인데요. 그런 것들을 비운 채로 둔다는 건 옹기 자체를 무시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부터는 옹기가 아니라 그냥 ‘작품’이라고 봐야죠.”
꾸밈도 꼼수도 없는
제주 옹기에의 끌림
가마 앞에 섰다. 뜨거운 열기가 주변의 것들을 거침없이 밀어낸다. 불이 흙을 담금질하는 기세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운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무섭게 덤벼드는 불꽃 앞에 초연한 것들은 조심스레 가슴속 숨겨뒀던 색을 꺼낸다. 스스로 단단해진 것들에서 돋을볕 같은 적색이 우러난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기억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사이,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질박해진다. 달항아리 같은 날렵한 선이나 청자의 은근한 색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감탄’이란 이름으로 바꾼 체질은 질펀한 대지의 느낌으로 세상의 것들을 품는다. 땅의 색에 가까워지는 만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삶의 숨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자연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질박한 묵묵함은 ‘미美’라는 한 글자로는 다 채우기 어려운 깊음이 있다. ‘제주 옹기’다. 검정에 가까운 갈색의 것들은 손때를 타야 윤이 난다. 착시 같은 붉은 기운은 탁하고 투박하다. 두텁고 완만한 곡선 어디에도 관능적이거나 날렵하다는 느낌을 찾을 수 없다. 한라산이 한참 활동을 하던 시기 점성 높은 용암 줄기가 세월과 함께 흙이 되고 다시 열을 만나 옹기가 되는 자연 윤회 안에서 점점 더 거칠어진다. 그래서 가슴에 밟힌다.
작가 역시 그런 것들에 매료됐음을 털어놨다. 한창 나이 때 ‘돈이 되는 것들’의 유혹을 쫓아 달렸지만 끊임없이 ‘뒤통수’를 쳤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은 새로운 출구를 갈망했다. 그때 제주 옹기가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음을 외쳐대는 제주 흙으로 만들어진 제주 옹기는 꾸밈도 꼼수도 없이 진솔했다. 이런 면이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하여 작가를 끌어당겼다.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기 위해 제주에서 대구, 서울, 이천, 부여를 떠돌아다녔던 그는 ‘제주의 흙’에 발을 내렸다. 그동안 씨름했던 기름 가마도 장작 가마로 바꿨다.
“다들 뭐하는 짓이냐고 했죠. 남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는데 뭐하러 섬으로 돌아오는 거냐? 훨씬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 틈을 찾기 어려운 작업을 굳이 해야 할 이유는 뭐냐? 누구는 말리고 누구는 충고하고. 그중에는 잘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실 주변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니 그냥 해야 했죠.”
제주 옹기의 기원은 생각보다 한참을 거슬러 간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들에서 고산리식 원시 무문無紋 토기와 융기문隆起紋 토기가 발굴되면서 신석기 이래 많은 토기와 옹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섬에 사람이 살았던 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그런 것이 어느 순간 사라져갔다.
1970년대 초에는 전남 강진에서 흙부터 다른 옹기가 들어왔다. 추자도에 옹기를 팔러 길을 나섰던 배 하나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를 해오면서 ‘강진 옹기’라는 신문물이 제주로 들어와 제주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것도 잠시, 플라스틱이며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것이 보편화되면서 ‘옹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옹기장이의 맥이 끊기고 잊힌다 했다. 아니 했었다. 십수 년 전 지역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제주 옹기를 살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도시화에 밀려 허물어진 가마터를 복원하고 흙을 찾았다.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온 옹기는 다른 느낌의 옹기였다. 예전과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맛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때문이다. 물론 공정 과정에서 체온이 보태지기는 하지만 결국 옹기는 손때가 묻어야 한다. 작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옹기는 가만히 모셔놓는 것이 아니라 쓰고 닳으면서 사람과 같이 나이를 먹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저절로 번들번들 빛을 먹지요. 그런 자연스러움은 외면하면서 전통의 재현이라거나 과거와 현재의 공존, 지난 것들에 대한 재해석 같은 설명을 보태가며 진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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