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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과 탐욕의 먹구름
2000년 1월 1일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한 점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2000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들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들이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기다리며 해맞이에 분주했을 그때, 태양의 저편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몰아닥친 정보기술IT혁명은 새천년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IT혁명은 팡파르를 울리면서 실물경제의 영역으로 진군해갔다. 생산성이 눈에 띄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같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양을 생산해냈다. 기업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채용했고 실업률은 계속 하강곡선을 그려갔다. 임금은 올라가는데도 인플레이션은 떨어졌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임금상승분을 높은 생산성으로 충분히 보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실업률은 2000년 4월 3.8%까지 떨어졌다. 이는 미국경제의 마지막 황금기였던 1969년 12월에 도달한 실업률 3.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제 미국경제는 낮은 실업률과 낮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 앞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경제new economy’로 불렸다.
IT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해 주가도 천정부지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우선 기술주들이 많이 상장되어 있는 나스닥NASDAQ의 주가지수를 살펴보면 1995년 7월에 1,000의 고지를 넘어선 이후 1998년 10월에는 2,000을, 1999년 11월에는 3,000을 뛰어넘었고 그 한 달 후인 1999년 12월에는 4,000을 단숨에 넘어섰다. 그리고 2000년 3월에는 대망의 5,000선까지도 뛰어넘었고 2000년 3월 10일 5,049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 경이로운 기록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15년 4월에야 깨졌다.
1995년 7월부터 2000년 3월까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나스닥 주가는 무려 다섯 배 이상이 뛰었다. 1995년에 1,000달러를 나스닥에 투자한 사람은 거품이 꺼지기 직전인 2000년 3월에는 5,000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을 것이다. 이러한 투기열풍은 흔히 닷컴dot-com 거품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미국의 중앙은행, 연준The Fed) 이사회의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이를 두고 “비이성적 열광”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새천년에 대한 기대는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없었다. 주가의 수직 상승은 거기까지였다. 새천년에 대한 들뜬 기대가 한껏 고조되고 있을 때 주가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스닥이 정점을 찍은 지 한 달 후인 2000년 4월 14일 나스닥 주가는 34%나 하락한 3,321로 곤두박질했다. 이후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한 끝에 약 2년 후인 2002년 10월 9일에는 1,114까지 떨어졌다. 이는 최고점에 달했던 5,049에서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1995년에 1,000달러를 나스닥에 투자한 사람이 그 주식을 2000년 3월까지 약 5년 동안 보유했으며 5,049달러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2년 10월까지 약 7년 동안 계속 보유했다면 겨우 1,114달러를 건졌을 것이다. 이 기간 투자자들은 천국과 지옥을,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다우존스산업평균Dow Jones Industrial Average주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2000년 1월 14일 1만 1,723까지 치솟았던 주가지수는 2002년 10월 9일에는 반 토막 수준인 7,286으로까지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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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
탐욕은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합리적인 경제주체라고 하더라도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즉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2000년 닷컴 거품경제가 붕괴된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주택시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욕에 눈먼 경제주체들은 거품의 붕괴가 자신들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미국에서는 그때까지 주택은 투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주택 가격이 매우 높은 수준에서 형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부지역을 일컫는 선벨트Sun Belt를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숨 가쁘게 오르기 시작했다. 탐욕에 눈먼 은행들은 대출적격 수준보다 신용점수가 낮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에게 거의 100%까지 주택융자를 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서브프라임(적격 미달) 대출이었다. 여기에 주택에 투자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한 주택 구매자들의 ‘묻지 마 투자’도 한몫했다.
낮은 금리도 주택 가격의 급등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2000년 초 정보기술 버블이 꺼지자 미국경기는 급냉각하기 시작했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에 당황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와 의장인 그린스펀은 통화금융정책을 경기확대 기조로 바꾸고 연달아 은행간 기준대출금리인 페더럴펀드 금리federal funds rate를 인하하기 시작했다. 기준금리는 은행이 다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릴 때 적용되는 금리이다. 2000년 5월 16일 6.5%까지 올랐던 기준금리는 2001년에는 11차례나 인하되었으며, 2003년 6월 25일에는 1%로 떨어졌다. 이렇게 금리가 낮아지자 주택 가격뿐만 아니라 주가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우존스지수는 2007년 10월 9일에는 그때까지 사상 최고 수준인 1만 4,165까지 회복되었으며, 나스닥지수도 2007년 10월 31일 기준 2,862까지 상승했다.
한때 세계경제의 지휘자, 마에스트로롤 불렸던 그린스펀은 IT버블경제가 붕괴된 후 경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금리 인하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주택 구입자들에게 중앙은행의 정책 방향에 관해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연준 의장 시절 주택 수요자들에게 금리가 수시로 변하는 변동금리의 모기지(주택담보금융)를 권장하고 주택 소유자들에게는 주택 대출금의 리파이낸싱(대출 갈아타기)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런 이유로 그린스펀은 2007년까지 이어져온 주택시장의 과열현상을 부채질했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주택시장 과열이 ‘그린스펀 버블Greenspan bubble’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부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는 쓰나미가 몰아치듯 전 세계의 금융시장을 순식간에 황폐화시켰다. 그것은 마치 맹렬히 타오르는 산불과도 같았다. 불길은 먼저 85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 제5위의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Bear Sterns로 번지기 시작했다. 베어스턴스는 2006년 11월 기준으로 자산이 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형 투자은행이었다. 2008년 3월 뉴욕연방준비은행은 긴급대출을 해주었으나 베어스턴스를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베어스턴스는 그해 5월 주당 10달러로 JP모건 체이스JP Morgan Chase에 매각되었다. 한때 주가가 133.20달러에 달했던 베어스턴스의 초라한 몰락이었다.
월스트리트 제5위의 투자은행이 무너진 후 위기는 161년의 전통을 가진 미국 제4위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Lehman Brothers로 옮겨갔다. 리먼브라더스는 베어스턴스보다 규모도 두 배나 크고 역사도 두 배나 오래되었다. 파산하기 바로 직전인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자산은 6,910억 달러에 달했다. 9월 15일 리먼브라더스마저 무너지자 넥타이를 맨 풀죽은 군상들이 월스트리트로 쏟아져 나왔고, 불길은 유럽으로, 아시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제3위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Merrill Lynch는 2008년 9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매각되었다. 이제 세계 금융계를 쥐락펴락했던 투자은행 가운데 살아남은 행운아들은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2위)와 골드만삭스Goldman Sachs(1위)뿐이었다. 이 위기의 와중에 목숨을 부지한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투자은행에서 상업은행(은행지주회사)으로 변신했는데 이는 스스로 연준, 재무성 등 금융감독기관의 감독과 규제에 굴복하겠다고 백기를 든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불길은 투자은행에서 보험회사와 모기지회사로 그리고 상업은행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2008년 9월 초에는 미국 정부가 2,000억 달러를 들여 미국의 양대 주택금융회사인 패니매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을 접수하는 극단적 시장개입이 발생했다. 뒤이어 미국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가 지급불능 위기에 처하자 미국 연준은 9월 16일 85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긴급 수혈했다. 1812년에 설립된 미국 최대의 상업은행 시티뱅크Citibank도 자산가치의 하락으로 도산위기에 몰렸다. 미국 정부는 2008년 11월 시티뱅크에 총 5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위기가 이제 월스트리트에서 메인스트리트로 번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금융경제에서 실물경제로 전이되고, 범위가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대되어갔다. 특히 미국 산업 중 가장 취약한 자동차산업이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2008년 11월에 미국의 3대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 포드Ford, 크라이슬러Chrysler는 파산을 피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 5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5년 동안 미국 정부가 자동차산업에 제공한 구제금융의 총액은 800억 달러에 이르렀다.
GM은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주식의 60%를 담보로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경제에서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잠시나마 민간기업의 주주가 된 셈이다. 이와 같이 글로벌 경제위기 동안, 과연 미국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경제위기가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와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에 종언을 고하는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가 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사실 미국경제는 이미 2007년 12월에 경기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IT 열기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기 직전인 2000년 4월 3.8%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실업률은 2009년 10월에는 10%까지 뛰어올랐다. 이는 전후 최고치였던 1982년 12월 10.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력을 다해 경제 살리기 작전을 펼쳤다. 마지막 임기의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와 의회는 7,0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금융기관에 공급하는 조치를 단행했으며 정권을 이어받은 오바마Barack Obama 정부도 경기부양 조치의 일환으로 7,87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재무성증권treasury bills(TB)을 팔아 막대한 규모의 돈을 빌려야 했으며 미국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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