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발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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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듣던 날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불갑산 앞쪽이고, 성자가 발견된 곳은 불갑산 뒤쪽이었다. 주막집 아들이었던 내게 그곳도 하필 주막집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둘의 경계에 밀재가 있었던 점도 예사롭지 않다. 예나 이제나 그곳은 세상에 회자될 때 늘 기이한 소식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신비가 넘치는 곳에 풍문도 넘친다. 그 시절에는 나도 이상한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무너미재 넘지 마소
무너미재 넘지 마소
화적들이 산다네
여기서 무너미재가 밀재이다.
진실은 때로 위험한 것에 속한다. 세상은 자신의 모습이 치명적일수록 특유의 소문과 낭설의 치맛자락을 펼쳐 얼굴을 가린다. 나의 유년기는 일거수일투족이 그런 안개 같은 보자기에 덮여 있었다. 길가에 뱀이 나타나면 돌팔매질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 “즉사 박사 조박사”도 그런 뜻이었을까? 진작 죽어야 마땅한 것이 왜 아직도 돌아다니느냐? ‘즉사 박사’에서 계열화되고 있는 뱀巳과 죽음死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데, 조박사는 뭔가 말이다. 구비가요의 허사虛辭 같은 것이려니 했다가 새삼 듣기를, 황성신문에 활빈당이 조부자를 털었단 기사가 났다 해서 뒤져보니 사실이었다.
조박사는 조부자의 아들이었다. 몇만 석인지 모를 대지주가 주름잡던 전통의 시대가 가고 신식 교육을 받은 아들의 시대가 열리던 무렵에 성자는 그곳의 저작거리를 방황했다. 육척 거구에 힘이 장사였지만 폭력의 유혹에 시달린 흔적이라곤 남기지 않았다. 1904년 영광 조부자를 턴 것이 의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의 이름을 빌려 극빈자들을 구휼하려 했으니, 연구자들은 그들이 동학 잔존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활빈당은 곡식 삼백석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눠주려 했는데, 영광 지방에서는 다들 두려워하면서 받지 못하자 함평 지방의 빈민들에게 차례가 돌아갔다. 여기서 영광과 함평은 멀어 보이지만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그냥 불갑산의 뒷면과 앞면일 뿐이다. 어쩌면 함평 쪽 골짜기에서 앓고 있었을 나의 할아버지도 쌀 몇 됫박쯤 얻었을지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태어난 주막에서 성자가 발견된 주막에 이르는 산기슭을 이렇게 화적들이 메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필시 땅에게도 팔자가 있다. 당시 불갑산을 앞뒤로 하여 밀래미에서 구수미에 이르는 어간, 특히 영광 백수 길룡리 인근을 가득 메운 숱한 풍문들이 극악한 화적과 함께 거룩한 성자도 길렀다는 사실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지금 당장의 흥분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 어린 날의 미혹 속에서 듣던 하찮은 풍문들이 모두 허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 순간에 몰려온 알 수 없는 환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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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어떤 성자도 고향에서 발견된 전례는 없다. 철부지 시절에 코 묻지 않은 인격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벌거벗은 생명체에게서 흘러나온 땟자국을 실컷 목격하고도 구원을 의탁할 사람은 없다. 왕자 출신이었던 석가모니 이야기조차 ‘출가’라는 극적 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소태산은 다르다.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구수미 마을의 주모였다. 고귀한 성자가 어쩌자고 주모 따위에게 발견된단 말인가?
그 사실은 나를 흥분하게 한다. 수심 깊은 바다의 전복은 가장 궁핍한 여성의 손에 채취되는 법이다. 해녀를 깊은 바다 밑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굶주림이다. 나는 주막집 아들로서, 조선시대를 측정할 가장 치명적인 잣대가 주모일 거라는 상상을 금할 수 없다. 주모는 그 시절 사회적 불운의 박물관이었다.
조선은 지상에 출현한 숱한 체제 중에서 가장 명민한 통치자들에 의해 도덕적 위엄을 떨친 기품 있는 선비 사회였다. 백일장에서 엄선된 시인들이 관리로 등용되고, 동리마다 배운 자의 공덕功德이 비석으로 서서 삼강오륜을 웅변한다. 하지만 그 깊고 깊은 세속의 기슭에는 음습한 맹독성 치부가 자라고 있었다. 시인 고은은 “음란함이란 창녀의 것이 아니라 규수의 것”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정결한 양반 지식인 사회는 절대적 가부장제를 철통같은 이념으로 수호했다. 조선에서 핏줄의 절대성을 거역하는 것은 내란음모보다 무서운 대역죄에 속했다. 그리하여 남존여비를 바탕으로 한 내외법, 축첩제, 과부의 개가 금지, 조혼, 씨받이 같은 악습이 성행했으며, 그 이데올로기적 거점으로서 가족제도가 절대화되는 것을 『논어』 『맹자』 같은 인문 고전들도 전혀 억제하지 않았다. 특히 조혼은 가계를 이을 아들을 쉽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맺게 될 인척간 동맹으로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비겁한 기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6세 여아는 칠십 냥, 7세는 팔십 냥, 10세 이상은 수백 냥으로 나이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매매혼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구수미 마을의 주모는 그러한 폐단들이 모여서 만든 가혹한 운명의 표본 같은 존재였다. 질곡으로 점철된 생애에 구원의 영감을 주지 못하는 자는 성자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존재의 신비를 불신할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예컨대, 이름 따위도 없었다. 어려서는 애기, 자라서는 큰애기, 호적에는 이씨 성을 가진 여자라 해서 이성녀李姓女라 기입됐다. 하지만 본이 어디인지, 참으로 이씨이거나 한 건지 증명할 것이라곤 없었으니, 사람들은 그녀가 낳은 아이의 별명을 따서 바랭이네라고 불렀다. 바랭이란 질긴 생명력을 가진 풀 이름이다. 훗날, 본인이 구술한 기록에는 ‘갑신년1884년 전라도 나주 영산포 출신’이라 되어 있다. 네 살 때 어떤 아저씨가 엿을 사주겠다고 꾀어 따라나선 뒤 양갓집 행랑에 모습을 드러낸 건 상품 가치로 절정을 향하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납치한 사내는 매우 우발적 범행자인지 모른다. 그는 어린 소녀를 납치하기는 했지만 적절한 보상을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숨어 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성녀를 인수한 영광 김진사 댁은 당시 그녀의 나이를 아홉 살로 셈한다. 납치에서 매매까지 오 년이 걸렸다면 그 사이를 잇고 있을 시간의 가혹함을 건너뛸 수 없다. 내 가슴의 떨림은 이런 데서 기인한다. 이성녀가 곧장 팔려가지 못하고 변방을 돌고 돌아 영광 바닷가 마을에 닿기까지 겪었을 풍찬노숙의 시련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까닭이다. 내 어림에는 아무리 손가락을 꼽아도 납치에서 매매까지 너끈히 오 년은 소요된다.
김진사 댁에서는 애기의 얼굴이 얽었어도 밉상은 아니었다고 했다. 틀림없이 잘생긴 여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에게 팔아야 하는데 장물아비는 이 물건을 데리고 어디로 튀어야 할까? 한반도의 곡창지대 전라도는 황금 들판을 탐내는 외부의 욕망들이 쉼없이 밀려드는 수난과 시련의 텃밭이었다. 위정자들은 바다와 들판이 겹치는 곳에 창고를 짓고 해군 사령부를 두어 지켜야 했다. 요즘의 사단급 규모에 이르는 ‘만호진’이 있던 자리가 그곳이다. 조선조 초기에는 나주 영산창과 영광 법성창이 전라도의 2대 조창遭倉에 속했다. 특히 법성포는 어물을 사고파는 장사치들이 들끓고, 술 먹고 놀기 좋은 곳이라 파시波市 철이면 장고 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영산강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토사로 메워지기 시작하여 영산창이 폐쇄되자 이제 법성창에서 전라도 27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모두 갈무리하게 된다. 개경 이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창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장물아비의 눈길은 그쪽을 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내는 납치한 여아를 영광 법성창 근처에서 팔아야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나주에서 영광으로 가자면 영산포에서 배를 타거나 무안, 함평에서 해변을 타면 된다. 하지만 그곳은 관아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양반들이야 무슨 상관일 것인가. 질긴 목숨 하나를 삼신할미가 떨어뜨린 곳이 전라도 변방이 되는 순간 그는 이미 동학군 잔당, 땡추, 역도, 화척, 유민이 아니면 고를 신분이 없었다. 그들이 도회로 여길 만한 곳이 숨은 장터뿐이라면, 화순 운주사 아래에서 비밀리에 열리는 중僧 장터를 통하지 않고는 도주로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광으로 닿는 지명들, 흥덕 부안 함평 무장 장성 정읍 고부 고창 옥과 담양 곡성 등 열두 고을의 큰길은 서울 경창으로 운반할 곡식을 모으는 곳이므로 항용 관군의 감시하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중장터를 빠져나와 무등산을 넘는다면 송정을 거쳐 황룡강을 따르다 외칫재를 넘어야 서해를 향한다. 한데, 그 길은 군데군데 해 떨어지는 고갯마루가 버티고 있어서 몇백 리가 몇만 리보다 멀다. 화적이 끊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동학 잔당 내지는 활빈당이 들끓는 길은 양반에게야 도적 소굴이지만 도망자에게는 관군의 습격을 피할 보호막이기도 했다. 더욱이 꼬깃꼬깃한 산기슭이라 사람이 살까 싶으면 마을이 나오고, 여기가 끝이 아닐까 싶어도 또 마을이 나온다. 마침내 서해에 닿아도, 갯가에 오막조막 붙은 게딱지 같은 집들이 말끔할 리 없다. 귀신 형상의 굴뚝들이 꽂힌 곳을 대개는 반도의 꼬랑지라 여기기 십상이지만 정작 땅 이름들은 부처님 외갓집보다 거룩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진 신성한 사람이 들어온 포구라 해서 법성포, 부처님의 광명인 듯 신령스러운 빛이 머문다 하여 영광, 절 이름도 불교가 시작된 곳이라 해서 불佛의 갑甲, 뜻인즉 부처의 첫 마당 불갑사인 것이다.
이 머나먼 도주로 위에서 애기가 홍역을 앓았다면 몇 계절을 허비하지 않을 수 없고, 곰보가 되는 것도 피할 길이 없다. 사내는 영광에 이르러 더는 버티지 못하고 대충 부잣집을 찾아서 이 가엾은 여아를 흥정하되 제값을 부르지 못하고 떨이로 넘겼다. 팔려온 아이가 ‘얼굴이 얽었어도 밉상은 아니’라는 간단한 문장 속에 이미 이런 내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정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광에서 애기를 맞은 것은 슬하에 자식이 없는 김진사였다. 사내는 그 앞에 엎드려, 미천한 집 아이가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약간의 보상을 주고 거두어달라고 읍소했다. 김진사는 이를 받아들여 애기를 부엌 동자치로 부리게 되었다. 그리고 곧 반전이 일어난다. 그 아이가 하루는 진사 어른의 갓을 보고 자기 할아버지의 것과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에! 집 없는 아이도, 미천한 아이도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김진사는 아이를 면천免賤시켜 수양딸로 삼고 열일곱 살이 되자 시집을 보냈다. 하지만 첫애를 낳고 남편이 병사하여 홀몸이 되었다. 열녀로 수절하려 드는 것은 팔려온 계집의 내력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김진사 댁의 덕성이 빛을 발한다. 이성녀는 수양어머니가 반겨주는 친정집에 얹혀살다가 다시 한번 사내를 만났다. 이번에는 대장간 사내와 살림을 차리고 또 한 차례 아이를 낳았는데, 야속하게도 대장장이조차 도주를 해서 다시 홀몸이 되었다. 씨 다른 자식만 둘 가진 과부가 살기에 패망 직전의 조선은 너무도 힘들었을 것이다. 서방을 둘씩이나 잃은 여편네가 서 있을 땅은 조선 천지에 없다. 바랭이네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에 엎드려 겨우 숨이나 쉬어야 되는 처지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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