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
1990년 1월 1일,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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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공산 체제하에서 일반적으로 외면당하기 일쑤였지만 대통령이 매년 1월 1일에 신년사를 하는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통이었다. 이 신년사가 있기 이틀 전에 하벨은 공산당 대표들이 여전히 주도권을 행사했던 의회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연설은 번역되어서 널리 회람됐다. 지금 판본은 약간 편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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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는 새해만 되면 표현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이야기를 신년사라며 들어왔습니다. 이 신년사는 으레 나라가 얼마나 발전했고, 얼마나 많은 철강이 생산됐고, 얼마나 우리가 행복해졌는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정부를 지지하고 신뢰하게 됐는지 떠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짓말이나 하라고 여러분이 저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 안에 숨어 있는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잠재력은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습니다. 산업이라고 있지만 쓸모없는 물건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생필품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노동자의 나라라고 자부하면서도 노동자의 자존심을 짓밟고 착취할 뿐입니다. 시대에 뒤처진 경제는 가뜩이나 모자란 에너지를 축내고 있습니다. 한때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던 국가가 이제는 교육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교육 수준은 세계 72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땅과 강, 그리고 숲도 청정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염된 환경에 살게 됐습니다. 노인들조차도 유럽의 평균수명에 미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사담 하나 할까 합니다. 최근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비행기에서 회의를 하던 중에 잠깐 항공기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슬로브나프트Slovnaft 화학 산업 단지와 그 뒤에 펼쳐진 거대한 페트르잘카Petržalka 주택단지가 보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정치가들과 지도자들이 비행기 창문을 통해 보고 싶어 하지 않은 피폐한 광경이었습니다. 아무리 통계를 훑어봐도 왜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병들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당연한 듯 언행 불일치를 용인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믿거나 존중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랑, 우정, 연민, 겸손, 용서 같은 말들은 부박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을 읊조리면 오직 개인적인 심리 특성이나 오래전에 멸종된 고대의 인사를 흉내 내는 말처럼 여겨지게 됐습니다. 컴퓨터와 우주선의 시대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나마 우리 중 양심 있는 이들만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횡을 휘두르는 것은 부당하고, 전문 농장이 생태 친화적인 농산물을 모두에게 공급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학교와 아동보호 시설, 병원에게만큼은 공급해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오만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던 전체주의 정권은 인간을 생산력으로만 간주했습니다. 자연을 생산의 도구로만 비치게 만들었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뿐만 아니라 둘의 관계를 공격했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은 재능 있는 인재들을, 도무지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어마어마하게 크고 요란하며 악취 나는 기계의 너트와 볼트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전 정권도 그 너트와 볼트가 닳아감에 따라 돌이킬 수 없이 서서히 망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타락한 도덕적 환경은 유기농 채소나 먹으며 비행기 창밖의 피폐한 현실을 무시하는 위정자들의 문제만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모두 전체주의에 어느새 길들여졌고, 이 체제는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여 순응했으며, 그 결과 전체주의의 지속에 우리 자신이 기여한 셈이 됐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이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전체주의의 희생자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공범이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지난 40여 년 동안 남겨진 비극적 유산을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유산은 우리가 저지른 죄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우리 모두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 지배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사실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우리 각자가 혼자 알아서 신속하게 실행해야 할 의무들을 방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해둡시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정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의회와 대통령도 저절로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부와 의회, 그리고 뛰어난 대통령이 제시하는 처방만을 학수고대하는 것도 역시 적절한 태도는 아닙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참여와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주의에 드리운 공포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마음에 다시금 희망이 깃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공통 관심사를 바로잡고자 노력해야 희망이 생깁니다. 특히 평화혁명의 막바지 6주 동안 우리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잠재력과 시민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잠재력과 문화는 무관심이라는 강요된 가면 뒤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우리를 가리켜 누군가 이러저러하다고 단정해버릴 때마다 저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란 매우 불가사의한 피조물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면면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세계 도처에 있는 이들은, 온순하고 내성적일 뿐만 아니라 겉보기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들이 단지 몇 주 만에, 참으로 품위 있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전체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그 힘의 원천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물어봅시다. 전체주의 이외의 다른 체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젊은이들이 진리를 위한 그들의 열정,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사랑, 정치 이념, 시민적 용기와 겸손함을 도대체 어디에서 발견했을까요? 잃어버린 세대라던 그들의 부모들은 어떻게 자신의 아들딸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조언이나 지시 없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우리의 최근 상황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에서 희망을 줍니다. 첫째, 사람들은 그저 외적 세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과 스스로를 연결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 세계가 아무리 사람들 안에 있는 그런 능력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려고 들어도 사람들은 반드시 저항합니다. 둘째로, 인문학적이고 민주적인 전통들이 우리 민족과 인종적 소수자들의 무의식 속에서 잠들어 있었기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 우리들 각자가 그런 전통들을 적절한 시기에 발견해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1950년대에는 많은 이들이 옥사하고 처형당했습니다. 삶이 황폐화됐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재들이 조국을 등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민족의 명예를 지켰던 사람들, 전체주의에 항거했던 사람들, 오직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려던 사람들 모두가 처형됐습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의 대가를 지불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독립 법정은 처형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유죄 여부를 공명정대하게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과거의 진실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 역시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를 위해 우리 못지않게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다른 민족들도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자유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헝가리, 폴란드, 독일, 최근에 루마니아를 적셨던 피의 강뿐만이 아니라 소련 연방의 민족들이 흘린 피의 바다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고뇌는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피의 강과 바다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많은 희생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게 된 자유와 소비에트연방에서 풀려난 민족들의 비극적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희생의 역사는 우리 자신이 새로 발견한 자유의 배경이기도 한 것입니다. 소비에트연방,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동독에서 이루어진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조국에서 어떤 사건도 목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평화로운 수순을 밟으면서 진행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국제적 조건이 협조적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혁명 막바지 몇 주 동안 다른 이들이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이나 열강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자립해왔습니다. 이 자립심이야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위대한 도덕적 자산입니다. 이래야 신세 진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희망 사항이 실현될지, 우리의 자신감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깨어날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오만을 자신감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자신감 있는 개인이나 민족만이 타인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를 대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적을 용서하고 죄를 뉘우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삶과 국제 무대의 활동 모두에서 이런 자신감을 갖도록 합시다. 오직 이럴 때만 우리는 자존심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 다른 민족의 존경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부속물이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수용과 배움은 무엇이든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등한 파트너여야 가능합니다.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Masaryk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예수”라고 썼습니다. 우리의 철학자인 헬치츠키Chelčický와 코메니우스Comenius를 계승한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이런 사상을 유럽과 세계에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 우리나라는 사랑과 이해심, 지적 능력과 사유의 힘을 세계만방에 펼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국제정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마사리크는 정치의 의미를 도덕에서 찾았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마사리크의 정치를 복원해봅시다. 정치가 공동체를 속이거나 약탈하기 위해 필요한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에 공헌하려는 열망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가르쳐봅시다. 정치란 가능의 예술일 수 있습니다. 특히 ‘가능’에 투기, 계산, 모의, 뒷거래, 조작이 포함된다면 그러합니다. 정치는 불가능의 예술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과 세계를 향상시키는 예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나라이지만 한때는 유럽의 정신적 교차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도움을 다른 이들에게 갚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자산이 아닐까요?
우리가 키운 마피아 집단과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특별하게 키운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면서 소란을 피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의 주적이 아닙니다. 심지어 국제 마피아 집단도 우리의 주적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오늘날 주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최악의 본성은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최악은 공공선에 관심 없는 자만심, 개인적인 야망, 이기심과 경쟁의식입니다. 이런 최악의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자유선거를 치러야 합니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지금까지 깨끗한 면모를 잃지 않고 있는 평화혁명의 이미지를 더럽히지 맙시다. 권력의 이전투구로 혼란에 빠진다면 한때 우리에게 지지를 보냈던 세계는 등을 돌리고 말 것입니다. 공동선을 향한 열망이라는 공정성을 가장하면서 실상은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기만을 반복하지 맙시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거에서 뽑힌 이들이 최고의 정치인들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공적인 책무를 다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능하고 전문성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런 인재들이라면 정치적으로 어떤 편에 서든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미래의 정책과 국가의 위신은 우리가 대표로 뽑아 의회로 보낼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일 잘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어김없이 창밖을 내다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동료 시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주의해서 듣는 대통령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꿈꾸는 공화국이 어떤 공화국인지 궁금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공화국은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입니다.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사회적으로 정의가 넘치는 공화국입니다. 한 명 한 명에게 봉사하는 자애로운 공화국입니다. 그리고 개인과 국가가 서로 돕는 공화국입니다. 다재다능한 인격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의 개개인이 솔선수범해서 돕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 중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임 대통령들 중 한 분은 체코의 위대한 교육가 코메니우스의 말로 첫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서 저의 첫 연설을 끝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정부가 돌아왔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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