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니체 세대: 황홀경, 에로스, 과잉
니체의 인생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찬송가집 50만 권 때문에 인쇄소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던 일보다 훨씬 더 큰 아이러니는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지성계와 문화계에 폭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정신이상과 긴장증catatonic을 앓고 있어서 당시에 벌어진 상황을 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의미 있게 폭넓은 대중의 관심을 얻었다. 물론 그때까지 니체가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티븐 애슈하임은 구스타프 말러와 빅토어 아들러가 이미 1875년경에 니체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영향은 소소하고 단편적이었으며, 니체와의 ‘대결’이 거의 필수 과정처럼 된 것은 18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니체의 명성은 삽시간에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그 어디보다 뜨거웠던 곳은 물론 독일이었다. 학자나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체, 혹은 당시의 용어에 따르자면 ‘니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독일의 중산층에서는 음악과 니체 테스트 낭독이 곁들여진 저녁 사교 모임이 흔한 일이었다.
〈서문〉에서도 언급했듯이 니체의 호소력은 부분적으로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서정적인 힘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독일인 상당수는 니체를 자랑스러워했다.
단단한 지혜
독일적인 것과 독일적이지 않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두고(실제로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바뀌었다) 19세기 내내 논쟁이 이어졌고, 니체는 이 논쟁에 억지로 끌려 들어갔다. 1890년대 내내 그리고 그 이후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니체의 독일성과 니체-독일 관계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상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에 따르면 독일성은 니체와 그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일례로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니체에 대해 한 말을 보자.
“괴테의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었고, 이 말은 그의 인생이 무엇인가를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수많은 독일인이 괴테를 존경하고 그와 함께 살고 그에게서 지지를 얻는다. 그렇지만 괴테는 결코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니체의 효과는 변화다. 그의 비전이 지닌 선율은 그의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의 작품은 우리가 과거의 한 조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종복으로 만드는 하나의 과제다. … 초월적 세계의 이상을 용인하지 않는 시대, … 니체가 체사레 보르자라는 이름으로 세례한 부류의 가차 없는 행동만이 유일한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에 … 현실의 역사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는 한 민족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궁지에 몰렸을 때 위로해주는 대신 거기서 빠져나오게 해줄 삶의 지혜를 가져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독일사상사에서 그러한 단단한 지혜는 니체와 더불어 처음으로 등장했다.
카를 융도 슈펭글러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융은 개신교가 가톨릭에서 자라나 가톨릭을 넘어섰던 것처럼, 니체는 개신교를 넘어선 발전 단계라고 보았다. 융은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개념이 ‘인간 내면에서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전문가들도 열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니체 추종자들 대다수가 1890년대의 젊은이들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이는 당시 독일제국이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미하게 여겨지던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그 사람들은 니체를 새로운 세기를 열어줄 중추적인 인물로, ‘붓다나 차라투스트라, 예수 그리스도에 비견할 만한 위상의 인물’이라고 여겼다. 추종자들은 그의 정신이상에까지 영적 특질을 부여했다. 니체라는 인물은 그 자신이 지은 이야기 속의 광인처럼 자신이 지닌 비전 때문에, 그리고 아직 그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회에서 겪은 소외 때문에 광기로 내몰렸다고 보았다. 모든 극단적인 삶의 형태에 매혹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고 여겨 정신이상에도 매력을 느꼈던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니체가 자신들의 대변인이자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반대자들은 ‘한 시절 열변을 토하다가 이내 스러져갈 타락한 자’라며 무시하고 넘겼지만, 그것은 상당히 빗나간 생각으로 드러났다.
니체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 분열되었지만 그의 인기는 높아져만 갔다. 장편소설과 희곡은 그렇지 않아도 극적인 그의 이념들을 묘사하고 극화했다. 전 유럽에 ‘도취적인’ 차라투스트라 경험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르코르뷔지에는 1908년에 ‘차라투스트라-체험Zarathustra-Erlebnis’을 했다. ‘힘에의 의지’라든지 ‘위버멘쉬’ 같은 니체의 개념도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를 잡아갔다. 1896년 11월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초연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에게서 자극을 받아 창조된 주요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말러의 교향곡 3번의 제목은 원래 니체의 책 제목과 같은 ‘즐거운 지식’이었다.
삽화가 많은 화려한 잡지 《판Pan》은 니체를 기리는 니체 추종자들의 시를 실었을 뿐 아니라, 니체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품 화보도 실었다. 189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어디에서나 니체의 초상을 볼 수 있어서 그의 덥수룩한 콧수염은 널리 퍼진 시각적 상징이 되었고, 니체의 얼굴은 그의 아포리즘만큼이나 유명해졌다. 1890년대 중반부터는 (니체의 여동생이 좌지우지하던) 니체기록보관소의 부추김으로 ‘니체 컬트 상품’이 상당히 많이 유통되었는데, 만약 니체가 당시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분명 격노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 있는 자기 서재 벽에 니체의 얼굴 그림 두 장을 붙여두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유명 작가가 헤세만은 아니었다. 니체의 얼굴은 장서표에 새기는 장식으로도 인기를 끌었는데, 그중 어떤 그림에서는 가시면류관을 쓴 말기의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었다. 노동계급의 언론은 그의 이미지를 자본주의의 상업화된 문화를 조롱하는 친숙하고도 편리한 도구로 이용했다.
심지어 니체풍 ‘생활양식’을 채택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예는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페터 베렌스였다. 그는 자신의 ‘차라투스트라풍’ 빌라를 스스로 설계하여 실험적인 다름슈타트 예술가 마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 집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미덕’을 내뿜는, 차라투스트라의 다이아몬드와 독수리 같은 상징물로 장식되었다. 베렌스가 1902년 토리노 박람회를 위해 디자인한 독일 전시관에서는 이조차 능가해버렸다. 초현실적인 동굴처럼 꾸며진 그 공간에는 독일제국의 산업적 역량이 전시되었고 그 속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베렌스는 그 광경을 차라투스트라가 빛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표현주의 건축가인 브루노 타우트1880~1938년는 니체와 연관되어 니체와 함께 등장한 산악 숭배의 유명한 선구자가 되었다. 타우트의 ‘알프스 건축’은 사슬처럼 이어진 산들을 ‘성배의 사원과 벽이 수정으로 뒤덮인 동굴 풍경’으로 바꿔놓으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모든 대륙이 ‘광선으로 된 돔과 반짝거리는 궁전의 형태로 된 유리와 보석’으로 뒤덮이게 하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니체 키치
차라투스트라식 ‘베르그아인잠카이트Bergeinsamkeit, 산속의 고독’, 즉 ‘복잡한 도시에서 탈출하여 청정한 산속 공기를 마시고 싶은 갈망이 유행한 것도 유사한 성격의 일이었다. 화가이자 또 한 명의 유명한 니체 추종자인 조반니 세간티니는 《차라투스트라》를 쓸 때 니체에게 영감을 주었던 산지인 엔가딘의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그곳으로 몰려든 수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을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큰 인기를 누렸는지 알 수 있다. “‘고독 체험’이 대중적인 사업이 되었다!” 니체가 알았더라면 기겁을 했을 이러한 니체 키치 산업의 변성은 ‘속물들’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인기를 누렸는지 증명하는 또 하나의 역설적인 증거다. 파울 프리드리히의 희곡 《제3제국The Third Reich》은 《차라투스트라》를 무대에 올린 여러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금색과 은색으로 된 의상에 자주색 코트를 입고 금발 머리에 금색 리본을 매고 어깨에는 무심하게 표범 가죽을 걸치고 등장한다. 때때로 니체 숭배가 니체까지 제치고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었다. 1893년에 막스 노르다우는 ‘니체 유겐트Nietzsche Jugend, 니체 청년’에 관한 글을 쓰며 마치 그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인 양 묘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에는 ─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나머지 유럽 지역에도 ─ 니체 세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토마스 만도 그 점을 분명히 의식했다. “1870년 무렵에 태어난 우리는 니체와 아주 가까이 있었고, (어쩌면 지성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비극과 개인적 운명에 동참했다. 우리의 니체는 전투하는 니체였다. 승리에 찬 니체는 우리보다 15년쯤 뒤에 태어난 이들에게 속하는 니체다. 우리는 그로부터 심리적 감수성과 서정적 비판을, 바그너 경험과 기독교 경험을, ‘모더니티’ 경험을 얻었으며, 언제까지고 그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기에 그 경험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심오하며 너무나 유익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니체는 사회주의의 힘과 유사한 새로운 유형의 도전으로 여겨졌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근대의 ‘유혹자’로도 여겨져, 그를 지지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의 혐오스러운 균등화’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보이기도 했다. 게오르크 탄처는 니체주의가 ‘고립과 사명감 사이에서, 사회에서 물러나고 싶은 충동과 사회를 이끌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 하던, 매인 데 없던 당대 지식인들의 욕구에 꼭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897년에 펴낸 니체 숭배에 관한 책에서 니체주의를 ‘유사-해방적’이라고 비난했다. 사람들은 ‘창의적인 힘을 분출할 가능성에, 편협한 권위와 인습적 통념을 극복하라는 부추김에, 자유로운 자기표현에 매혹’되었지만, 사실 니체주의는 피상적이며, 당시의 사회민주적 시대정신과 상당히 어긋나는 엘리트주의와 보수적인 ‘자유방임적 기능들’에 복무한다는 비판이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1908년에 나온 《니체 숭배: 인간 정신 일탈사의 한 시기The Nietzsche Cult: A Chapter in the History of Aberrations of the Human Spirit》을 보면 철학자 볼프강 베커 역시 그렇게 많은 ‘문화의 권위자들’이 니체의 메시지에 매혹되는 것을 의아해 한다. 그래도 그는 니체 숭배가 사람들의 무리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토마스 만의 말에는 동의했다. 젊은이들에게는 니체의 분석이 ‘심오하게’ 보였고, 아프리카에 파견된 독일인 식민지 관료들은 니체의 ‘주인의 도덕’ 개념이 ‘식민 지배 방식’에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여겨, 실제로 매일 실행에 옮겼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게오르크 지멜도 니체의 색채를 빌려왔다. 지멜의 중심 개념인 ‘고귀함Vomehmheit’은 전적으로 니체에게 빚진 개념이다. 지멜은 고귀함이 개인을 ‘대중으로부터 분리하고 고상함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고귀함이란 돈의 경제에서 개인적 가치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딜레마에서 연유한 새로운 이상이었다. 니체는 고귀함과 아름다움, 힘과 같은 특정한 가치들을 추구하라고 권유하면서, 그 가치들은 삶을 향상시키고 ‘이기주의를 장려하는 대신 자기통제를 강화하라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주의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뿐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파시즘에까지 봉사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니체 추종자들은 근저에 깔린 착취는 언급도 하지 않고 사회경제적 계급 구조를 고스란히 남겨두는 부르주아의 사이비 급진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니체가 신보다 훨씬 먼저 죽었다는 역설적인 말을 곧잘 하지만, 애슈하임은 니체가 한마디로 ‘묻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895년에 프란츠 제르비스는 ‘니체는 배움의 조각이 아니라 삶의 한 조각, 우리 시대의 가장 붉은 피’라고 썼다. 니체는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아,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 우리 중 단 한 명도 그 일을 피해갈 수 없으리.” 이 책에서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 말은 옳았다.
니체기록보관소의 소재지를 바이마르로 정한 것은, 바이로이트에 머물렀던 또 한 명의 자칭 독일 정신성의 수호자 바그너의 전당과 유사한(능가하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당을 모방하려는 의도였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와 그 동료들은 의도적으로 니체를 기념비적 인물로 만들고 신화화했다. 니체기록보관소는 ‘단순한 기록보관소가 아니라 창조적 힘들의 거처’였고, 엘리자베트는 ‘권위 있는’ 니체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오빠 프리드리히를 ‘탈병리화’하고, 그의 사상에서 전복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자신이 보기에 ‘존경할 만한’ 인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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