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강남 개발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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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이전의 강남
‘강남’이란 말이 없던 시절
따지고 보면 강남은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이나 둔촌동 유적이 증명하듯이 오히려 강북보다 먼저 사람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던 곳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는 한강 이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를 수도로 삼았고 당시 이곳은 한반도 남부의 명실상부한 중심이었다. 이 책에서는 오래된 유적인 봉은사와 왕릉 등을 다루기는 하지만 현대 강남이 건설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도시 형성에 가장 필수적인 지형적 여건을 알아보자, 1960년대만 해도 한강 이남의 구(區)는 영등포구가 유일했다. 영등포구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성된 공단이 있었고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노량진까지 허름하나마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의 유일한 한강 이남 행선지는 영등포였다.
즉 한강 이남에서 개발된 지역으로는 영등포가 유일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일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남쪽을 막고 있어 노선을 금천과 영등포 쪽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지역─신사동에서 양재동까지─에 철도를 놓았으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기 전의 강남은 전체적으로 저지대인 데다 습지가 많아 공사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던 때1899~1905년에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철도 완공을 서두르는 중이었으니 금천, 영등포 방면 외에 다른 안을 고려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경부선, 경의선에 이어 경원선, 중앙선, 경춘선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전혀 강남을 경유하지 않고 건설되었고 서울은 서울역과 사대문 안, 영등포역,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1963년 이전까지 ‘강남’은 아직 서울이 아니었다. 이때 ‘강남’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이고 달구지나 지나다니는 소로小路들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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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강남’이란 말이 쓰이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그때는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시골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강북의 맞은편을 뜻하는 ‘강남’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1917년 인도교인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가 놓이면서 다리 남단인 오늘날 동작구 노량진 본동과 흑석동 일대가 처음으로 ‘강남’의 지위를 갖게 된다. 실제로 서울에서 이름에 ‘강남’을 붙인 첫 번째 기관은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강남중학교였다. 지금도 동작구에 가면 강남초등학교, 강남중학교, 강남교회 등 이름에 ‘강남’이 붙은 곳들이 적지 않다. 즉 강남의 원조는 바로 동작구인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만 해도 한강 남쪽의 중심은 영등포였고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강남’은 이를테면 ‘한강 남쪽’이 아니라 ‘영등포 동쪽’이었다. 사실 ‘강남’이란 말조차 50년 전에는 생소했다.
강남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개발 잠재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한강이 큰 장벽이었다. 오늘날에야 한강 다리가 흔하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한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국가적 대역사였다. 1917년 최초의 한강 다리인 제1한강교(한강대교)가 건설되었는데 이후 두 번째 다리인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건설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1965년 제2한강교가 완공되자 서울 시민 수십만 명이 개통식을 구경하러 나오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강 다리를 보는 느낌이 오늘날 감각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강남 개발 시대가 임박하다
1960년대에 서울은 포화 상태였다. 전국 농촌에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들고 있었다. 서울의 인구 급증은 주택난 등 도시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수도 방위 차원에서 심각한 안보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4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되는 형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한 1백만 명가량의 시민이 공산 치하에 남겨져 고초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정부 차원에서 두 가지 대안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행정수도 이전 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을 사수하되 도심 기능을 분산시켜 위험을 최소화하는 안이었다. 정부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 시기는 서울 도시 개발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는 돌이킬 수 없으니 이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강남 개발은 규모가 작아지고 더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북 분단이 지금의 강남을 만든 결정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한국은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으로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유사시 피난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강남 개발을 결정했다.
남북 분단 상황 외에 다른 이유도 한몫했다. 강남은 지대가 낮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개발 가능한 공간이 엄청나게 넓다는 장점도 있었다. 1966년 9월 19일, 서울시는 반포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800만 평의 부지를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건설부에 요청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1970년 후반에 상공부 산하 12개 공기업의 청사 건립 계획이 확정되면서 강남 개발 부지─정확히는 영동 개발 부지─의 면적은 무려 937만 평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사대문 안 면적이 500만 평에 불과했음을 떠올리면 강남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이때 강남의 땅값은 강북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였다.
강남의 또 다른 장점은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이었다. 한강은 분명 강의 남북을 가로막는 큰 장벽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일단 이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즉 다리를 놓을 수만 있다면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지척이었다. 이렇게 대세가 결정되어 가면서 강남 개발은 공공이든 민간이든 점점 확신할 수 있는 사업이 되어 갔다. 특히 그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시대가 막 도래하고 있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는데, 경부고속도로는 강남 개발의 효시가 되었다. 그해 말 전국에 등록된 자동차 수는 도합 12만 5,409대였고 그중 서울에 등록된 차량 수는 약 5만 9천 대에 지나지 않았다. 자가용 승용차로 한정하면 전국에 2만 8,687대, 서울에는 2만 2,043대가 있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 전국의 자동차 수는 2천만 대를 넘어섰고, 서울, 경기, 인천을 합친 수도권에 등록된 차량 수는 9백만 대를 넘는다. 45년 만에 전국적으로 160배가 늘어난 셈이니,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가히 폭발적인 증가세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자동차 시대가 개막하는 순간에 강남 개발이 결정되고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보다 강남이 자동차 시대의 수혜를 받았다.
결국 강남 개발은 1)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도심 기능의 분산, 2) 엄청난 개발 가능 면적, 3) 개발을 통한 정치자금 조성, 4)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 5) 자동차 시대의 도래 같은 여러 요인과 조건이 맞물려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양 도성의 두 배가 넘는 광활한 땅이 완벽한 현대 도시로 바뀌는 데 걸린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초고속 상전벽해의 도시 개발사였다. 그렇다면 강남 개발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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