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951년 임신
어, 내가 생긴다! 나는 현관 복도로 통하는 방의 벽난로 석반 위에 놓인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을 울리는 사이 배 속에 들어선다. 시계는 한때 (앨리스라는) 우리 증조할머니의 것이었다. 그 지친 종소리에 맞춰 내가 세상 속으로 끼어든다. 나는 첫 타종 소리에 시작해 마지막 종소리에 완성되는데,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굴러 나와 꿈도 없는 곤한 잠에 빠진다. 친구 월터와 버나드 벨링과 함께 펀치볼에서 마신 존 스미스 베스트 비터 오 파인트 덕분이다. 어머니는 내가 무無에서 하나의 존재로 옮아오던 순간에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면 종종 그러듯이. 물론 아버지는 강철처럼 굳센 사람이어서 어머니의 그런 시늉에도 아랑곳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조지이고 나이는 어머니보다 족히 열 살은 많으며, 이젠 옆에서 아예 코까지 골고 있다. 어머니의 이름은 베레니스지만 그냥 다들 번티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번티’는 별로 어른 이름 같지가 않다. 다른 이름을 지닌 어머니 밑이었다면 내 형편이 좀 나았을까? 평범하게 제인이거나 어머니답게 마리아였다면? 아니면 순정 만화에 나오는 이름처럼 너무 유치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낭만적인 느낌이 드는 오로라나 카밀이었다면? 이젠 너무 늦었다. 물론 번티는 앞으로 몇 년은 ‘엄마’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조금 후면 적절해 보이는 어머니 명사가 단 하나도 없어 (엄마, 마, 음마, 어마, 으마, 엄아, 음아 등으로 불러보다가) 어떤 말로도 번티를 부르는 걸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겠지만. 불쌍한 번티.
우리는 ‘가게 윗집’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부엌과 식당이 모두 가게와 같은 층에 있는 데다 지형학적 관점에서 따져보더라도 ‘뒷마당’은 집에 딸린 곳으로 봐야 할 테니까. (애완동물 가게인) 우리 ‘가게’는 으리으리한 요크 대성당의 위용 아래 납작하게 엎드린 옛 거리 중 한곳에 있다. 이 거리에는 최초의 인쇄업자가 살았고, 도시의 유리창을 화려한 빛깔로 채우던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이 살았다. 영국 북부를 정복했던 제9이스파니아 군단은 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 거대한 요새의 숙영지였던 이 거리에서 이리저리 행군을 했다. 가이 포크스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딕 터핀이 이 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또 다른 위대한 영웅이랄 수 있는 로빈슨 크루소도 원래 이 도시가 낳은 아들이다. 이 중에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거리는 역사로 들끓는다. 우리 가게가 들앉은 건물은 몇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벽은 기울고 바닥은 경사져 마치 중세의 유령의 집 같다. 이 터에는 고대 로마인이 살던 이래로 쭉 건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기처럼 가벼운 유령들이 이 집 구석구석을 으레 자기들 몫인 양 차지하고서 온갖 세간을 휘감은 채 애처롭게 우리 등 뒤에 머문다. 특히 우리 집 유령들은 계단 위에 빽빽한데 그런 계단들이 많다. 또 유령들이 수군대는 이야깃거리도 많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바이킹이 철썩거리며 노 젓는 소리, 해러게이트 탤리-호 역마차가 덜그럭거리며 자갈길 위를 달리는 소리, 무도회가 열리는 대연회장에서 고대인들이 발을 톡톡 찍고 질질 끌며 내는 소리, 스턴 목사가 사각사각 깃펜 놀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게 윗집은 지리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원초적 규칙이 있으며 왕좌를 두고 경쟁하는 두 명의 도전자 조지와 번티가 있는, 독립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왕국이기도 하다.
번티는 임신 탓인지 짜증이 일어나는데, 이건 어머니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이럴 때면 번티는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겨우 꿈을 잔뜩 실은 편치 않은 잠에 굴복하곤 한다. 나의 어머니로서 맞이하는 첫날 밤에 꿈의 제국이 제공하는 꿈 목록에서 마음대로 꿈을 고르라고 선택권을 줬건만 그녀는 고작 쓰레기통 꿈을 골랐다.
쓰레기통 꿈속에서 번티는 뒷마당 언저리에 있는 무거운 쓰레기통 두 개를 힘겹게 옮기고 있다. 이따금 휙휙 불어대는 지독한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은 눈과 입에 턱턱 들러붙는다. 그리고 번티는 특별히 쓰레기통 하나에 점점 경계심이 인다. 어쩐지 그 쓰레기통이 인간의 성격을 띠려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조지와 같은 성격을.
번티가 갑자기 쓰레기통 하나를 힘껏 끌어당기는 바람에 쓰레기통이 휘청대며 쨍그랑탕탕탕! 요란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쓰러지더니 콘크리트로 된 마당에 온갖 내용물들을 토해낸다. 대부분 가게에서 나온 잔해들인 이 쓰레기들은 사방팔방으로 널브러진다. 윌슨표 비스킷 가루 빈 봉지, 납작해진 트릴 곽, 감자 껍질과 달걀 껍데기를 차곡차곡 채워 넣은 키티캣과 채피 깡통, 그리고 아기의 절단된 사지가 들어 있을 법한, 신문으로 싼 이상한 꾸러미들까지. 이 엉망진창 속에서도 번티는 자기가 정리한 쓰레기가 얼마나 깔끔한지 확인한 순간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쓰레기를 하나하나 줍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때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낌새가 느껴진다. 아, 안돼! 번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것이 조지 쓰레기통이라는 걸 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조지 쓰레기통이 이제 번티보다 훨씬 더 커다란 거인으로 자라나서는 더러운 금속 깊숙한 곳을 번티를 막 빨아들이려는 찰나…….
나는 왠지 이 꿈이 나의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징조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른 꿈을 꾸는 어머니였으면! 아이스크림 같은 구름이나 얼음사탕 같은 무지개, 하늘을 가로지르는 황금빛 마차 같은 태양 꿈을 꾸는…… 그래도 걱정할 것 없다. 이제 곧 새 시대가 열릴 테니까. 오늘은 5월 3일이고, 조금 있으면 왕께서 영국제(祭)의 개막식을 거행할 것이며, 창밖에서는 새들이 합창을 하며 나의 도래를 알릴 것이다.
정원에 있는 새들의 팡파르에 아래층 애완동물 가게의 ‘앵무새’가 이내 꽉꽉거리며 동참할 것이고, 또 그다음엔…… 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머리맡의 알람이 울리자 번티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서는 시계 꼭지를 툭 내리친다. 번티는 잠시 가만히 누워 집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발견의 돔은 이제 곧 미래를 고대하는 영국인들의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가득 찰 테지만, 우리 집은 이따금씩 들리는 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하기만 하다. 심지어는 집 안 유령들마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거나 커튼레일을 따라 몸을 쭉 뻗은 채 잠들어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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