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거스름돈은 가져요
맨해튼과 바꾼 구슬
유럽인들은 차라리 대수탈시대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법한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갔다. 이들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는 방식은 바로 죄책감 없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보물과 향신료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시작된 이 단순한 경주는 머지않아 세계를 손에 넣기 위한 경쟁으로 바뀌었다.
포르투갈은 야만적인 군대를 고용해 신대륙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신이 자신을 신대륙의 지배자로 간택했다고 말했다. 영국은 정복의 정당성을 설명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네덜란드는 정복보다는 ‘쇼핑’하길 더 즐겼다. 1626년 네덜란드인 페터르 미나위트Peter Minuit는 동부지방에 거주하는 델라웨어Delaware족 레나페Lenape 인디언에게 24달러어치의 유리구슬과 장신구를 주고 맨해튼 섬을 헐값에 사들였다.
맨해튼을 거래한 이 이야기는 미국 역사상 논란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킨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제일 큰 사기 행각으로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거래가가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정밀한 분석과 재검증이 이어졌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면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불공정하므로 맨해튼을 ‘원래’ 주인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바로 거래가 일어난 1626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양쪽 다 거래에 아주 ‘만족’했다는 점이다.
공정한 거래
1626년 5월, 거래 당시 페터르 미나위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들의 안전과 통합을 위해 넓고 위험하지 않은 땅덩이를 매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미나위트는 신대륙에 발을 들인 첫 네덜란드인도 아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땅을 사라는 임무를 받은 첫 식민지 총독도 아니다. 그의 전임자는 네덜란드 개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횡령꾼 빌럼 페르휠스트Willem Verhulst였다. 페르휠스트는 사업에도 재능이 없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서는 이 점이 아주 골칫거리였다. 페르휠스트에게는 델라웨어족과 계약을 체결할 능력이 없었다.
모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들과 신대륙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지배자들은 어떤 ‘원주민’이든 언제나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신대륙을 새로운 사업 기회로 봤고, 사업 파트너를 배척해서 얻을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다.
1626년 9월 23일, 주변 인물을 거의 다 적으로 돌린 페르휠스트가 불명예스러운 귀환길에 오르자마자 미나위트가 새 식민지 총독이 됐다. 1626년 5월, 미나위트는 오늘날의 맨해튼 섬을 지체 없이 사들여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다른 네덜란드인 다섯 명과 함께 비슷한 방식으로 현재의 스태튼 섬Staten Island: 미국 뉴욕만 서쪽의 섬_옮긴이을 카나시Carnarsee 부족에게 사들이기도 했다. 스태튼 섬의 거래 증서는 아직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하기에는 거래를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너무 많아 보인다.
사실 미나위트는 뉴암스테르담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맨해튼 섬에 있던 원주민들과 처음 접촉할 때부터 그 땅에 사는 원주민이라면 모두 적당하다고 여길 만한 가격을 지급하고 땅을 매입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1626년 5월 4일, ‘원주민’들은 60길더(약 24달러로 환산할 수 있다.)어치의 구슬과 단추를 받고 맨해튼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넘겼다.
말도 안 되는 가격 아닌가? 틀림없는 사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미국 원주민 연구의 권위자인 시카고대학교 레이먼드 포겔슨Raymond Fogelson 교수는 이 거래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정말 구슬로 값이 치러졌다고 말한다. 혹시 미나위트와 흥정했던 레나페 인디언들이 땅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 아니라 단순히 거주권이나 자원 사용권을 넘긴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사실 레나페 인디언들도 땅의 소유주라기보다는 땅에서 살며 자원을 이용하던 사람들에 가까웠다. 이 문제에 대해 포겔슨 교수는 나와 인터뷰하면서 레나페 인디언들이 땅의 소유권을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특히 “가격에 매우 만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당혹감과 함께 쉽게 풀리지 않는 의구심이 든다. 평범한 지적 수준과 건강한 정신을 가진 레나페 인디언들이 왜 유리구슬과 단추만 받고 섬을 팔아넘겼을까? 만에 하나 섬의 사용권만 거래한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대답은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미나위트가 레나페 인디언에게 다이아몬드 한 자루를 줬더라면 이 거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원주민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보다 유리구슬의 가치를 더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흔한 물건은 언제나 하찮게 여겨진다. 만일 루비의 국제 가격을 모른다면, 미얀마 사람들은 미얀마에 풍부한 루비의 가치를 유리구슬만큼이나 낮게 평가할 게 틀림없다.
보석은 사실 색깔 있는 돌에 불과하다. 그저 특별한 이름이 붙은 돌일 뿐이다. 아름답고 희귀한 돌만이 진짜 ‘보석’이 된다. 사람들이 보석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보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특히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온 보석이라면 더욱 가지고 싶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석이 가진 가치의 90퍼센트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 가치다.
욕망의 경제학
가상 가치는 교묘하다. 얼마든지 ‘실제’ 가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30년대에 나타난 튤립 광기tulipomania 파동은 작은 기대감이 만든 가상 가치가 예쁜 꽃봉오리 하나를 거대한 거품경제로 부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튤립 광기는 1630년대 네덜란드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한 주 만에 국가 경제를 붕괴시켜버린 믿기 힘든 사건이다. 튤립 광기가 불러온 역풍은 가상의 일이 아니었다.
튤립 하면 흔히 네덜란드를 떠올리지만 사실 튤립의 원산지는 유럽이 아니다. 튤립은 유럽과 가깝지만, 이국적이고 매혹적인 아시아의 나라, 터키에서 왔다. 심지어 튤립은 1559년까지는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은 꽃이었다. 튤립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10년에 걸쳐 아주 느리게 뿌리내렸다. 하지만 새롭고 예쁜 물건이 으레 그렇듯 부자와 경쟁심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튤립의 인기는 꾸준히 높아졌고 시장도 계속 커졌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1600년경 영국에 처음 들어온 튤립은 이후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그 후 30년 동안 튤립의 인기는 빠르게 올랐다. 하지만 1637년 2월에서 5월까지 석 달 동안 튤립의 인기는 절정에 도달했고 곧 튤립 가격이 폭락하면서 이 사건은 역사상 첫 거품경제로 기록됐다.
1630년 네덜란드에서 부자들은 모두 튤립을 수집했다. 튤립은 부자라면 가져야만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상류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봐줄 만한 튤립 정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튤립의 가치가 오르면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면 튤립이 더욱더 필요해졌다. 튤립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아서 알뿌리 하나가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1637년에 정점을 찍기 전까지 단 몇 년 만에 튤립을 향한 광기는 중산층으로까지 퍼져나갔고 결국 알뿌리 하나가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을 넘어섰다’. 튤립은 오늘날의 다이아몬드처럼 괜찮은 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송이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심지어 값을 지급할 능력이 안 되어도 가져야만 했다. 광기가 극에 달한 1636년 후반,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튤립 알뿌리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 집과 농장을 팔았다. 요즘 부동산 투기꾼들처럼 이들도 튤립 알뿌리의 가치가 진짜이며 계속 오를 것이라고 믿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