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동서남북을 떠도는 사람
공자, 그는 우리에게 누구이며 무엇인가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또한 『논어論語』의 심원한 철리哲理를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와 성서를 이야기하듯이 공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공자의 뜻이 아닐 것이다. 공자 자신은 신비주의자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사람이다. 자기 스스로 광배光背를 지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항상 제자와 함께 행동하고 제자의 눈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바로 나이니라”(『술이述而』)라고 말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다만 공자는 분명히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주의자였던 까닭에 번번이 좌절하고 성공하는 일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공자는 거의 좌절과 유랑 속에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제자들은 그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공자는 그들을 거느리고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세속적인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 스승의 곁에 생겨난 교단은 사상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공자의 인격은 그가 죽은 후에도 발전한다
공자의 인격은 그의 일생에서 완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죽은 후에도 발전한다. 공자의 모습은 차츰 고쳐 씌어졌으며 마침내 성인의 모습에 어울리는 치장이 가해졌다. 사마천司馬遷이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성인의 모습은 그 후 2,000년에 걸쳐 봉건적인 관료제 국가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자의 모습을 다시금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공자를 노예 해방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실천자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공자는 여전히 살아서 그 사상적 임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공자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공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것은 논자의 사관에 맞도록 임의로 판단해 공자의 모습을 구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공자가 지금도 살아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간다면 그 가능성은 공자 자신에게 있을 것이 틀림없다. 공자를 역사적인 인격으로 파악하고, 역사성을 명확히 하는 것, 그것이 공자의 생명의 숨결을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공자의 전기적傳奇的 생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자는 위대한 인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중국에서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성聖이란 글자의 본래 뜻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자를 사상가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옳지 않다.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작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상이 행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때 그 사람을 철인哲人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그의 사상은 그의 언동을 전하는 제자들의 문장으로밖에 알 수가 없다.
철인은 새로운 사상을 널리 알리는 선포자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이 지닌 의미를 탐구하고 발견하며 거기서 지금 현재 이와 같이 존재하는 근거를 묻는다. 탐구자이자 구도자임을 본질로 한다. 소크라테스가 델포이 신탁의 의미를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처럼, 공자는 “옛것을 조술할 뿐이지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술이』)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묻는 것에 의미를 두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지만, 공자는 묻는 것으로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내고 있다. 델포이의 신탁은 단지 묻는 것만을 명령했다. 거기에는 대답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과거 성왕聖王의 시대에 의지할 만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공자보다 앞선 주周 왕조의 빛나는 문화와 창조자를 공자는 꿈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이들이 아무런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철인이 행한 일이 오로지 그 사람의 언행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면 전기야말로 그 사상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이들 철인은 자신들의 전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제자인 플라톤의 몇 편의 글 속에, 또한 공자는 『논어』 속에 그 모든 것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지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인격이 그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전승자의 의향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이) 이러했다’는 것 이외에도 ‘(마땅히) 이러해야만 할’ 것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울로가 표현한 그리스도에는 예수에서부터 그리스도로 승화한 과정, 더 나아가 그리스도로 발전한 단계가 있었다고 한다. 전기는 이와 같이 발전한다. 그리고 철인의 사상 또한 발전하는 것이다. 공자의 경우 그것은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2,000년에 걸친 관료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봉건성의 기초를 세운 것은 공자였지만, 역사가 전개되는 중에도 혁명가들은 대부분 유교에서 혁명의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근대에서도 그 유파 가운데 하나인 공양학파公羊學派가 체제 부정을 주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에 대해 사기에 기술된 내용에는 오류가 상당하다
공자에 대한 최초의 전기 작가는 『논어』 각 편의 편찬자일 것이다. 그런데 『논어』의 편찬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지만 그것은 공자가 죽고도 이백 몇십 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공자의 비판자들에 대한 자료까지 포함하고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미 성인이었으며, 다른 학파도 그러한 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장자莊子』의 「천지天地」 편에는 공자를 “박식함으로 성인을 자처하는 사람”, 유가와 묵가墨家에 대해 공격을 가한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 편에도 “중니仲尼는 천하의 성인이다”라 하고 있다. 공자의 반대자들도 당시 성인으로서의 공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공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려거나 깎아내리려는 목적에서 여러 이야기가 생겨났다. 맹자시대에 이미 그러한 공자 설화로 불릴 만할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맹자는 그 가운데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만장상萬章上』)라든가, “제나라 동쪽의 시골뜨기들의 말이다”(『만장상』)라고 배격하고 있지만, 맹자 자신이 주장한 공자의 언동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일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으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이 두려워하였다”(『등문공하滕文公下』)고 했다. 더 나아가 “공자가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에게 (월권했다고) 죄 주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라며 『춘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듯한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공자가 몇 번이나 체제 변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그 때문에 부득이 기나긴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맹자의 이 이야기는 명백히 허위다. 맹자가 말하는 춘추의 학문은 분명히 공자를 죄 주는 경우라 하겠다.
사마천은 『사기』에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썼다. 공자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세한 전기이며, 『사기』 가운데 최대 걸작이라고 칭찬해 마지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한 편은 『사기』 안에서도 가장 부정확하고 틀린 데가 많은 편으로 다른 세가나 열전·연표 등과 비교해보면 연대기적인 일이나 사실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곳이 매우 많다. 그러한 사실은 청대淸代 말엽 최동벽崔東壁의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 등에서 이미 지적되었고, 최근에 일본의 기무라 에이치木村英一 교수의 『공자와 논어』에서 매우 상세한 고찰이 이루어졌다.
공자는 특히 비천한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도 분명치 않아, 나는 그가 무녀巫女의 사생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만년에는 당연히 한 시대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겠지만 망명 중의 어떤 시기에는 “선생을 죽이려던 자에게 죄를 주지 않았고, 선생을 욕보인 자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장자』 「양왕讓王」)고 할 만큼 받아줄 이 없는 망명자, 요컨대 외부에서 온 도적인 외도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사기』는 공자의 전기를 제후의 전기를 다루는 세가世家 안에 넣었지만, 이것은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마도 공자의 뜻을 관철하는 방법도 아닐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 담談이 황로黃老를 좋아했기 때문에 유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무제武帝는 유가를 국학國學으로 세우고 오경박사五經博士라든가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을 두는 한편, 천하의 군국郡國에 학궁學宮을 설치하면서 유교 일변도의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자를 제후의 반열로 취급했던 것은 당시 국가 정책상의 요청이었던 듯하며, 그 결과 사마천의 사필史筆은 일민逸民인 백이伯夷라든가 유협劉協의 전기를 쓸 때 보이는 감개나 생채를 발하지 않는다.
그 논찬論贊에서도 옛날 노魯나라 땅을 여행하면서 남아 있는 공자의 유적과 그곳에 전하는 유풍을 보고는 주위를 배회하면서 떠나갈 수 없었다고 기록한 다음, 공자가 “포의의 신분으로서 그 도가 10여 대에 걸쳐 전하고”, “중국에서 육례六禮를 말하는 이는 모두 공자를 표준으로 삼아 취사 절충하니, 지성至聖이라 할 만하다”고 끝맺었다. 그러나 깊은 공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이미 성상화聖像化하고 있는 공자를 그는 다소 꺼림칙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당시에 공자의 가계는 11대, 그 후에도 연면히 이어져 77대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증손인 공덕성孔德成 선생은 지금도 성인 공자의 제사를 받들면서 동해 한가운데 섬인 타이완에 살고 있다. 그리고 타이완에서는 1971년에 공자 서거 2450년 기념제가 성대히 열렸다. 공덕생 선생이 십수 년 전 일본에 왔을 때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적이 있다. 공자를 연상케 하는 위장부偉丈夫의 모습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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