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적인 사회학과 역동적 사회학
영국에는 두 개의 교육 시스템이 나란히 운영되고 있다. 그 차이는 공립학교와 대학교에서 뚜렷하지만, 응시자들이 국가시험이나 그 밖의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매 단계에서 이를 알아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교육 시스템은 대학 이전의 공립학교에서는 고전적 진영과 근대적 진영이며, 대학교로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가 그에 상응한다. 이는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과 베이컨적인 것이다.
전혀 별개라고 인식되는 이 두 개의 교육 시스템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먼저 고전적(아리스토텔레스적) 교육 시스템은 사회의 본성과 사회가 움직이고 존재하는 조건에 대한 매력적이며 예술적인 이상 내지 신념을 구현한다. 그것은 실제 사실의 너머에 위치한다. 반면에 근대적(베이컨적) 교육 시스템은 사실에 대한 실험적 확증에 근거하는 귀납적 자연과학이 중심을 이루고, 본질적으로 이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는 사실적이며, 그 첫 번째 가설은 힘이 서로에 대해 비슷한 관계에 놓여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교육 시스템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면 그 무엇도 사실로 인정될 수 없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이론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고전적인 이상은 예컨대 인간이란 선하고 용감하며 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근대적 시스템은 선함의 의미를 모르고, 용기와 미덕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으며, 만일 ‘해야 한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제껏 증명된 바 없는 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금만 숙고해보면 이 두 가지 철학이 일상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고전적 이상의 논리적 귀결은 결국 사회조직에서 발견되는 결함을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성격적 결함 탓으로 돌린다. 전쟁은 사람들이 사악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가난은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발생하며, 범죄는 사람들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진보는 본질적으로 응용과학인데, 고전적 사유는 그것이 사실상 엄격한 고전적 이상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진보를 혐오한다. 반대로 과학적 태도는 반대의 극단, 즉 결정론으로 기운다. 사람들의 행동, 생각 그리고 도덕은 그것들이 종속되어 있는 맹목적인 힘의 결과이므로, 이에 대해 가하는 비난이나 칭찬은 모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많은 논쟁들이 그렇듯이 양쪽의 관점에 대해 할 말들이 많겠지만, 진실은 어떤 관점도 상대 관점 없이는 유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경제적 결정론은 사회적 취약 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 98%의 행동에 대해 아주 안정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은 환경에 의해 주어진 제약 조건들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이 그들의 환경을 만들기보다 그들의 환경이 훨씬 강력하게 그들을 만든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동시대의 훨씬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한 개인의 사적인 생각이 그들의 주변뿐 아니라 국가와 대륙 전체까지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도 존재한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마이클 페러데이Michael Faraday가 산업사회 및 경제사회의 무게중심을 변화시킨 것이 확실하듯이, 나폴레옹, 워싱턴, 비스마르크가 역사의 행로를 변화시켰다고 믿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충분히 명백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도출되는 중요한 생각은 (고전적 이상과 종교적 이상을 포함한) 인류의 이상이 대다수 사람들과 유효한 관계를 맺고 관리되기에 앞서, 그들이 경제력의 부당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하나의 저주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약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역사를 다시 반복할 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정치적으로 만족스러운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오늘날 문명사회를 괴롭히는 어려움과 위험에 대해 균형 잡힌 사고를 하면서 그 대처 방안을 구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안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성이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실용적 관점에서 만족할 만한 인성의 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변화’만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떠들어대는 감상주의자의 권고에 격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한 광부가 자기 이익을 포기하면서 고용주에게 현재 임금의 절반만 받겠다고 제안한다면, 그 행위는 어떤 힘든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또는 광산 소유주가 손실을 냈다면 누가 인부들의 임금을 올려주겠는가? 만약 이미 은행에 빚이 있는 어느 가게 주인이 다음 주에 낼 집세와 당좌대월의 잔액을 갚을 능력조차 없는 의심스러운 상황에 있다면, 또 자신의 광부 고객들이 더 이상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자신도 이제 황금률에 따라 사업을 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구입한 원가의 절반 가격에 물건을 판매한다면, 그래서 파산과 소매업자로서의 활동 정지를 스스로 재촉한다면, 그 가게 주인에 대한 배당은 어떤 영향을 입겠는가? 만약 적의 폭격기가 전쟁이 발발한 이유도 전혀 모르는 국민들에게 독가스 폭탄을 투하하려고 할 때 이를 제지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죄악상에 대해 열정적인 연설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특성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을 듣고자 했다면, 누구나 다음의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무척 힘들며, 설사 이끌어냈다 하더라도 이는 경영자의 자리를 견지하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며 협의의 의미에서 극단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이를 원하지 않는 반면, 이를 주로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 무력하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설명에서 ‘마음’에는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행동의 차이이며, 그 차이는 한쪽은 자신의 운명에 꽤 만족하고 있으며,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최대한 많은 개인들에게 욕망과 그 실현 수단을 화해시키는 문제라고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매 단계마다 소위 도덕적 이슈가 느닷없이 개입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영국이 분별 있는 나라라기보다 자유로운 나라라고 말했던 용감한 주교는, 스스로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선한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해준다는 생각에 대해 나름 매력적인 방식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실업’을 사실상 경제적 발전의 신호로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산업 붕괴의 징후로 보여주려는(매우 성공적인) 노력도 이와 똑같은 이슈를 제기하는 셈이다.
고전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상벌rewards and punishments 이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이론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친숙해 있어서, 그것이 인위적인 생각이며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가 어렵다. “선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진술의 진실성은 선함과 행복함이라는 추상적 성질 사이의 고정된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선함’이라는 단어가 임의로 부여한 어떤 행동과 ‘행복’이라고 부르는 반작용 간의 고정된 인과관계에 의존한다. 지나치게 말을 꼬치꼬치 따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세상의 산업과 법, 사회 시스템 전체가 이 상벌 이론에 따라 제재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세계를 어렵게 만드는 산업의 불안정성은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이 낳은 결과에 대한 불만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제품, 더 많은 여가, 그리고 더 적은 통제를 원할 뿐 아니라, 그들의 욕구 충족을 방해하는 것이 물리적 세계에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보다 더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위치의 산업계 수장들은 사람들의 권리 주장에 대해 한결같이 도덕적 근거를 요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개인들에게 더 많이 생산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오늘날 경제기구의 생산량을 최저 수준으로 제한하는 데 관여한다. 그러면서 심지어 생산의 과잉 부분조차도 이에 상응하는 노동의 대가 없이 빈곤층의 손에 흘러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결의에 차 있다. 실은 그 노동이 이들 산업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문제를 더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태도는 고용자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 노동계 지도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나름의 합당한 이유로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상벌 이론은 노동계 지도자들이 반대하는 고용주들의 초석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의 초석이기도 하다.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포상의 규모와 지급에 관한 것이며, 그것을 얻기 위한 경쟁의 규칙에 관한 것뿐이다. 이 주제를 주의 깊고 냉정하게 살펴볼 때,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근대 사업modern business 이론의 논리적 귀결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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