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01
신철영
협동의 기운과 힘이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가기를
2000년 12월 27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아이쿱생협과 함께 해온 리더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 이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날 경기도 시흥에 있는 아이쿱생협당시 이름은 21세기생협연대의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났다. 창고 두 동 가운데 한 동이 전소했다. 공식 집계한 피해액은 1억 7000만원. 당시 아이쿱생협의 조합원 숫자가 2470명, 공급액이 53억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은 사건이었다. 물류센터 화재 사건은 출범 3년차를 맞은 아이쿱생협에 큰 위기였다. 당시 21세기생협연대 초대 회장을 맡고 있었던 신철영 클러스터추진위원회 위원장도 그 날짜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차형석(이하 차)
초창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2000년 12월 말에 있었던 시흥 물류센터 화재를 꼽는 이가 많습니다. 당시 위원장님이 초대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이야기를 해주시죠.
신철영(이하 신)
2000년 12월 27일 물류센터 화재는 매우 큰 사건이었고, 아이쿱생협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시흥에 원래 물류창고가 하나였는데 물류량이 늘어서 창고 두 개를 썼습니다. 12월 27일 새벽 6시에 집 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자다 말고 전화를 받았는데, 몇 가지를 묻더니 “당신네 창고 불났다”라는 겁니다. 당시 관할 파출소에서 전화를 했던 거였어요. 갑자기 불이 났다니. 이게 뭔 소리인가 했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 실무자한테 전화가 오더라고요. 창고 하나가 다 탔다고.
시흥으로 갔죠. 건물이 다 타버렸더군요. 건물 형체만 남고 안을 봤더니 재와 과자, 쌀, 과일이 뒤범벅이 돼 있고. 거기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그분 표정을 보고서, 정말 말만 들었지 큰일을 접하면 사람이 넋이 나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참 막막했습니다.
차
화재보험 같은 건 안 들어놓았나요?
신
화재보험을 안 들어둔 상태였어요. 그곳이 그린벨트 지역이었는데 주인이 농업창고를 지어서 사실상 불법임대를 했던 거였죠. 임대료가 싸서 우리는 그걸 알고도 그 창고를 빌렸던 거고요. 화재보험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창고 주인과 상의했더니 주인이 반대를 해서 가입하지 못하고 말았죠. 또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화재가 나기 일주일 전에 쌀을 왕창 창고에 들였어요. 그때 쌀이 가장 값나가는 물품이었는데, 손해가 더 커졌죠.
차
수습할 엄두가 안 났겠습니다.
신
사건은 터졌고. 거기에 있어봐야 할 게 없으니까 실무자들은 배달가라고 밖으로 내보냈어요. 생협 사람들 만나면 “야, 그래도 지금 불났으니까 다행이다. 조금 이전에 났으면 도저히 우리가 수습할 힘도 없었을 거고, 또 조금 더 지나서 불이 났으면 그때는 우리 규모가 커가지고 타격이 더 컸을 거다. 안된 일이지만 지금 불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막막했죠.
차
요즘 말로 하면 ‘정신승리’네요. (웃음)
신
우선 12월 30일 긴급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니까. 실무자들에게 손실 현황이 얼마인지 물었는데 그게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창고 2층 일부를 막아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거기 컴퓨터도 타버리는 바람에 파악이 어려웠던 거죠. 나중에 이것저것 짜맞춰보니까 화재 손실은 1억 6000만원대였어요.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실무자에게 물었더니 “현금이 필요합니다”라더군요.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했더니 “2억 5000만원은 있어야 합니다” 해요.
갑자기 돈 2억 5000만원을 만들어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2억 5000만원을 만들까 여러 가지 토론을 하다가 “우리가 협동조합인데 협동조합 방식밖에 더 있습니까?”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어요.
화이트 보드에 21세기 생협연대 이사들은 1000만원, 지역 조합은 1000~5000만원 하는 식으로 주욱 썼어요. 실무자들은 한 달 월급을 반납하겠다고 했어요. 합산했더니 2억 8600만원인가 나와요. 그래서 ‘좋다. 이게 우리가 모을 목표다. 다만 돈을 어떻게 모을 거냐? 1년을 꾸자’는 것이 결론이었어요.
당시 정기예금 이자가 10퍼센트 정도로 기억합니다. ‘1년 후 10퍼센트 이자 중 5퍼센트는 조합에 출자하고, 나머지 5퍼센트를 원금과 함께 현금으로 찾아간다.’ 그 한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지역 생협에서는 조합원들이 버스 한 대를 대절해 성지순례 하듯이 화재 현장을 찾았어요. 현장을 와서 봐야, 모금하는 동력이 생길 것 같다고. 사실 처음에 그렇게 결정을 하면서도 진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굉장히 염려했죠.
그런데 1월에서 2월로 넘어가며 계속 모금액을 공개하는데 1억 5000만원, 2억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금 액수가 늘어나면서 조직 분위기도 확 바뀌는 게 느껴졌습니다.
차
그 돈을 모으는 데 대략 얼마나 걸렸나요?
신
2001년 3월 20일에 창고를 다시 지어서 개소식을 했으니까 그 이전까지는 다 모았습니다. 사실 불나고 나서 누구도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망했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모은 돈이 2억원이 넘어가니까 ‘와, 이거 안 망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최종적으로 집계했더니 2억 8600만 얼마얼마 식으로 몇 원 단위까지 집계되었어요286,642,976원. 거기에는 여러 단체에서 들어온 성금 4700만원 정도가 포함되었고요. 다른 생협,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성금이 왔습니다. 우리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일본 니가타생협도 800만원을 보내왔습니다후일에 일본 니가타에 지진 피해가 크게 발생했을 때, 아이쿱생협도 조합원 성금을 모아 일본 니가타 생협에 보내기도 했다.
그때 두 가지 얘기를 했어요. 하나는 “사무실에 화재 현장 사진을 걸어놓자. 우리 이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또 하나는 성금 이야기였어요. “이 성금은 우리가 당장은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지만 앞으로 영원히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자.”
차
화재라는 위기와 그후의 조합원 모금과 외부의 성금. 굉장히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신
모금할 때 조합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1년 후에는 돈을 칼같이 돌려준다. 필요하면 다음날 다시 꾸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1년 후에 돌려준다”라고 약속했습니다.
화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뭘 발견했냐면 조합원들과의 관계였어요. 협동조합은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관계잖아요. 조합원들이 우리 조직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이 조직을 신뢰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죠.
이 일은 다른 조직에도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합원들에게 돈을 꿔 물류센터 화재를 복구한 경험은 우리 조직의 저력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후 ‘돈이 필요하면 모아서 쓴다’는 아이쿱생협의 전통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차
그래서 1년 뒤에는 다 갚았나요?
신
갚았죠. 아이쿱생협에서는 이런 돈 문제로 조합원들과 불편한 일이 생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조합원은 조합을 신뢰했고 조합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것일까. 화재라는 위기가 조합원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어질 것이라고 당시 생협 임원진들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류센터 화재는 조합원의 신뢰를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 돈이 필요하면 조합원에게서 우선 차입하는 전통까지 세워졌다. 아이쿱생협도 위기에서 출발했다. 이 책의 여섯 리더 인터뷰에서 자세히 나오겠지만 초창기 모인 지역 생협들은 조합 리더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근근이 이어져 왔고, 마지막 돌파구로서 지역 생협들이 손을 맞잡았던 것이다.
신철영 위원장도 생협운동에 헌신한 리더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993년 부천생협을 창립한 이래 24년째 생협운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사실 신철영 위원장은 경실련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시민운동가 신철영’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그는 시민사회 단체의 핵심 운동가로 언론에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생협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그의 대학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차
경실련 사무총장을 역임할 때 경실련 사무실과 제가 일하던 언론사 사무실이 가까워 위원장님은 모르셨겠지만, 오가며 마주친 기억이 있습니다. (웃음) 그래서 굳이 구분하자면 저에게는 생협운동가보다는 시민운동가로서의 인상이 더 깊게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생협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차차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활동 그리고 생협으로 이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노동 문제에 대해 대학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나요?
신
네, 저는 1970년에 대학을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기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죠. 서울대 공대에서 ‘산업사회연구회’라는 서클 활동을 했습니다. 그게 아마 공대에서 최초로 생긴 학생운동 서클일 거예요. 공대라고 하는 데가 워낙 삭막한 데니까. (웃음) 우리 학교 다닐 때는 방학 때 공장에 잠깐씩 들어갔다 오고 그랬습니다.
차
산업사회연구회에서 주로 무슨 일을 했나요?
신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 선배들을 통해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알게 됐죠. 1971년 즈음에 영등포, 문래동 일대에 공장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때 양평동 인근에 ‘대한모방’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 회사 사장이 장로였던 모양인데 종업원들에게 강제로 예배를 시켰어요. 그런데 그 강제 예배를 반대하다가 4명인가가 해고된 거예요. 그 일로 상당히 오랫동안 싸웠는데 그 일을 지원하느라고 전화를 돌리며 소식을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영등포산선하고 관계를 맺었죠. 그때가 대학 2학년 때였습니다.
차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신
1970년 11월 13일에 전태일 분신사건이 납니다. 대학 1학년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동아일보〉가 그래도 제일 나은 신문이라도 할 때였어요. 그 신문을 봤더니 사회면에 전태일 분신 기사가 크게 났더라고요.
전태일 분신사건이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굉장히 컸어요. 한마디로 쇼크였어요. 노동자들의 형편이 어렵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 실상을 알게 된 거예요. 청계피복공장을 보면 한 층 건물 중간에다 칸을 막아가지고 두 층으로 만들어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사람이 반듯하게 일어설 수도 없는데, 그 위층 아래층에서 보통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노동 환경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폐결핵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전태일이 당시 창동에서 살았는데 창동에서 청계천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차비를 아껴 풀빵 사서 같이 나눠먹었다는 얘기까지 알게 되었어요. 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이를 지키게 하려고 노력하다 좌절하며 “나에게는 왜 대학생 친구가 없을까?”하는 일기 구절도 있었어요. 여러 실상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이슈가 됐어요.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방학 때 인천산업선교회를 통해서 ‘후지카’라는 ‘석유곤로’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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