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정치적인 사이보그의 몸
우리가 신들처럼 된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작가이자 발명가)
천 년이 한 번 더 지나면 우리는 기계, 혹은 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 공상과학소설 『스웜Swarm』에 나오는 예술가 아프리엘Afriel
포스트휴머니즘의 가능성들
1995년 여름, 나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미디어 연구소를 방문해 입는 컴퓨터와 정교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두 명의 대학원생을 만났다.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명명했다. 스티브 맨Steve Mann은 위성신호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컴퓨터를 연결했다. 그의 머리에 달린 안테나 옆으로는 카메라 한 대가 붙어 있어, 그가 쓰고 있는 안경 모양의 초소형 TV 화면에 지속적으로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상하좌우로 보이는 모든 것을 촬영하도록 카메라를 설정했는데, 이 실험은 뇌가 영상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혹은 카메라를 적외선 촬영 모드로 설정하여 벽 속으로 지나가는 전기선을 ‘본다거나’, 심지어 하버드 광장 상가의 몰래 카메라들로 들어가는 전력선을 추적할 수도 있었다. 그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자신의 웹페이지에 올리곤 했는데, 이런 이유로 몇몇 상점들은 그의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매개현실mediated reality’이라고 불렀다. 그가 본 모든 것은 그의 카메라가 매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컴퓨터로 인간의 말초적인 감각자료를 조작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나, 둘 이상의 사람들이 동일한 가상세계를 경험하는 상호세계mutual world와는 완전히 다르다.
스티브의 동료인 태드 스타너Thad Starner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쪽 망막에 컴퓨터 화면을 띄워주는 작은 레이저 장치를 착용하였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 물리적인 세계를 관찰했다. 그는 한 손 키패드로 자신의 컴퓨터를 통제했다. 또한 그는 인터넷에 무선 접속하였는데,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사이버 공간과 매사추세츠에 동시 거주했으며, 그의 감각기관은 두 세계와 동시에 접촉하고 있었다.
이들 두 명의 사이보그는 꾸준히 개선되어 몇 년 만에 다양한 유형의 입는 컴퓨터들로 무장한 소규모 학생조직으로 규모가 커졌다. 신고 다니면 전기가 발생하는 운동화의 사례처럼, 개선된 인터페이스와 전력기술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젊은이는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사이보그들은 분명 사이보그 학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인간과 기계의 통합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과학자와 공학자 또한 사이보그 학자들이다. 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 여부는 상관없다.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컴퓨터 설계자들, 장기이식팀에서 일하는 외과의사들, 보철이나 자동 약물투입 시스템 같은 장비와 기계 들을 개선하는 생체공학자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사이보그화에 어떤 사회적, 철학적 의미들이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또 다른 무리의 사이보그 학자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사이보그 학자라는 이름표를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이를테면 기술사 연구자들 중 컴퓨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한동안 자신들을 ‘사이보그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고, 또 사이보그 인류학 선언문을 발표했던 인류학자들도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사이보그의 이미지에 기대지 않으면서 그런 변화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모아내려고 노력 중이다. 역사가인 데이비드 챈넬David Channell은 오늘날 우리의 문화흐름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서양의 이상적인 유기적 질서(‘존재의 거대한 사슬’)와 기계적 합리성(‘시계 태엽 우주’)의 통합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 두 조류가 오늘날 생체기계라는 착상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 브루스 매즐리시Bruce Mazlish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점차 우리의 망상을 극복해온 인간탐구의 서사시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허세를 거부한 코페르니쿠스혁명을 시작으로, 그 다음에는 진화론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르다는 망상을 산산조각냈으며, 그 뒤를 이어 프로이트의 무의식 덕분에 우리가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네번째 불연속fourth discontinuity’이 사라져야 할 차례이다. 이것은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즉 생명과 기계 사이에 우리가 그어놓은 인위적인 분리선을 가리킨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지구 자체를 하나의 사이보그 시스템으로 보기 시작했다. 도나 해러웨이가 생물권이 자가조절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 가이아 이론을 가리키며 언급한 것처럼, 가이아는 ‘사이보그 세계’이다. 생물권 내에서 인간과 우리 기술이 지닌 지배력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런 통찰에 덧붙여 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그레고리 스톡Gregory Stock은 자신의 책 『메타인간Metaman』에서 남성우월적인 묘한 주장을 보탰다. 그는 지구가 나름의 필요와 욕망을 가진 하나의 사이보그 생명체임을 전제로 하며, 메타인간들이 은하계 전역에 번식하기를 바라는 것도 그런 욕망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만화 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가이아 이론의 역학과 스톡의 인상적인 방증을 결합하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된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는 생체 시스템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분명이 유기적이면서 또한 기계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하고 있다.
1960년 맨프레드 클라인스와 네이선 클라인은 ‘사이보그’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그 말의 함축적 의미에 대해 논의했다. 참여적 진화가 가장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우주나 다른 이상한 장소에서 살아가기 위해 확실히 스스로를 개조하는 중이라면, 자연진화의 역학은 인공진화에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자리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식적으로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까지는 기술적인 제약이 있고, 우리의 목적들 또한 상이하거나 때로는 상충하기 때문에 제한적인 참여에만 그치고 있다. 인공진화란 다윈이 논의했던 사육동물의 의도적인 품종개량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과 유전자에 대한 직접적인 개조까지 포함한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개입이 미숙한 수준이지만, 새로운 기술과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개조해 인간으로 분류할 수조차 없는 생명체들을 창조하게 될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이익이든 힘이든 그 무엇을 얻든 간에, 모든 개조과정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 포스트휴머니티 안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수립할 것인지는 바로 정치가 결정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사이보그의 가능성이 두렵기도 하지만 반대로 흥분되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복제논쟁에서 이런 상반된 의견대립을 경험했다. 가톨릭교회와 세계 여러 나라의 정부가 인간 복제실험의 금지를 요구하는 반면, 과학자들은 더 많은 연구를 허용해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한다. 심지어 ‘엑스트로피언Extropian’(엔트로피의 반대말 엑스트로피에서 유래한 말 ─ 옮긴이) 같은 무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라고 칭하면서, 다가오는 인간 기반 ‘포스트post’ 생명체의 확산을 불가피하고 멋진 일로 환영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상이한 유형의 수많은 사이보그가 있으며, 그들을 구분하는 수많은 상이한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이보그들은 복구형, 정상회복형, 개조형, 증강형이 모두 가능하다. 사람들은 보통 사이보그를 상실된 기능이 복구된 사람들로 생각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런 사이보그들이 다시 ‘정상’이 된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개조되고 증강된 포스트휴먼의 윤리적 의미들을 대체로 그냥 무시하곤 해왔다.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는 1997년에서야 유전공학을 이용해 인간을 개선하고 증강하는 일의 사회적 함의를 연구하기 위한 기금을 출연했다. 다른 연구자들은 사이보그의 시스템 단계에 초점을 두고(예를 들면 메타 사이보그, 세미 사이보그 등을 도입하면서) 생물학적 요소들과 기계적 요소들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찾는 사이보그 분석 기획안들을 제안했다.
이들 이분법에 관한 두 번째 문제는 이런 이분법보다 더 중요한 이분법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와 스티븐 멘토어Steven Mentor, 하이디 피구에로아-사리에라Heidi Figueroa-Sarriera는 『사이보그 핸드북Cyborg Handbook』에 실린 공동 논문 「사이보그학Cyborgology」에서 이 점을 지적했는데, 그 논문에서 우리는 모린 맥휴Maureen McHugh의 소설 『중국 장산China Mountain Zhang』에 대해서 논의했다. 중국계 미국인 공학자인 소설 속 주인공은 ‘아마도 곧,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인지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사이보그화를 감수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런 혼란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구분해야 할 더 중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지속적인 것과 파괴되는 것, 안정적인 것과 변덕스러운 것, 쾌락과 고통, 지식과 무지, 효율적인 것과 비효율적인 것, 아름다움과 추함 등. 한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자연, 인간-기계, 유기적인 것과 만들어진 것 등이 바로 생명 문제의 핵심적 이원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이보그의 모습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이원적 인식론의 주장들을 완전히 넘어서서, 다음과 같은 사이보그 인식론을 고려할 것을 요청하며 끝을 맺는다.
정립thesis, 반정립antithesis, 종합synthesis, 보철prothesis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헤겔 변증법의 논리인 ‘정·반·합’의 영어 단어에 포함된 ‘-thesis’가 인공 기관이나 보철을 가리키는 ‘prosthesis’에도 들어 있다는 점을 이용한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언어유희이다 ─ 옮긴이)
현실은 단지 찬성과 반대를 오가는 곳이 아니고, 완결을 향해 곧장 진군하는 곳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만 세계를 건설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기술과 문화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본성은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를 엮어나가고 있다. 현실은 역동적이고 거칠다. 어떤 일은 다른 일을 뒤따르고, 어떤 것은 버티고, 어떤 것은 사라지고, 또 어떤 것은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현실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현실을 전부 알 수 있다고 허풍을 떠는 인식론은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다. 좋든 나쁘든(둘 다겠지만)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마도 이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포스트모던적인 현재와 사이보그 사회의 정치적 미래를 이해하고 어쩌면 통제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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