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구 안의 구
궁수자리의 수성
낯선 남자가 호키티카에 도착한다. 비밀 모임은 방해를 받는다. 월터 무디는 최근 기억을 감추고 토머스 발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크라운 호텔 흡연실에 모인 열두 남자는 마치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된 무리인 듯 보였다. 뿔단추가 달리고 노란 무명, 삼베, 능직으로 만든 프록코트와 연미복, 노퍽재킷 같은 각양각색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보면, 서로 오갈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고 조수가 뚜렷한 도시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는 열두 명의 사람이 어쩌다 한 객차에 올라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누구는 신문에 몰두하고 있고, 누구는 몸을 기울여 벽난로에 담뱃재를 털고 있고, 또 누구는 당구대의 초록색 천 위에 한 손을 대고 공을 치려 하는 등 제각기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늦은 저녁 일반 기차를 타고 갈 때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을 자아냈다. 다만 이곳은 열차의 철커덕거리는 소리 대신 요란한 빗소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것이 문틀에 손을 대고 서서 월터 무디가 받은 인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밀한 회의 같은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가 문을 열 무렵 열두 남자들은 제각기 자신이 하던 일을 도로 하고 있었고(당구대 앞의 남자들은 자기 자리를 잊어버려서 대충 아무렇게나 서 있었지만), 거기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그가 들어와도 누구 하나 시선을 들지 않았다.
심신이 온전할 때였다면, 남자들이 보이는 한결같이 그를 무시하는 태도가 무디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속이 메슥거리고 불안한 상태였다. 웨스트 캔터베리까지의 항해가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굽이쳐 와 호키티카 모래톱의 난파선 묘지에서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물거품의 골은 대단히 위험하니까. 하지만 여행 중의 끔찍한 사건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아직까지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무디는 천성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내향적으로 변했고, 그래서 그답지 않게 방금 들어온 방 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디는 남의 얘기에 흔쾌히 귀를 기울일 것 같은 인상을 타고났다. 잘 깜박이지 않는 커다란 회색 눈, 보드랍고 소년 같은 입술은 상대의 말을 공손하게 경청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카락은 심한 곱슬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깨까지 내려왔었는데 지금은 바짝 짧게 자르고 옆가르마를 탄 후 금빛 머리카락을 진한 갈색으로 만드는 달콤한 향의 머릿기름을 발라 매끄럽게 넘겼다. 이마와 뺨은 각이 졌고 코는 곧았으며 피붓결은 부드러웠다. 스물여덟 살 생일을 앞둔 그는 동작이 재빠르고 꼼꼼했으며, 장난꾸러기 같은 면과 순수한 활력을 지니고 있었고, 무조건 남을 믿지도 남을 간교하게 속이지도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신중하고 눈치 빠른 집사 같은 태도로 행동했기 때문에 말수 적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편이었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를 중개하는 일을 종종 맡기도 했다. 한마디로 실제 성격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외모, 그러면서도 곧바로 남들의 신임을 얻는 그런 외모였다.
무디도 묘하게 품위 있는 분위기로 자신이 어떤 이득을 보는지 모르지 않았다. 극도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도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했고, 자신이 외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마음 한쪽으로 언제나 자신의 외면이 어떤 모습인지 감시했다. 그는 정면, 측면, 그 중간 각도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달린 개인 옷방 안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모습은 반 다이크의 찰스 1세 초상화 같으면서도 훨씬 더 근사했다. 이렇게 하는 건 그의 개인적인 습관이었지만 누가 물어보면 아마도 부인할 것이다. 이 시대의 도덕군자들은 자신의 외모를 세세하게 살피는 것을 가차 없이 비난하니까! 외적 자아가 내적 자아와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거울 한번 쳐다보는 게 오만함의 증거라는 듯이. 자신을 살피는 행위가 난해하고, 위험하고, 계속해서 변하는 쌍둥이 영혼 사이의 유대 관계 같은 것임을 모른다는 듯이. 어두워진 뒤 가게 진열창이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수리공이 자신이 고안한 기계 장치가 예상대로 근사하고, 멋지고, 매끄럽게 움직이며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고 느낄 법한 기분과 같았다.
그는 지금도 흡연실 문가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아마도 완벽하게 침착한 모습일 것이다. 사실은 피로로 몸이 후들거리기 직전인데다가 납덩이 같은 공포감이 뱃속을 짓누르고 있으며 우울과 괴로움과 두려움이 가슴에 가득했지만 말이다. 그는 정중한 초연함과 존중의 빛이 담긴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기억을 더듬어 재현해놓은 것 같은 장소였다. 많은 것을 잊었지만(난로의 장식 받침, 커튼, 난로 주위를 둘러싼 제대로 된 벽로 선반) 소소한 부분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잡지에서 잘라내 정원을 바라보는 벽에 구두못으로 박아놓은 승하한 여왕의 남편 사진이나 항해에 더 잘 견디도록 두 개로 나눠 가져와 시드니 부두에서 한데 이어생긴 당구대 한가운데의 이음매, 수많은 손을 거친 듯 종이가 얇아지고 글자가 흐려진 접이식 책상 위의 오래된 신문 더미 같은 것들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벽난로 양옆의 작은 창문 두 개 너머로 호텔의 뒤뜰이 보였다. 뒤뜰은 상자와 녹슨 드럼통 들이 널려 있는 습지로, 이웃한 땅들과는 관목과 키 작은 양치식물 들 몇 그루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쪽으로는 도둑을 막기 위해 문에 사슴을 걸어놓은 동물 우리들이 줄줄이 있고, 이 모호한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 한 블록 가면 주택가의 집집마다 앞뒤로 느슨하게 빨랫줄이 매여 있었다. 그 주변으로 격자 형태로 쌓여 있는 가공하지 않은 목재, 돼지우리, 쓰레기와 철판, 부서진 요람과 홈통 더미 등은 전부 다 버려졌거나 꽤 많이 파손된 것 같았다. 시계는 세상이 갑자기 모든 선명한 빛깔을 잃는 늦은 저녁 시간을 가리켰고, 비가 세차게 내렸다.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창문으로 뒤뜰이 빛바랜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방 안에서는 알코올램프가 저물어가는 하루의 바다 빛깔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해 그 어둑어둑함이 실내의 음울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무디는 에든버러의 클럽에 익숙했다. 그곳은 사방이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빛나고, 장식 단추가 달린 소파에는 그 소파를 애용하는 신사들의 허리둘레만큼이나 기름진 윤기가 흘렀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분 좋은 아니스 향 혹은 박하 향이 풍기는 부드러운 재킷을 건네받고, 그다음에는 손가락으로 설렁줄만 살짝 잡아당기면 은쟁반에 클라레 와인이 병째로 나왔다. 그런 클럽과 비교하면 여기는 대단히 조잡했다. 하지만 무디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부루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부자가 길거리에서 거지를 마주치면 재빨리 옆으로 비켜나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하는 것처럼 그는 이곳의 조악함을 속으로만 삼켰다.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온화한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만, 촛불 아래 쌓인 더러운 촛농이나 유리창에 서리처럼 앉은 먼지와 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은 점점 더 깊숙이 움츠러들었고 몸은 이 상황에 맞서 더욱 꼿꼿해졌다.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무디의 이런 거부감은 부유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편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지금 현재 속으로 극복하려고 노력 중인 개인적인 불안감 때문일 뿐이었다. 사실 그는 그저 적당히 부유했고, 종종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주며 자신의 관대함을 즐기기도 했다. 어쨌든 여기는 문명 세계의 남쪽 끝단, 정글과 바다 사이에 새로 생긴 금광촌이니만큼 딱히 사치스러운 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실은 여섯 시간쯤 전에 포트 찰머스에서 해안의 불모지로 그를 실어나르던 바크선에서 무디는 다른 모든 현실까지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로 특이한 사건을 목격했다. 그 장면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문이 살짝 열리고 회색 빛 한 줄기가 들어오는데, 그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이 더 열리지 않게 잡고 있는 것조차 엄청나게 힘들었다. 이처럼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라 비정통적이거나 불편한 풍경마저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울적한 풍경이 최근에 겪은 시련의 총합인 것 같아서, 마음이 이 풍경과 그 시련을 연결 지어 과거를 떠올리게 할까봐 자꾸만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이럴 땐 경멸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야 평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정당성에 의지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흡연실은 빈약하고, 변변찮고, 을씨년스럽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끔찍한 가구들을 이겨내고 그는 열두 명의 손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꾸로 된 공중 오락장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기발한 비유에 마음이 좀더 차분해졌다.
남자들은 개척자들이 으레 그렇듯 피부가 거칠고 구릿빛을 띠었으며, 입술은 허옇게 텄고, 궁핍하고 고생에 찌든 인상이었다. 그중 두 명은 중국인이었는데 똑같이 헝겊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원피스처럼 생긴 면으로 된 회색 옷을 입었다. 그들 뒤에는 얼굴에 녹청색 소용돌이 문신을 새긴 마오리 원주민이 서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 출신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채광이 어떻게 사람들을 몇 달 만에 저렇게 폭삭 늙게 만드는지 무디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 안을 둘러보던 그는 어쩌면 여기서 자기가 제일 나이가 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어린 사람들이나 동년배가 여럿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는 젊음의 생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인 채 주름진 갈색 손바닥 위에 먼지를 토해내며, 평생 초조하게 옆 걸음질 치며 채광 일만 하고 살 것이다. 그들은 상스럽고 심지어는 기묘해 보였다. 무디는 그들이 별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왜 이리 말이 없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브랜디나 한잔하며 어디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온 다음 누군가가 맞아주기를 바라며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환영하거나 쫓아내려고 하지 않자 한 걸음 더 들어와서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창문 쪽으로 한 번, 난롯가 쪽으로 또 한 번 슬쩍 고개를 숙여 막연히 인사하는 것으로 자기소개를 대신하고는 보조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긴 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술병들을 기울여 잔에 술을 섞었다. 그런 다음 시가를 하나 골라 들고 끝을 자른 뒤 잇새에 물고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가 들어온 것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유일하게 비어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시가에 불을 부티고 뒤로 기대 지금만큼은 이 일상적인 안락함을 누려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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