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하나만의 선택
철학적 자전
01 하나만의 선택
철이 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빼놓고 말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언제나 명확한 의식을 갖고 내 자의로써 스스로 선택해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잃어야 했던 많은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지금 다소 섭섭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원하던 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내가 살아온 삶이 바로 내가 원하던 대로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호강스럽다곤 할 수 없는 가정에서 자란 나로선 안락한 생활이 부럽지 않았다곤 할 수 없고, 고통받는 민족의 하나로서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민감했었다고 믿지만 나는 실업가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나는 학자를 경멸했다. 나는 창조적 인간이, 시인이, 아니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결심을 한 것은 아마 K중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리나 되는 소학교를 걸어다녀야 했던 내 고향의 분위기나, 철저한 유교적 양반 분위기 속에 지배되었던 나의 가정이 시적인 것이 못됨은 대개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환경이 불만스러웠다.
소학교 5학년생이던 겨울방학 때라고 기억된다.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다 학병을 피해 다니고 있던 큰형이 갖다둔 꽤 많은 문학서적이 겨울이면 고아놓은 엿을 둬두는 넓은 우리집 건넌방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호기심에 알지도 못하는 그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내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과는 영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일본 ‘평범사’ 발행이었다고 기억되는 호화판 『문예사전』 한 권이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나는 그 책 속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갖는 힘에 일종의 전율에 가까운 흥분과 매혹을 느꼈고 유럽 고적들의 사진에 놀랐다. 그러한 세계는 내가 보고 알고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시골 소년은 곧잘 손이 꽁꽁 어는 냉방에서 책을 통해 황홀하고 마술적인 세계에 남몰래 매혹되고 흥분된 나날을 보냈던 것이었다. 출세하고 편안히 산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차츰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인생의 의미, 만물의 현상에 대한 원리를 확실히 근원적으로 알고 싶었다. 어느덧 나는 감상에 빠진 문학 소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식혜를 담은 자박지 물이 꽁꽁 얼어붙는 그 건넌방에 있던 책들이 대부분 불문학 계열에 속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일본 문학지들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자라면서 불문학이 역시 가장 참신하고 모험적이고 화려하다는 것을 믿게 됐다. 그후 스스로 크나큰 인생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문학 소년으로서의 나는 철학에도 크게 끌리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불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꽤 궁색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하려는 공부를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만큼 어리석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시 다른 공부를 시작할 때도 그와 같은 기분 속에서였다. 하기야 잘만 하면 생활은 저절로 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을 갖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고, 그 길에서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의 보배를 모두 다 동시에 소유할 수 없고, 모든 만물과 똑같이 어떤 우연의 소산인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다. 일단 생명을 갖게 된 동물로서 나는 생명을 지속하려는 본능에 의해 살고, 역시 우연의 결과로서 의식을 갖게 된 인간으로서 나는 내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욕 속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6·25 전쟁과 겹친 4년간의 대학 시절은 앎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착잡한 사회적·시대적 곤경이 겹쳐 삶에 대한 심각한 괴로움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환경과 내 마음의 상태는 가끔 술로도 표현되었지만, 한편 시작 을 통한 표현의 본능으로 나타났고, 평론을 씀으로써 앎에 대한 지적 요구로도 나타났다. 당시는 열심이었지만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 몇 개 안 되는 작품들은 말도 안 될 만큼 피상적이거나 유치한 것으로밖엔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보들레르에 관한 학사 논문을 써내고도 나의 불어 실력은 소설 한 권 쉽사리 읽지 못할 정로로 빈약했고, 2년 후 가장 지적인 시인의 한 사람인 발레리에 있어서 시의 기능을 논함으로써 석사라는 증명서를 땄을 때도 불문학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거의 백지와 비슷했고, 소설이나 시를 분명히 분석할 능력이 없을뿐더러 지성인으로서 모든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이나 명석한 견해를 갖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애매하고 흐리멍덩했다. 지적인 면에서 나는 초조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1957년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파리에 가게 됐다. 파리에 도착한 나는 아찔하고 깜깜했다. 소르본을 드나들면서 나는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귀가 뜨이지 않고 입이 열리지 않고 펜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10개월을 보낸 나는 흐릿한 안개가 걷히듯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꼈다. 문학작품도 논리적인 설명을 거쳐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으며, 시도 조리 있는 해석을 통해서 더 깊은 감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그들의, 아니 서구의 논리에 거의 전율에 가까운 지적 매혹을 느끼고 그것을 찬탄하게 됐다. 그들이 지적으로 얼마만큼 앞섰는가는 그들의 역사적 유물이나 생활양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런 것의 기초가 되는 그들의 지성, 그들의 이성을 통해 알 수 있었고, 나는 그것에 감복했다. 머릿속이 정연히 정리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그곳 교수들이 부러웠다. 흐리멍덩한 내 머릿속은 안개가 가득 낀 것 같아서 답답했고, 그들의 머릿속은 마치 수건으로 닦아놓은 유리창처럼 투명한 것으로만 상상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투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상쾌하고 유쾌하랴. 고기 맛을 안 중처럼 약간이나마 지성과 학문의 진미를 알게 된 나는 지식에 대한 욕망을 뿌리가 빠지도록 만족시키고 싶었으나, 부득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다음 해 가을, 서울로 돌아왔고, 그 서울은 무척 초라해 보였다. 『문예사전』을 통해 어릴 적 발견한 서양을 나는 프랑스에서 목격했던 것인데, 그것은 막상 마주했을 때의 여인이 중매인이 보여준 사진 속의 그녀보다 더 매혹적인 경우와 비슷하였다. 딱지를 맞은 셈이 된 나는 소용도 없어진 그녀의 사진만을 기억 속에 갖고 있는 격이었다. 이미 한 학기를 보낸 바 있는 이화여자대학에 돌아왔다. 이 학교는 나를 따뜻이 반겼고 아껴주었다. 나는 아직 한창 젊은 때였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파리에서 돌아온 때는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문학이 붐을 일으키던 때였다. 발레리의 시편등을 번역하여 나도 이 붐의 한몫을 담당했다. 서투름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더러 오역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런 일을 꼭 좋아서도 아니면서 가볍게 한 데 대해서 지금은 뉘우친다. 두 번 다시 번역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밖에도 나는 잡문을 더러 썼다. 이것은 이름 석 자를 활자화하려는 허영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의욕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나의 머릿속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고 지성인으로서, 또 불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정신적으로 한없는 빈곤함을 절실히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와 같은 지적 모호성과 정신적 불안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표면상으로 나는 다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 모든 것에 대해서, 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고 명석해지고 싶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투명하기를 원했다.
이화여자대학과 인연을 맺은 지 4년 반이 지났을 때 나는 오막살이집과 얼마 안 되지만 아끼던 책을 팔아버리고, 함께 계시던 연로하신 어머님을 형한테 모시게 하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터무니없는 인생의 도박을 건 것이다. 나는 파리로 다시 떠났다.
불문학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요,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철 늦게까지 낭만 속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의 낭만을 찬미하는 데 그치거나 어떤 시인의 생활양식을 부러워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이상 직접 흉내라도 내고 싶다는 망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조이스나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피카소, 그리고 아폴리네르의 파리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날 끌어당긴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사르트르의 파리를 잊을 순 없었다. 사르트르는 나의 인생에 대한 태도, 인간에 관한 견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인간에겐 자유가 있으며, 한 인간의 인생은 그 당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는 화려했다곤 할 수 없는 나에게 위로와 아울러 주어진 환경을 깨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보겠다는 만용을 돋우어 주었던 것이다. 내가 거기에 다시 간 것은 남 보기 좋은 간판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이 서울에 가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서둘 때 나는 그들에 대해 철저한 경멸감과 측은함을 동시에 느낀 적도 있었다.
기숙사 한구석에 앉아 밤새도록 타이프를 치고 싶었다. 소르본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나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처럼, 연신 책을 쓰고 논문을 써내는 많은 파리의 지식인들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니 모든 문제에 대해서 조리 있고 질서정연하고 깊이 있는 견해를 갖고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었다. 내게 그들은 마치 신들처럼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존재같이 보였다. 그런 반면 내가, 아니 우리가 그들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리는 아직도 흙탕물처럼 탁했고 내 논리는 마치 가시철사처럼 얽혀 있었다. 내 혀는 아직도 반벙어리처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많은 책을 다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읽을 수도 없었다.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도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나도 무엇인가 특유한 경험이 있고 생각이 있다고 어렴풋이 믿어왔던 터이지만 그러한 것이 나의 무식한 착각, 혹은 자기 과대망상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좀더 구체적인 것부터 하나씩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학위 논문이란 명목을 걸고 말라르메에 관한 종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지적 훈련으로 생각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하며 지적인 것으로 이름 높은 이 시인을 택한 이유는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그의 시를 뒷받침하는 듯한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중심 개념에 주의를 갖게 된 까닭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가 난해했기 때문이었다. 난해한 시를 이해해보자는 나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부터 학자를 경멸하였던 이유는 학자란 대개가 남이 말한 것을 외우고 남의 책을 베낀 것을 또 베끼거나, 먼지가 끼고 곰팡이가 핀 고서를 뒤적거리는 일을 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박사논문이란 대개 이따위 종류의 일에 속하기 쉽다. 이러한 논문을 내가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근히 이런 일을 함으로써 지성의 좋은 훈련을 거칠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되도록 주석적인 일을 피하면서 가능하면 가장 종합적이고 논리적인 통일된 새로운 해석을 말라르메의 시에 붙여보려고 애썼다. 당시에도 어느 정도 느낀 바지만 결과는 역시 퍽 피상적이었다.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논리정연한 전개를 하여 나의 전체적인 관점을 뒷받침하지 못한 데 비해서 쉽사리 통과는 되었지만 나의 논문이 불만스러웠고, 나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넘어서 실망까지 한 적도 많았다. 나의 논문이 유치한 것 같았다. 그후 뜻밖에도 이 논문의 출판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던 날의 놀라움과 기쁨과 격려되는 마음은 보통이 아니었다.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철학으로 통한다는 말에는 깊은 일리가 있다. 모든 학문은 반드시 어떤 원칙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모든 사유, 즉 이치도 반드시 어떤 전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전제의 옳고 그릇됨이 따져지고 설명되기 전에, 이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 사실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다른 학문이 받아들인 전제를, 즉 원칙 자체를 비판하고 설명하려 한다. 가령 말라르메의 시를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면 그 판단에는 반드시 위대성에 대한 기준이 이미 있어야 하는데, 철학은 어째서 그 기준이 옳은 기준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따지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원칙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갈 수 있는 한까지의 철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문이고 깊이 추구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전문적인 의미로서의 철학가가 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철학적 문제 자체와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 체계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것도, 나의 내적 욕구로 보나 내가 말라르메를 이해하려 하는 시도로 보나 거의 필연적인 결과라 해도 틀림없다.
파리에 간 지 2년이 되던 해부터 나는 논문을 준비하는 틈틈이 하나둘 철학강의를 듣기로 작정했고, 논문이 끝난 다음 해에는 년 동안 남아 전적으로 철학강의만을 들었다. 그곳의 철학강의를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던 그해 6월에도 나의 머릿속은 아직 잘 정리되지 않았고 문학에 대해서, 또 허다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의 인생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명확하고 자신 있는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시원스럽게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모든 것이 아직도 희미할 뿐인데 이렇게 지내는 동안 서울에 둔 벗들과 멀어지는 것 같았고, 가족과도 감정적인 거리가 커짐을 느꼈다. 그렇다고 꼭 이렇다 할 애인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잇장 증명서 두 장이 창백해진 두 손에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돈이 있거나 생활할 길이 있었더라면 나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내 숙제의 뿌리를 빼보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여의치 않던 나는 마침내 지적으로 흥분도 했었고 환희와 다소의 희열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평생 처음으로 지적인 성장을 크게 체험했고 그럼으로써 애착을 갖게 된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다. 미국행이 유일한 찬스라고 생각한 나는 그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미국에서 철학을 좀더 배우고, 유럽과 다르다는 미국의 정신적 풍토에서 새로운 각도로 여러 지적 문제를 재검토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있는 미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비자를 받아 쥐고 이른 가을의 맑은 하늘 밑에서 아름답고 넓은 콩코드 광장에 서서 말할 수 없는 공허감과 어떤 외로움, 그리고 뜻을 채우지 못한 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파리를 떠난다는 마음에, 그리고 또다시 낯선 곳에서 또 하나의 서툰 말로 학생생활을 시작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일종의 피로 섞인 공포감으로 흐느낌에 젖어들었다. 그때 벌써 내 나이는 빠르면 중학생의 자녀를 가졌을 만한 때였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