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아메리칸드림: 신화와 현실
오하이오로Ohio로 돌아갔지만 이미 내 고향은 사라지고 없었다.더블린의 도심에 이를 수 있다면세계 모든 도시의 중심에 이를 수 있는 셈이다.특수성 안에 보편성이 포함되어 있다.
1950년대 나의 고향 마을은 아메리칸드림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의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배경과 관계없이 상당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오하이오 주 포트클린턴Fort Clinton에서의 삶은 찢겨진 스크린에 나타난 ‘아메리칸악몽’이 되었다. 포트클린턴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선로가 있다. 이 선로를 기점으로 낙후된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부유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처럼 준비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슬프게도 포트클린턴의 이야기는 오늘날 미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저주받은 행로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가 바로 이 책의 주제다.
가장 최신의 엄밀한 사회경제사적 성과들은 미국의(그리고 포트클린턴의) 1950년대가 한 세기를 통틀어 사회경제적 장벽이 가장 낮았던 때였다고 말하고 있다. 경제와 교육의 수준이 크게 신장되었고, 소득균등율도 비교적 높았으며, 이웃 간이나 학교 내에서의 계급 차별도 적었다. 계급 간의 결혼이나 교류에 대한 장벽은 낮았으며, 시민 참여와 사회적 연대는 활발히 이루어졌고, 낮은 계급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사회경제적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기회도 풍부하게 주어졌다.
1950년대의 포트클린턴은 비록 작은 도시이고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모든 점에서, 즉 인구학적, 경제적, 교육적, 사회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측면에서도 지극히 전형적인 미국의 축소판이었다. 포트클린턴이 중심 도시인 오타와 카운티Ottawa County는 미국 사회의 지표bellwether라 할 수 있는 오하이오 주에서도 선도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이 카운티County(주 아래에 있는 행정 구역으로 산하에 시City.읍Town.리Village 등을 두고 있다. -역자 주)의 선거 결과가 미국 전역의 선거 결과와 가장 근접하게 나타났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 급우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가난한 두 백인 아이인 단Don과 리비Libby, 그리고 가난한 두 흑인 아이인 제시Jesse와 셰릴Cheryl 앞에 펼쳐졌던 재능과 노력에 바탕을 둔 출세의 기회가 우리 학급에서 사실상 유일한 특권층 집안 자손이었던 프랭크에게 펼쳐졌던 기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한 도시가 미국에 대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의 포트클린턴 역시 결코 파라다이스는 아니었다. 그 당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포트클린턴의 소수자들은 심각한 차별을 겪었고, 이 장의 뒷부분에서 이에 대해 조사할 것이지만, 여성들이 주변화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계급이 기회를 제한하는 주된 요인은 아니었다.
21세기의 포트클린턴으로 시선을 돌리면, 오늘날 부유한 아이들과 가난한 아이들, 예컨대 이 장에서 만나게 될 첼시Chelsea와 데이비드David와 같은 아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전혀 다르다. 지금의 포트클린턴은 아주 분명하게 계급이 나누어졌다. 학교 직원에 따르면 부잣집 아이들은 고등학교 주차장에 BMW 컨버터블을 주차하고, 그 옆에는 집 없는 급우들이 매일 밤 머무를 곳으로 타고 가는 낡고 털털거리는 차들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포트클린턴에서 일어난 변화는 이 많은 아이들에게서, 그리고 인종과 젠더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서 아메리칸드림의 약속을 부정해버렸다. 그것은 경제 상황, 가족 구조와 양육, 학교, 이웃 관계 등에서 나타나는 변화로 놀랍게도 오늘날 미국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1959년의 포트클린턴은 기회의 평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에 시간과 장소 면에서 아주 적합하다. 현재의 우리가 아메리칸드림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가를 잘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1959년 6월 1일은 덥고 화창했다. 하지만 150명의 졸업생들이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졸업장을 손에 쥔 채로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포트클린턴 고등학교Port Clinton High School의 계단으로 우르르 내려가던 저녁 무렵에는 시원해졌다. 우리는 아직 이리 호Lake Erieㅛ 기슭에 위치한 6,500명(대부분 백인)이 거주하는 이 유쾌하고 친근한 도시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늘 그랬듯이 졸업식은 공동체 전체의 축제였고 참석 인원은 1,150명에 이르렀다.4 가족이든 아니든 간에 마을 사람들은 모든 졸업생들을 ‘우리 아이들’로 생각했다.
단
단Don은 상냥한 말씨의 백인 아이로 그의 가정은 노동자 계급에 속했었다. 그러나 우리 반에서는 아무도 그의 출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의 스타 쿼터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8학년까지만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가계 부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했다. 첫 번째로 포트클린턴 매뉴팩처링Fort Clinton Manufacturing의 공장 생산라인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했고, 두 번째로는 거기서 조금 걸어가면 있는 통조림 공장에서 오후 3시 30분부터 저녁 11시까지 근무했다. 어머니는 11학년에 학교를 떠난 후, 단의 말을 빌리면 오로지 무無에서 모든 음식을 만들어내면서 “부엌에서 살아왔다.” 매일 밤 그녀는 단과 그의 두 형제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그들은 감자와 집에 남아 있는 모든 재료를 볶아서 만든 해시요리를 먹는 데 익숙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무렵이면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마을의 가난한 지역에 살았고, 단이 대학으로 떠날 때까지도 자동차와 텔레비전이 없었다. 당시 미국 가정의 80%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고 90%는 TV를 가지고 있었다. 매주 이웃 사람들이 그들을 교회에 태워다 주었다. 가족들이 휴가를 갈 돈은 없었지만, 단의 부모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단의 아버지는 실직한 적이 없었다. 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대학에 가서 경제학 101 수업을 듣고 내가 ‘혜택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나는 내가 가난한 줄 몰랐어.” 그들의 평범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단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도록 권장했고, 단은 우리 반의 다른 노동자 계급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포트클린턴 고등학교PCHS의 대학 진학 준비 과정을 선택했다.
그는 어머니의 강요로 6년 동안이나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나 정작 그가 좋아한 것은 스포츠였다. 그는 농구와 미식축구를 즐겼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휴가를 내어서라도 단이 하는 시합마다 늘 참석했다. 단은 포트클린턴에서의 계급 차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마을의 동쪽에 살았고 부자들은 마을 서쪽에 거주했지. 그러나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서로 동등하게 대했어.”
비록 고등학교에서의 단짝 친구들은 아무도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단은 공부를 잘 했고 우리 반 상위 15%의 성적으로 학교를 마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자식을 대학에 보낼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교회와 강한 연을 맺고 있었다. “마을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고, 한 대학에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를 해주셨지. 그래서 그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어”라고 단은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목사는 단이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입학 수속을 밟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포트클린턴 고등학교를 마친 후 단은 주 남쪽에 있는 기독교 계열의 대학교에 진학했으며(거기에서도 미식축구를 했다), 이후 신학교로 진학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그는 자신이 목회자로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부모에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인사를 하려고 마을의 당구장에 들렸다. 그의 아버지와 오랜 친구 사이인 당구장 주인은 그를 “미래의 목사님”이라고 불렀고, 손님 중 한 사람은 단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단은 이것을 목회자로서의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대학을 마친 직후 단은 고등학교 교사인 준June과 결혼해서 아이 하나를 낳았다. 나중에 이 아이는 학교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단은 목회자로서 오랫동안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최근에서야 은퇴했다. 여전히 그는 지역 교회들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수년 동안 해왔던 고등학교 미식축구 코치 역할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돌이켜보건대 자신이 아주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가난하지만 굳게 단합된 가정에서 성공적인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의 타고난 지적 능력과 미식축구장에서 보여준 근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런 식의 지위 상승upward mobility이 우리 반에서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프랭크
프랭크Frank는 포트클린턴에서는 많지 않던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19세기 말 그의 어머니 쪽 증조부가 어업과 관련한 사업을 했고, 프랭크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부동산 사업과 지역의 여러 가지 사업으로 업종을 다양화했다. 그의 어머니는 1930년대에 대학을 졸업했고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시카고에서 어머니는 목사의 아들로 대학을 졸업한 프랭크의 아버지를 만났고 곧바로 결혼을 했다. 프랭크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어업, 쇼핑센터, 농장, 식당 등의 집안 사업을 관장했고 어머니는 자선사업을 했다.
포트클린턴의 사회적 엘리트들은 포트클린턴 요트 클럽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프랭크의 성장 기간 동안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은 각각 일정 기간 동안 이 요트 클럽의 ‘회장Commodore’직을 맡았으며 어머니와 이모는 지역 내 사회적 지위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선원들의 선장Shipmates Captai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프랭크의 부모는 1959년 졸업반 학생들의 부모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사회적으로 저명했던 학부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가정과 사회경제적 사다리의 맨 아래에 있던 가정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는 오늘날 미국의(그리고 심지어 포트클린턴의) 일반적인 상황과 비교해도 훨씬 더 가까웠다. 단의 집에서 고작 네 블록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프랭크는 이웃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잘 섞여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그중에는 트럭 운전사, 가게 주인, A&P 슈퍼마켓의 계산원, 주요 지방 법률 회사의 직원, 소방서장, 주유소 주인, 수렵구 관리인 등이 있었다. 프랭크는 말한다. “우리는 뒷마당에서 야구를 하거나 모퉁이에서 깡통 차기를 하면서 놀았어. 모두가 함께 정말 잘 지냈지.”
유복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면 프랭크는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했고 15세 무렵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페인트칠을 긁어내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도 했다. 그의 가족들은 프랭크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하려고 신중하게 처신했다. “포트클린턴에서 콜라 한 병 간신히 살 수 있는 아이들 사이에 함께 있다면, 그게 바로 네 운명이란다.” 프랭크의 할아버지는 프랭크의 삼촌에게도 늘 이를 잊지 않도록 주지시켰다. “만약 우리가 클리블랜드나 뉴욕에 있었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포트클린턴의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한단다.”
고등학교에서 프랭크는 급우들과 사회적으로 서로 동등하게 지냈다. 사실 그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우리 중 상당수는 그의 범상치 않은 배경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조금 표가 나기는 했다. 그는 우리 반에서 맨 처음 치열 교정기를 착용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겨울 몇 달을 플로리다에 있는 집에서 보냈으며 학교도 거기에서 다녔다. 그의 할아버지는 교육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한번은 프랭크의 부모가 학교 선생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프랭크는 어머니에게 “왜 반 아이들 모두 앞에서 저를 당황하게 만드셨어요?”라고 불평했다. 부모가 성적을 바꾸려고 간섭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프랭크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농담하세요? 오, 저런. 우리들이 아는 한 선생님들은 항상 올바르시지요.”
프랭크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그의 교육에 대해 부모가 가진 기대감은 결코 낮지 않았다. “내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프로그램화되어 있었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졸업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부모의 재정 지원 덕분에 그는 오하이오의 작은 대학에 진학하여 언론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마친 후 해군에 지원했으며 7년 동안 해군 수송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회상한다. “나는 그 일을 좋아했지.”
해군 복무를 마친 후 프랭크는 《콜럼버스 디스패치Columbus Dispatch》지의 편집장으로 25년 동안 일하다가 회사의 인사 결정에 반대하면서 해고되었다. 이때 그는 반쯤 은퇴한 상태로 포트클린턴으로 돌아왔고, 생선 세척 사업, 선착장 임대, 양품점 등 가족 사업을 돌보았다. 몇 년간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자기 손주를 위해 만들어놓은 신탁기금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고 프랭크는 털어놓았다. 프랭크의 가족이 지닌 부와 권력이 인생의 몇몇 위기에서 그를 보호해주었지만, 그것이 단과 같이 덜 풍족한 집안 출신의 또래들보다 앞설 수 있도록 프랭크를 높이 띄워준 트램펄린trampoline은 아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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