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공연
배역에 대한 믿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때, 개인은 자기가 조성한 인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관찰하는 이들에게 암암리에 요청한다. 관찰자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배역 인물의 속성이 연기를 하고 있는 개인의 실제 속성이며, 그가 행하는 일이 그 결과라고, 그리고 보이는 그대로가 중요한 사실이니 믿으라고 요청받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개인의 공연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대중적 관점도 있다. 질문의 방향을 돌려, 개인이 주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려 한 인상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면서 공연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공연자가 연기에 완전히 몰입하여 진심으로 자기가 연출하는 인상이 진정한 실체라고 확신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있다. 관객 역시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의 연기에 설득당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진실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사회학자나 불평분자뿐일 것이다.
정반대로 공연자가 자기 연기를 전혀 믿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공연을 하는 사람만큼 연기를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공연자가 자기에 대해 또는 상황에 대해 관객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단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관객을 설득하려는 행보를 보일 수도 있다. 자기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고 관객의 생각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냉소적’이라고 말한다. 또 ‘진실하다’는 말은 공연에서 스스로 조성한 인상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냉소적인 사람은 자기의 모든 직업적 의무를 방기한 채 직업윤리에 어긋난 가면극을 즐긴다. 그런 사람은 관객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을 자기가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일종의 정신적 공격의 쾌감을 느낀다.
물론 모든 냉소적 공연자가 ‘이기적’이라거나 사적인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관객을 속이려 든다는 뜻은 아니다. 관객이나 공동체를 위한 선행이라 생각해서 관객을 속일 수도 있다. 굳이 쓰라린 깨달음을 얻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순자와 같은 성인들에게서 그런 실례를 찾을 필요는 없다. 평상시에 진솔한 서비스 직종 종사자라도, 때로는 고객이 진심으로 요구하는 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객을 속일 때가 있다. 환자에게 위약placebo을 투여할 수밖에 없는 의사, 불안해하는 여성 운전자를 위해 자동차 타이어의 압력 상태를 거듭 점검해주어야 하는 주유소 직원, 여성 고객의 발에 맞는 구두를 팔면서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치수의 구두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는 제화점 직원. 이들은 모두 관객이 허락지 않아서 진실할 수 없는 냉소적 공연자들이다. 비슷한 사례로, 동정심이 많은 정신병동 환자들은 간호 실습생이 자신들을 정상으로 진단하고 실망할까 봐 일부러 괴상한 증세를 꾸며낼 때도 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체 높은 방문객에게 최상의 환대를 베푸는 경우, 상대의 호감을 얻으려는 이기적 동기가 아니라 상대가 당연히 여기는 세계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요령일 수 있다.
나는 개인이 자기가 연기한 바를 그대로 믿거나 완전히 냉소하는 극단적인 두 가지 경우를 제시했다. 이 두 극단은 단순히 연속선의 양극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두 극단은, 각기 개인에게 안전을 지키고 방어할 나름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 극단에서 시작해 다른 극단으로 이동하며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믿음 없이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파크Park가 기술한 다음과 같은 행보를 따른다.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뜻이 ‘가면’이라는 게 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언제 어디서나 다소 의식적으로 역할을 연기한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중략) 우리는 역할을 통해 서로를 안다.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도 역할을 통해서다.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분투하면서 우리가 구축해온 스스로에 대한 관념을 가면이라 한다면, 가면은 우리의 참자아,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자아다. 결국 역할이라는 것은 우리의 제2의 천성, 인성을 구성하고 통합하는 성분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이 세상에 들어와, 성격을 획득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된다.
셰틀랜드 섬의 공동체 생활에서 실례를 볼 수 있다. 지난 4~5년간, 소농 출신 부부가 섬의 관광호텔을 소유하고 운영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은 한쪽으로 밀쳐두고, 철저하게 중간계급 수준의 서비스와 위락시설을 호텔에 갖춰놓아야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호텔 경영진도 스스로 연출하는 공연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점차 줄어들면서 그들 스스로가 중간계급이 되어가고 차츰 고객이 그들에게 부여한 자아 개념에 빠져든 듯 했다.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의 예도 있다. 처음에는 그저 물리적 체벌을 피하려고 군대식 예법을 따르던 신병도, 결국엔 조직에 누를 끼치지 않고 상관과 동기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규칙을 따르게 된다.
앞서 지적했듯, 배역에 대한 불신-확신의 경로가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강한 신념이나 불확실한 기대로 시작했으나 냉소로 끝나는 경우다. 대중이 거의 종교적 경외심까지 품는 전문직 신참들이 흔히 이러한 경로를 따른다. 그들이 관객을 속이고 있음을 서서히 자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보통의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타당한 주장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관객과 접촉할 때 그들의 내적 자아를 분리·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냉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전문직 신참들은 그런 경로를 따르게 된다. 공연할 자격 요건을 갖추는 데 필요한 태도로 시작한 사람이, 진실성과 냉소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가면서 모든 단계와 전환점을 거쳐 마침내 소임을 확신하기에 이르는, 직업의식의 전형적 발전 경로로 볼 수 있다. 의과 대학생들은 이상주의적 지향성을 지닌 신입생에게 그 거룩한 포부를 한동안 제쳐놓으라고 말한다. 첫 2년 동안 의대생은 시험에 통과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의학적 관심사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다음 2년은 질병에 관한 공부를 하느라 너무 바빠 정작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관심을 보일 겨를이 없다. 의학 공부가 끝난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그들이 처음에 지녔던 의료 활동의 이상理想을 되새길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이 냉소와 진실성 사이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르는 행보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환상의 힘이 남아 있는 일종의 과도기 상태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과 상황에 대한 관객의 판단을 유도할 수도 있다. 또 그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기도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관객의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거나 자기가 조성한 인상의 타당성을 온전히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 크뢰버Kroeber는 샤머니즘을 다루면서 냉소와 믿음이 뒤섞인 예를 든 바 있다.
다음으로, 속임수라는 오래된 문제가 있다. 세계 도처에서 무당이나 치유술사들은 치유나 마력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대부분 손재주를 곁들인다. 계산된 손재주일 경우도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재주라는 인식을 억눌렀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속임수를 종교적 방편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현지 연구 민속학자들에 의하면 대체로 속임수를 쓰는 무당들조차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마력, 특히 다른 무당들의 마력을 믿는다. 그래서 본인 혹은 제 아이들이 아플 때면 다른 무당들을 찾아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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